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진 콘돔을 둘러싼 바보 같은 얘기. 그러나 끝을 묶어서 버린 콘돔처럼 다 끝난 얘기다. 콘돔은 또 살테지만.
벗어 놓은 옷 위에 고양이가 앉아 있다. 고양이는 옷 위에서 아주 조금 가벼워질 것이다. 우리가 체온을 나눈 적이나 있다면 옷에 붙은 털을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다 옷에 물 한번 쏟은 벗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나타나면 고양이는 숨었다. 이 고양이에게 털끝 하나 닿아본 적 없다. 고양이는 숨기 위해 움직이는 동물 같았다. 옷을 벗으면 고양이는 나타났다. 옷 위에 앉기 위해서이거나, 옷의 주인이 그 자리에 없기 때문이다. 옷의 주인은 그의 주인, 사적으론 반려자와 함께 누워 있었다.
“네 옷에도 저러니?”
“옷 위에 앉는 걸 좋아하더라.”
그녀한테도 그런다면, 친밀감일 수 있었다. 그녀와는 세 번을 만나 만날 때마다 그녀의 집에 갔다. 고양이가 벗어놓은 옷 위에 올라간 횟수도 같았다. 그건 친밀감이 아니라 무례함이라고 따로 부르는 말이 있었다. 처음 만난 사람이 갑자기 손을 덥석 잡는다거나, 지나치게 근거리에서 이야기하는 경우, 의사 전달은 표정만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고양이는 우리를 보며 기지개를 켤 뿐이다. 그녀가 이리 와 보라해도, 고양이는 기지개를 켠 뒤 그대로 앉는다.
“고양이는 자기를 제외하면 모두 평등하게 대해. 그래서 좋아.” 그녀가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말한다. 사람들은 거짓말을 할 때,자기도 모르게 눈을 다른 쪽으로 돌린다거나 옷으로든 손으로든 입을 가린다. 거짓말에는 거짓말 할 의도는 없었으나, 자기도 못 믿겠는 말까지 포함된다. 그렇기 때문에 고양이가 좋다는 건 믿을 수 없다. 체온을 나누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똑같이 대해서 좋다니 가당치도 않다. 그녀는 고등학생으로 혼동될 수 있을 정도로 어렸다. 정정해주고 싶었다. 넌 평등하다는 이유로 고양이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자존심 강하고 독립적인 고양이의 캐릭터가 좋은 것이고, 독립적인 사람이 상대적으로 더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거라고. 그녀는 한 사람만을 절박하게 여겨본 적도,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중요했던 적도 없는 것 같았다. 그녀의 답은 그랬다.
“길게 사겨본 적은 없지만, 많이 만나봤어. 알 만큼 알아.”
남자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알지 모르나 그녀 자신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질그릇 같았다. 비극은 자신이 흡수력이 무척 좋다는 것도, 쉽게 깨질 수 있다는 것도 모른다는 데 있었다. 처음 만나서 그녀의 집에 간 날, 침대 위에서 이불과 베개 말고 또 한 개의 필요한 물건을 집으려 할 때, 그녀는 말했다.
“콘돔 안 끼면 안 돼?” 그렇게나 고주망태가 되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이왕 즐기는 건데, 편하게 즐겁게 하고 싶다고 했다. 잠깐, 콘돔 외판원이 되어야 했다. 이 콘돔은 라텍스가 아니라 폴리우레탄이며, 유색도 아니라고, 네 가정 불편하다면 다음에는 수용성 윤활유를 사올 준비도 되어 있다고. 들으려 하지 않았다.
“너 이러다 큰일 난다.”
“웃긴다. 웬 큰일. 너도 안 끼고 하고 싶지 않아?”
충격적인 이야기는 그 다음에 나왔다.
“콘돔 끼고는 딱 한 번 해봤어. 다들 좋다던데, 왜 그래?”
그녀가 ‘리얼리티’ 를 끼거나(콘돔 중에는 ‘판타지’가 있다) ‘놀플랜트’를 이식했거나 평소에 피임약을 복용할 만큼 어른스럽게 관계에 임할 리 없었다. 결국 콘돔을 끼지 않은 남자와 아무런 피임 방법 없이 지속적으로 관계를 가져왔던 것이다. 물론, 남자는 콘돔 안 끼는 걸 선호한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아주 이기적인 계기로, 그러니까 더 많은 여자를 만나면서부터 생겼다. 책임질 일에 마주하느니 뒷걸음질 치거나 숨을 수 있는, 여유로운 비겁함이 생긴 거다. 콘돔은 집 열쇠를 챙기고 그 다음에 반드시 챙기는 물건은 아니었으나, 어떤 예감이 들 때는 지참하는 물건이 되었다. 예사롭지 않게 추운 겨울날 들고 나가는 장갑과 비슷했다.그날도 ‘모진’ 예감이 든 날이었다. 얼마 전 사람이 많은 술자리에서 그녀는 쓸데없이 내 발을 찼고, 우연히 키스를 했다. 그리고 단둘이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그렇게 만난 날, 그녀는 단 둘밖에 없는 자리에서 귓속말로 한 음절을 말했다.
“쉿.” 한잔 더 하겠냐며 물었을 뿐인데.
