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기엔 원치 않는 소리도 담겨 있었다. 오늘만은 기록하고 싶지 않았지만, 의지엔 의미가 없다. 격의없이 취한 김창완과의 밤, 목적 없는 파안대소. 방배동 부조리극의 막이 올랐다.
2011년 2월 8일 밤 9시. 설 연휴 내내 냉장고 안에서 숙성된 막걸리를 마시러 온 사람들이 테이블을 채우고 있었다. 김창완과 앉은 테이블은 막걸리 주전자와 안주, 녹음기가 메우고 있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람 목소리가 기계 안에 기록되었다. 김창완은 녹음기를 의식하지 않다가, 허허허 웃다가, ‘이제 그거 좀 꺼…’ 하고 숨 쉬듯 말했다. 그 자리를 찾은 김창완의 오랜 친구들, “선생님 너무 좋아요!” 하고 악수를 청하던 팬들의 목소리가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모든 목소리는 귓속말처럼 선명해서 비현실적이었다. 밤 9시부터 새벽 1시 반까지, 이런 식으로 깔끔하게 박제되었다. ‘인터뷰’라는 형식이 없는 채 무방비 상태의 인터뷰였고, 그래서 정 ‘인터뷰’라고 하려면 말줄임표로밖에 표기할 수 없는 어떤 순간으로. 시작은 이랬다. 김창완이 말했다. “이건 만약이지만, 나 미국 가면 12현 일렉트릭 기타 사온다. 내가 원래 12현 기타 좋아하는데, 그게 어쿠스틱만 있는 줄 알았어요. 근데 일렉도 12현이 안 될 이유가 없는 거잖아요. 그게 여섯 줄 기타랑 똑같은데, 옥타브 튜닝이 돼 있어요. 그래서 서로 어울림이 너무 좋은 거지. 너무 화려하지. 근데 자네 이거 다 마신 건가?” 이런 식으로 둘이서 막걸리 한 주전자를 다 비웠다. 김창완은 <역전의 여왕>에서 죽었다. “목 부장, 너무 불쌍하게 죽지 않았어요? 납골당 갔다 온 적 있어요? 기분 썰렁해요. 거기 갔는데, 항아리에 ‘목영철’ 딱 있는데…. 난 거기 귀신으로 나오기로 해서 제일 아끼는 양복을 딱 입고 나갔어요. 1년에 딱 두 번만 아껴서 입는 걸.” 하지만 우리는, 목 부장이 죽었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다. 이 날로 세 번째였다.
우리, 처음 인터뷰는 <HAPPIEST> EP가 나왔을 때였어요. 두 번째는 허진호 감독이랑 연극 했을 때. 오늘은 이유가 없어요.
난 말야, 그게 너무 좋다.
그때 녹음기 때문에 조바심이 난다 하셨어요. 말을 안 하면 페이지가 안 넘어갈 테니 마음이 급하다고. 오늘은 그러실 필요 없어요.
너무 중요한 거고. 나 며칠 있으면 소설가 김탁환이랑 인터뷰를 할 거거든요? 그런데 조선시대에 80원짜리 소설이 있었다대? 조선시대 맞나? 우리가 보통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읽으면 나는 이이화나 김용 정도 쳐주지 않아? 그 권수가 좀 나가거든. 반년이 걸린대요, 그걸 다 읽는데. 그게 너무 멋있는 거 아냐? 나는 꼴랑 그 책 같지도 않은 책들을 내면서, 참 끝없는 이야기를 항상 써보고 싶었어요.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이미 그 옛날에 끝없는 이야기를 쓴 사람이 있다니까? 너무 놀랐어요.
이때, 김창완을 알아본 젊은 여자가 “아저씨 너무 좋아요!” 소리를 질렀다. 호감만 있는 불가해한 목소리. 그 둘은 서로 술을 따르고 마셨다. 여자의 볼이 불콰해졌다. 한 남자는 20년 전, 초등학교 때 ‘개구쟁이’를 불러서 동요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선생님 덕에 좋은 추억이 생겨 감사하다, 누나는 산울림의 모든 LP를 갖고 있었다”며. 김창완은 “그 누님이 인격이 되셨네요” 눙치면서 모든 얼굴 근육으로 웃었다. 방배동 골목에서 그를 촬영할 땐, 두 명의 청년이 건너편에서 뛰어나왔다. 그리고 물었다. “김창완 아저씨 어디 가셨어요?” 이미 들어간 후였다. “아, 아쉽다. 전에 한번 같이 사진 찍어주신 적이 있는데, 또 한 번 찍고 싶어서 맥주 마시다 뛰어나왔어요.” 청년들은 “감사합니다” 말하고 다시 건너편으로 뛰어 들어갔다.
