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하자고 만난 건 아니었지만 나란히 누웠다. 굳이 안하자고 마음먹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 날은 이랬다.
여자가 이런 말을 할 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우린 한 방에 있었다. 깔끔한 반 지층이었다. 들어가기 전에, 여자는 말했다. “좀 지저분한데….”이런 말은 그저, 예의라고 생각하면 된다. 말 한마디로 웬만큼의 ‘더러움’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관용이 생기니까. 하지만 저런 말을 미리 하는 여자치고, 정말 지저분한 방을 보여준 여자는 아직 없었다. 싱크대엔 젖은 식기 하나 없었고, 냉장고엔 유통기한 지난 베이컨 하나 없었다. 어제 산 우유는 반쯤 남아 있었다. ‘어머니가 보내주셨다’는 한약 몇 봉지. 잼과 버터, 사과 몇 알이 전부였다. 방엔 아침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옅은 에센스 냄새가 습기를 머금고 화장대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 아침엔 분명 매캐했을, 머스크가 섞인 향수 냄새도.결과적으로, 여자가 “좀 지저분한데…”라고 말할 땐, 그저 ‘귀엽네’정도로 생각하면 될 일이다. 고민하게 만들었던 건 다른 말이었다. 마지막 치즈를 입 속에 넣으면서, 그녀가 말했다. “내가 여자로 안 보여요?” 내 눈이 동그랗게 변한 걸 그녀도 봤을까? 잔에 남은 와인을 한 방울도 안 남기고 마신 건 당황해서였을까? 어쨌든, 이렇게 말했다. “여자로 보이죠. 꽤 예쁜 얼굴이기도 해. 몸도…. 당연히 여자로 보이죠. 내가, 달려들어서 브래지어 후크라도 풀어야 ‘아, 이 남자가 나를 여자로 보긴 하는구나’ 생각할 거예요?”
우린 서로 존대하는 사이였다. 만난 지 5년 남짓 된 동갑내기인데도. 그 이상 가까워질 기회도, 이유도, 계기도, (마음도) 없었다. 아니, 마음은 있었을까? 서로 한 번쯤은 고백했으니까.“나랑, 사귈래요?”4년 전에 내가 말했고, “나, 당신이 좋은 것 같아.” 3년 전에 그녀가 말했다. 같은 학원에서 밤새 공부하다 ‘산책하자’고 나선 고 3 애들처럼, ‘내 마음은 이러니까 당신이 어떻게 좀 해봐’정도로 소극적이었다. 이날도 그랬다.브래지어 후크 운운했을 때, 여자는 ‘파하’하고 웃었다. 이건 장기라면 장기고, 실수라면 실수일 수 있는 대화의 묘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말했을 때, ‘옳다꾸나’하고 “그럼 재주껏 내 후크를 풀어 봐요. 그 다음은 마음대로 하게 해줄게” 말하는 여자는 없을 것이다. 대신 “이 남자 귀엽네”생각하는 정도겠지. “왜 웃죠? 다른 남자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하는데? 얘기해봐요.” “…….” “왜? ‘이럴 때’라는 게 감이 잘 안 와요? 왜 그럴 때 있잖아요. 둘 다 취했고, 서로 적당히 호감은 있고, 손 정도는 재미로 잡아보기도 했고, 볼에 하는 ‘뽀뽀’정도는 유쾌하게 넘길 수 있는 사이.” “그런데 시간은 새벽 두 시가 됐고, 남자는 할증 끝날 때까지만 집에 있다 가겠다고 속이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때요?” 여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또 웃었다. 여자를 웃게 하는 건 남자로서도 뿌듯한 일이지만, “내가 여자로 안 보이죠?”라고 물었던 여자를 자꾸 웃게만 만드는 건 ‘새벽 두 시의 남자’로서 그다지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 않나.
이때 깨달은 건, 그녀와 나의 몸이 여자의 어디라도 만지기엔 좀 멀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침대 위에, 그녀는 바닥에 앉아 있었다. 곰인가 고양이인가를 열세 살 소녀처럼 안고. 이렇게 멀리 있어선, 생길 일도 안 생긴다고 생각했다. 손을 뻗으면 가까스로 안주에 가 닿았다. 안주는 필요 없다. 일단, 두 팔이 그리는 궤도 안에 그녀를 둬야 한다.그래서 내려앉았다.“어머, 왜 이래요?”“뭘요? 아니, 손이 왜 이렇게 차요?”물론, 다짜고짜 손부터 잡았던 건 아니다. 내려앉아서 나란히 벽에 기대앉았다. 건배를 두 번인가 했나? 십 분 정도를 더 얘기했다. 직장, 연애, 고민 같은 것들. 이십대 마지막 겨울을 보내고 있는 남자와 여자라면 몇 날 며칠이고 지치지도 않고 얘기할 수 있는 그런, 진부하면서도 중요한 대화들. 그러면서 엉덩이를 아래로 빼기 시작했다. ‘자세’말고 반항이라곤 할 여지가 없는 고등학생처럼. 여자는 의지로 꼿꼿했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가 흐트러지면, 그건 허락이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남자는, 괜찮다. 허리에 쿠션을 받쳐놓고, 머리가 그녀의 옆구리 즈음에 닿을 때까지 기대앉았다. 이제 엎드릴 차례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울 신체적 구실이 생긴다. 벽에서 시작해 그녀의 무릎까지, 쉬운 동선이 그려진다. 