나이가 많다는 건 설득할 때 편리했다. 어린 친구가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점프’ 수준의 이야기를 하면, 그저 입을 다물었다. 나이가 많다는 건 나보다 어린 사람을 설득하지 못한다 해서 억울할 게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경우, 다소 폭력적인 말을하면, 그게 통했다.
“됐어. 내가 맞아, 내 말 들어.”
악기로 설득할 능력 없는 평범한 남자가 꺼내는 무기다. 그날, 콘돔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콘돔 박스는 이후에 두 통을 더 샀다. 그녀도 괜찮다고 했다. 원래 여자는 분란을 막는 현명한 거짓말을 잘하지만, 거짓말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바라는 일은 두번째에도, 세 번째 만난 이번에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에는 꽤 큰 간극이 놓여 있었다.
내가 벗어놓은 옷에 고양이가 두 번째 방문한 날, 콘돔이 찢어졌다. 벌써 사정하고 난 뒤였다. 하필이면 콘돔의 머리 부분으로, 완전히 터져 있었다. 통념과 달리, 큰 물건을 가졌다 해서 콘돔이 찢어지지는 않는다. 콘돔이 찢어지는 건 로션 같은 걸 함부로 라텍스 콘돔에 발라서 라텍스와 화학 작용을 일으키는 경우라고 어디서 읽은 적 있다. 그러나, 라텍스 콘돔을 안 쓴 지는 꽤 오래되었다. 로션을 발라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좀 더 편하게 느끼지 않을까 싶어 젤리를 사왔으나 약국에서 산 것이었고, 믿을 만한 J사의 제품이었다. 그날 특별히 오래 하지도 무리를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찢어져 있었다. 처음있는 일이었다. 연장자의 권위는 콘돔보다 얇아져 있었다. 콘돔과 관련한 어떠한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그녀는 이 이야기를 잊지 않겠지,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게 되겠지.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이야기거리를 얻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녀가 근심하고 당황하는 얼굴을 처음으로 봤다. 그녀는 달려가서 수첩을 가져왔다. 우리가 처음 만나서섹스한 날을 물었고, 생리 주기를 체크했다. 그녀의 계산에 따르면 오늘은 배란일의 한가운데 있었다.
“안에다 사정한 건 처음이야.”
당연히 그랬겠지만, 그녀를 초인쯤으로 여겼던 것 같다. 잠깐 동안, 그녀가 놀라는 당연한 모습이 의아했다. 다음 날 그녀는 병원에 갔다. 사후 피임약을 처방 받아 그 자리에서 한 알을 먹었다. 담배도 술도 마시지 말라는 얘길 들었다고 했다. 무정한 남자는 회사에 가느라 함께 가주지 못하고 그녀에게 전해 들었다. 해줄 말도 없어서 아프냐고 물은 게 다였다. 그녀는 배 쪽에 느낌이 온다고, 아프다고 했다.다음에 통화했을 때는 토했다고 했으며, 너무 아파서 담배를 피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약을 복용한 뒤 토했으므로 다른 사후 피임제를 처방 받아서 복용해야 한다고 했다.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으므로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는 저항감이 있었지만, 일이 그 지경이 되니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콘돔 정도로 안심했던 게 소극적인 대처였다고 여겨질 만큼. 그러나, 인간의 욕망에 주어지는 지독한 형벌은 그 다음이었다. 미안한 사람에게서는 갑자기 아무런 매력도 보이지 않았다. 그 후에 더 찾아보고 배워서, 이제는 콘돔도 더 잘 끼울 수 있었다. 콘돔은 꽉끼우는 것보다 저장용 팁 부분의 1센티미터 정도 여유를 남겨두면 저장용 팁에 담길 수 있는 최대치인 2.9밀리 이상을 사정해도 안전하다. 마찰로 인한 콘돔의 파괴에도 대응할 수 있다. 그러나, 끝이었다. 극복할 수 없는 건 그런 채로 남아 있었다. 숨어버리고 싶었다.
시험해보듯이 세 번째로 그녀를 만났다. 그리고 잤다. 괜히 그랬다는 생각만 들었다. 고양이는 여전히 벗어놓은 옷 위에 앉아 있었다.고양이는 이번에도 기어이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이제 우리 이런 식으로 만나서 자는 거 그만하자.”
“왜.”
“너랑 그러고 싶지 않아. 이제 아닌 거 같아.”
“그것뿐이야?”
“응. 미안해.”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고는 일어나더니 무얼 들고 왔다. 끈끈이였다. 다 벗은 채로 한 손에는 용감하게 끈끈이를 들고 있었다. 고양이가 깔고 앉아 있던 셔츠를 붙잡고 끈끈이로 고양이털을 밀어냈다. 드르륵 드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그 동작이 마치 자갈밭을 일구는 것처럼 억척스럽고 대담했다. 그래서, 처연했다.
“이제 출근해야지.”
그녀가 끝내주었다. 출근을 하려고 그녀의 집을 나섰다. 얼굴이더 차가웠던 건 바람이 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차가운 얼굴을 푹 숙이고 지나가는 남자를 사람들이 따갑게 쏘아보았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늦어버린 것이 아닐까. 흘려버린 세월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에디터
- 정우영
- 아트 디자이너
- Illustration / Kim Eun J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