2009년 1월엔 90분짜리 녹취 파일의 반 이상이 날아가 있었다. 45분 정도 됐을 때 베터리가 다 닳았다. 우리는 감나무의 아름다움, 자전거를 타다 넘어졌을 때의 아픔과 쾌락에 대해서 말했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전혀 엉뚱한 말을 써도 괜찮아. 지어낸 말도 상관없어요. 전혀 개의치 말고 마음대로 써요.” 그때도, 우리는 새벽에 헤어졌다. 인터뷰의 마지막 말은 “우리 있잖아, 정 기자 너만 괜찮다면 막걸리 한 주전자 더 먹자”였다. 그 이상은 없었다. 기사는 억지로 마무리되었다. 막걸리는 세 주전자를 더 마셨다. 기사는 끝났지만 인터뷰는 끝난 적이 없었다. 다시 앉은 테이블에서 내가 물었고, 김창완은 대답했다.
기억하세요? 끝나는 이야기가 어딨어요? 근데 우린 헤어질 때마다 어색했어요. 완결된 이야기를 위한 만남 같아서. 안 그러셨어요?
그랬지. 이야기는 끝이 있으면 안 돼요. 내 감히 얘길 하는데, 주제가 있는 이야기는 아무 소용이 없어. 나는 너무나 좌절했어요. 지금 너무 힘든 시기야, 내가. 그런 시기를 가고 있는데, 요즘 내가 세상을 보는 거나 그런 것은…. 원래 그런 게 내 밑바닥에 있는 어떤 것들을 증거하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우리 삶은 답을 얻는 게 아니라 질문할 수 있는 기회’라고 그랬어요. 내가 지어낸 말이야. 그런데 내가 내 운명에 걸린 건지. 그게 맞는 것 같애, 자꾸. 자가당착인 줄도 모르지. 어쨌든, 난 정답이 싫어.
‘열두 살은 열두 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살지’도 끝날 때마다 어색해요.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곡이고.
아, ‘열두 살’ 그게 노래가 되려면 한참 걸리지. 내가 좋아하는 노래지만, 그건 노래지. 그런 정도로 사람이 움직이고 감동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그렇지? 그건 히트곡 되면 안 될 것 같아. 그러면 사람 마음이 너무 빈대떡 같은 거지.
히트하면 좋죠, 뭘?
아냐. 난 죄의식을 느낄 거고, 결코 행복하지 않을 거야. 내 그 노래로 돈 한 푼 못 벌었다는 게 너무 위안이야. 그리고 나 최근에, 많은 가난한 동생들을 만나고, 또 나도 점차 가난해지고 있다는 걸 느껴. 그래서 ‘이야, 세상일이라는 게 참 정확하다. 멋지다’ 생각했어요. 진짜 나 옛날에는 이런 걸 못 느꼈던 시기도 있었어. 내가 광고계 ‘남자 이영애’일 때는 이런 생각 안 들었어.
그런 적이 다 있었어요? 술 주세요, 마실래요.
근데 당신은 시계가 왜 그렇게 맞춰져 있어? (열한 시가 넘었다. 손목시계는 아홉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계가 시계 노릇을 그만둔 지는 한참 되었다.)
흔들어야 가는 시계인데, 한 이틀 안 차면 멈춰 있어요. 그러곤 안 맞추니까. 시간이 맞는 적이 별로 없어요.
그거는 그러니까 바늘 달린 팔찌지, 시계가 아니지. 맞어. 시계를 꼭 시계로 쓸 필요도 없어. 하물며 사람을 사람으로 써야할 필요가 있나? 우리 처음 만난 게 2009년 1월이었다고요?
글, 읽어보셨어요?
나는 거의 안 읽고 안 보고. 이번에 <역전의 여왕>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삶은 적분이 아니다” 그때 그렇게 말했어요.
참 좋은 얘길 했네? 내가 원래 그렇게 좋은 얘기를 해?
삶은 과거의 총합이 아니다, 삶은 ‘델타T’, 시간의 변화 안에 있다.