그래서 무릎을 베고 누웠고, 마침내 잡은 손이었다. “저 손 원래 차요….”그러기에 “누워요”라고 말할 뻔했다. 안 될 말이다. 대신 두 손으로 모아 잡았다. 그녀가 말했다. “나랑 자고 싶어요?” ‘당황하면 안 된다, 당황하면 안 된다’고 속으로 생각하는 동안 이미 시간이 좀 흘렀다. 어떤 여자라도, 자기가 한 말 때문에 이 남자가 충분히 당황했다고 확신할 만큼의 시간. 15초 정도의 적막. 엇갈리는 승리와 패배. 지혜로운 반격의 시간. 정직이 최선의 무기라는 속담. 눈을 보면서 대답했다. “응.”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변한 걸 보면서 웃었다. 두 손으로 쥐고 있던 손은 이제 ‘나의 체온’이 됐다. 여자는 애써 손을 빼려고도 하지 않았다. 힘이 빠져서 부드러웠다. 이젠 무릎을 베고 누운 채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오른손을 뻗어야 할까? 목 뒤로 손을 넘겨 힘을 주고 키스, 하기 전에 얼굴을 마주 볼 차례일까? 그전에 여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서른 살쯤 되는 남자와 여자가 관계를 맺는다는 건, 어떤 약속 같은 거예요. 난 그렇게 생각해.” 이번엔 내 입이 동그랗게 됐다. “아아니”를 발음하기 직전의 모양으로. 그러다 툴툴거렸다. “쳇, 뭐가 그렇게 무거워요? 이제 서른 살쯤 되는 남자와 여자는, 아무 약속 없이도 그럴 수 있는 거 아닌가?”“어머? 누가 그래요? 어쨌든 난 그렇게 생각한다니까? 어머!”시간은 새벽 세 시를 향해 가고 있었고, 귀 밑으로 그녀의 허벅지가 부드러웠고, 이미‘자고 싶다’고 말까지 했는데 뭘 더 점잖은 척할까 싶었다. ‘덮치다’‘끌어안다’‘힘으로 제압하다’같은 말들 중 이날은 어떤 말이 옳았을까? 어쨌든 바닥에 나란히 눕게 했다. 그리고 건배. 여자는 놀라다 말고 ‘풉’웃었다. 와인잔이 얇아서, 소리는 맑았다.
곧 내 팔을 베고 누웠다. “당신이 ‘약속’ 운운하니까 자고 싶고 뭐고 아무 생각도 안 나. 그러면서 ‘내가 여자로 안 보여요?’같은 질문은 왜 해요?”“질문도 못해요?”“다른 남자들은 어땠어? 남자친구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했죠? 6개월?”“…….”“아직도 회복이 안 됐어? 가장 빠른 방법은, 빨리 다른 남자를 만나는 거예요. 약속 같은 거 없는 그런 거 있죠? 뭐 같이 와인 마시다 어쩌다 같이 누웠는데 이 남자가 날 여자로 생각하는지 어쩌는지도 모르겠는데 같이 자자고는 하고…. 그런 남자랑 한번 자보는 거야. 누가 알아요? 다음 날 어떤 사이가 될지?”여자는 알았을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내 얼굴이 얼마나 웃겼는지. 스스로도 웃음을 참으면서 방언 터지듯이 한 말이니까. 결국,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웃기죠? 우리 대화, 완전 <경마장 가는 길>이네.”“응?”“‘네가 지금 나와의 섹스를 거부하는 이데올로기는 무엇이더냐?’였나? 문성근 씨 대사. 강수연을 유혹하면서. 그걸 유혹이라고 할 순 있나? 어쨌든.”여자가 팔 안으로 파고들었다. 내 왼손이, 그녀의 왼쪽 어깨 위에 있었다. 와인병은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이번엔 내가 말했다.“이거 왜 이래요? 약속이라며, 파고들고 그래요?”“누가 하재요?”그러면서 안았다. 몸을 웅크리는 여자 티셔츠 속으로 오른손을 넣었다. 등을 쓰다듬었더니, 고양이처럼 갸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브래지어 같은 걸 하루 열 몇 시간 입고 있는 건 얼마나 갑갑할까.
인류애를 닮은 마음으로, 후크를 풀렀다. 엄지와 검지, 중지로. “어머?”“그만 좀 놀라요, 이제.”여자가 상체를 일으켰다. 이땐, 둘 다 웃는 얼굴이었을까? 여자는 옷을 벗지 않았다. 대신 두 발로 섰다. 그리고 말했다. “나, 이제 잘래요. 침대로 올라와요. 할증, 곧 풀리긴 하지만…눈 좀 붙이고 가야지 않아요?”여자는 졸린 눈, 혹은 취한 눈을 하고 침대로 파고들었다. 그 때,리넨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은 적당히 부풀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따뜻할 것 같아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왼팔은 여자의 목 밑으로 내줬다. 오른손은 배 위에 뒀다. 모로 누운 여자의머리카락에선 지난 아침의 향수 냄새와, 열여덟 시간만큼의 다른 냄새가 섞여 났다. 가슴께부터 하체까지가 닿아서 따뜻했다. 내 몸의 어딘가 닿았을 때, 여자의 몸이 움직이면서 또 다른 소리를 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면서 안경을 벗었다. 세 시 오십 분이었다. 십분 후면, 할증이 풀린다. 여자의 부드러운 배가 규칙적으로, 지나치게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 에디터
- 정우성
- 아트 디자이너
- Illustration/ Kim Eun J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