수트는 남자의 마음을 지배하고 사로잡지만 동시에 자못 불안하게도 한다. 수트야말로 알면 알수록 알아야 할 게 점점 더 많아져서 고민인 옷이므로
노치드 라펠과 피크드 라펠만 구분해도 흐뭇하던 시절을 거쳐 46이니 48이니 하는 치수보다 더 중요한 게 ‘드롭’이란 걸 알게 될 때쯤이면 좋은 수트를 가려내는 눈이 생긴다. 여태 ‘와이드 스프레드 칼라’라고만 했는데 누군가 그걸 ‘컷 어웨이 칼라’라고 하면 그 말에 솔깃하고 다른 남자의 라펠 크기에도 예민해진다. 일종의 겉멋이 는다. 곧 ‘호스’라고 불리는 종아리까지 오는 수트용 양말을 구하려고 외국 백화점을 뒤지고 십일조 내듯 월수입의 일정부분을 오닉스커프링크스와 한 벌의 스터드, 그것과 어울리는 타이바를 사는 데 쓰기도 한다. 그러다가 이건 너무 고지식한 게 아닌가 슬쩍 의구심이 든다. 수트를 공식과 규칙으로 섬기는 일본 남자들이 시시해지고 유럽 신사들의 변칙에 마음이 간다.
셔츠 커프스 위에 시계를 차고 버튼다운 셔츠 칼라의 단추를 풀어두는 지 아니 아넬리 스타일, 타이의대검보다 소검을 더 길게 매고 스리버튼 재킷의 첫 번째 단추를 채우는 프랑코 미누치 스타일이 눈에 띈다. 노련하고 능숙해 보인다. 어쩌면 ‘클래식 수트 월드’에서는‘실수’일테지만 그럴 만한 남자들이 그러니까 ‘파격’이다. 이런 게 좋아지는 수준이 되면 수트의 건실함과 방종함, 수트의원칙주의와 감상주의 모두를 느끼게 된다. 자연스러운 단계다. 그럴 만한 여건만 된다면 수트의 기승전결 그래프를 찬찬히 누려보는 것도 남자로 사는 즐거움이니까. 문제는 밑도 끝도 없이 파격적이고자 하는 놀라운 작정이다. 어떤 남자들을 볼 때면 양녕대군이 생각난다. 모종의 계획이 있어서 일부러 미친 척하는 걸까? 멀쩡한 회색 초크스트라이프 수트를 입고 빨간 안경을 끼거나 베스트에 회중시계까지 달고서 형광색 볼링화를 신는 게 무슨 어불성설신선함일까. 드디어 첫 번째 수트를 사려고 마음먹은후배에게 권한 건 수트의 정석이었다. 미리 봐둔 회색 글렌체크수트를 입어보러 함께 가는 길이었다.“수트를 사고나면 구두도 사자. 지금 가진 구두는 수트하고는 안 맞으니까.”수트 초보자는 곧 난처한 얼굴이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수트나 한 벌 장만하려던 심산이었는데 이런 식으로라면 셔츠와 타이, 구두와 양말까지 몽땅 사야 하는 건가 염려가 됐을테니까.
그 얼굴을 보면서 덧붙였다.“옛날에 하루키가문학상을 받으러 갈 때 도산한 백화점에서 마지막 세일을 하는 수트를 사가지고 일부러 세탁기에 빙빙 돌려서 입었다는 글을 읽었어. 그땐 그게 멋있어 보였지. 상 받는답시고 좋은 옷사서 촐싹거리지도 않고, 역시 하루키라고 감탄했달까.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기껏 산 수트를 일부러 구기고 더러운 테니스화를 신고 가는 게 객기 아니고 뭔가 싶어. 첫 수트니까 제대로 입자.” 검정 수트를 입고 물 빠진 파란색 티셔츠에데저트 부츠를 신은 키아누 리브스의 사진을 여기 싣는 건, 수트를‘캐주얼하게’ 입는다는 게 어떤 건지 말하고 싶어서다. 타이는 귀찮은데 그렇다고 점퍼에 진을 입기는 싫을 때 참고할 만하다. 잘 보면 색도 예쁘게 맞고소재배합도 안전하다. 무엇보다도 키아누 리브스가 입고 있는 검정수트는 클래식 수트라기보다는 이런 식으로 입기 적당한 스타일이다. 타이를 일부러 비뚤게 매거나 난데없이 셔츠 속으로 쑤셔 넣는 것, 보타이도 아닌 것을 리본 매듯 괴상하게 매듭짓는 것, 재킷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입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다고 수트마저도 ‘캐주얼하게 입어주는’ 자유로운 영혼이 느껴지는 건 아니니까. 변칙도 아니고 실수도 아니고 파격은 말할 것도 없고
- 에디터
- 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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