좀 전에 내가 이야기에 주제가 있으면 안 된다는 얘기를 했지요. 그건 후지다고 그랬잖아. 그게 굉장히 중요하지만, 사람들은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어요. 자기가 흐르는 강물이라는 걸 몰라. 자, 천처언히 흘러가지고, 이제 흘러서 갔어. 저기 동작대교부터 흘러서 노량진, 성산대교 거쳐 인천 앞바다까지 갔어. 간 다음에 기껏 배운다는 게 뭐냐 하면 어…, 수증기가 있어. 하늘로 올라가갖고 이제 비가 돼서 다시 청계산 꼭대기에 비로 내려. 그런 수겁 년의 이야기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자기가 흘러가는 물이라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예요. 삶은 그거야. 수겁이 윤회하는 거랑은 상관이 없어요. 델타 T 말고 좋은 말이 있을 거야. 내가 배운 게 고등학교 졸업한 게 다니까 그것밖에 모르는 거지. 굉장히 정확하게 할 수 있는 얘기가 있을 거야. 하여간, 우린 별같이 살아야 돼. 그 별은, 당신이 붙여야 돼.
강에 있으면 강물, 바다에 있으면 바닷물, 술잔에 있으면 술이죠 뭘, 거창하게?
지금, 당신이 물을 묘사하면서 물이 담긴 그릇만 얘기하고 있는 거 알아? 물은 물이야. 흐르는 물도 되고, 이렇게 때리는 물도 되고, 먹기도 하고. 우리는 있잖아, 물조차도 몰라. 내가 ‘ㅁ’하고 ‘ㅗ’하고 ‘ㄹ’을 안다고 물을 알아? 모르지. 그걸 모르면 다른 걸로 알 방법이 있을 것 같지만 결국 모른다니까? 내가 그렇게 불가지론에 빠지고 싶지 않은 것도 욕심일 수 있어요. 그런데 물이 물이 아닌 건 사실이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물이, 우리가 그것으로 만들어진 경험으로서의 물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있는지도 몰라. 근데 ‘물은 물이야’ 그러는 사람들이 있고, ‘아닌지도 몰라’ 이런 부류도 있고. 난 중간 어디쯤이겠지 뭐. 내가 기치를 높이 들어서 ‘물 찾았다!’ 그럴 땐 내 뒤에 서. 아니면 높이 들면 내가 그 뒤에 설게.
좋아요.
당신이 나를 데려갈래? 그럴 것 같기도 해.
김창완은 돌판에 얹힌 달걀노른자를 숟가락으로 떴다. “나 이거 진짜 좋아하는데, 너무 맛있어.” 달궈진 돌판 온도 그대로 노른자가 입 속으로 들어갈 때, 그의 친구들이 이 술집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전화가 왔다. 그가 말했다. “정 기자, 지금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데? 자리를 옮겨야 하나?” 괜찮다고 했다. 화장실에 가려고 자리를 비웠을 때, 녹음기가 채집한 소리를 며칠 뒤에 들었다. 내가 없을 때, 그가 말했다. “어휴, 나는 어떻게 살면 좋지?” “그냥 지금처럼 살면 돼요.” 십수 년 동안 그를 돌봐온 매니저가 말했다. 누군가에게 기댄 것 같은, 김창완의 한숨 소리도 녹음되었다.
돌아왔을 때, 그는 다른 테이블에서 웃고 있었다. 술 한잔 같이 하고 싶다는 언제 적 팬들의 초대였다. 그 테이블에서, 김창완은 말했다. “세상에 없었던 것을 창조하는 것은, 자기 혼자 먹고 사는 것은 상관없는 거고 여러 사람…. 나는 그게 창작이라고 생각해. 그것이 정말.” 말끝이 흐리고 발음이 뭉개져서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데, 그를 둘러싼 낯선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말은 온전한 문장이 아닌 채 그들 사이에서 온전히 전달되었다. 웃음소리는 모든 흐름을 역전시켰다. 어려운 얘기는 웃긴 얘기가 되었다. 괴로운 얘기도 웃긴 얘기가 되었다. 푸념도 웃음이 되었다. 술과 말, 사람와 웃음이 섞인 방배동, 밤 11시 반쯤이었다. 김창완의 친구들은 검은색 양복을 입고, 검은색 차를 타고 왔다. 아홉 명의 어른이 관직과는 관계없이, 허허실실 막걸리 앞에서 웃고 있었다. 오랜만에, 누군가를 축하하는 자리였다. “우린 엑스트라요! 신경 쓰지 말고 하세요.” 그들이 천진하게 말했다. 그중 한 명이 우리 테이블에 와서 ‘아직도 가장 치명적인 유혹은 사랑’ ‘한반도의 구석기 역사를 기록한 박물관에서 났던 김창완의 기타 냄새’ ‘이 나이엔, 혼자 방에서 음악 틀어놓고 코 후빌 때가 최고’라는 말을 했다. 하나같이 틀린 얘기가 없어서, 우리는 ‘손톱에 낀 떼를 벗겨낼 때도!’ ‘발톱도!’ 하면서 다시 한 번 웃어 젖혔다. 그동안 날이 바뀌었다. 나는 다시 질문했고, 김창완은 어딘가에 흠뻑 겨운 얼굴로 대답했다.
하하, 그런데 내일 아침에 자전거 타고 방송 하러 가셔야죠?
그렇게 힘들게 아침에 일어나서 방송하러 갈 때, ‘아, 이게 참 행복이다’ 생각해요. 많은 분이 그걸 함께 느껴줬으면 해요. 왜냐하면, 그냥 다하나하나. 그 사람이 거기에 있다는 것, 그거 하나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뭐 거기선 훌륭한 이야기들밖에 할 수가 없잖아요. 매일 훌륭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지만. 또 우리가 태양보다 훌륭한 이야기는 아무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내일 아침에 가서 여러분들을 만날 수만 있다면 그게 가장 큰 바람이고, 만나면 또 행복이고. 그래서 너무, 너무나 좋아요.
강변북로에서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를 들으면 아, 어제 술을 좀 드셨구나, 감기에 걸렸구나를 알 수 있어요. 10년이 넘었으니까, 벌써.
내가 도시 교통정보 전화번호 알려줄까? 3분 전까지 업데이트되는 도시 고속도로 정보.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일기를 꼭 먼저 듣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나 없나. 그리고 6번을 누르면 일기예보가 나와요. 5번을 누르면 도시 고속도로 정보가 나옵니다. 방송이 끝나고 눌러보면 강북강변과 노들길의 교통상황이 나와요. 여기저기 다 막히면 보통 올림픽대로를 타지만, 올림픽대로가 막힐 땐 노들길을 탑니다. 아주 양쪽이 다 막히고 의외로 강북강변이 뚫렸을 때는 거길 타지만, 여튼 사방이 다 막혔다 그럴 땐 녹사평으로 해서 삼각지로 갑니다. 그것뿐이에요. 저의 지혜는 거기까지예요. 오늘, 여기 막걸리는 최고다! 양심적으로 얘기하자면 이게 지금 막걸리의 표준인데?
웃음이 터지는 데는 이유가 없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친구들은 다 돌아갔다. 건축가 한만원 씨는 그들의 연락을 받고, 그들이 떠난 뒤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상관없고, 친구니까 익숙하다는 듯이. 우리는 또 스러져 간 천재에 대해 말했다. 한만원 씨는 16세기 이탈리아 건축가 팔레디오를 봤을 때의 분노를 말했다.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이 저렇게 뛰어난 건축을 할 수 있는 거죠? 그런 생각했어요. 르 코르 뷔지에 그 사람도 경악스러워. 그 정도의 건축을, 보통 건축가도 평생 두세 개는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들은 말하자면 1백 개 정도. 화가 나요.” “실크로드가 어디서부터 시작됐어? 이쪽 끝은 북경이라 치고, 저쪽은 그리스 어디나 뭐 그렇게 가 있겠지. 어딘가. 그 어딘가를 찾으면 많은 부작용이 무위가 될 텐데. 응? 우리가,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너무 매달려서 정작 중요한 일에 소홀한 것 아닌가? 한 사장, 몇 살까지 살 거야?” (김창완) “개인적으로는 70세까지가 정말 중요한 시기가 아닌가. 80세 이후에는 덤으로 사는 거라고 생각해요.” (한만원) “나는, 노래를 만들어보니까, 하…. 옛날에 만든 노래는 다 장난이야. 지금부터 슬슬 쓰는 게, 그게 나인 것 같아. 사람들이 너무너무 세상을 쉽게 보는 것 같아.” (김창완)
테이블 위에는 얼굴이 채 기억나지 않는 일곱 장의 명함이 있었다. 지난 2009년의 인터뷰에서, 김창완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전설은 지금 이 순간일지 몰라요. 전설이 과거라면 산울림의 역사는 너무 짧았고, 지금 내 얘기대로라면, 산울림은 지금부터 시작일 수 있어요. 전설이 미래를 내포하거나, 현재가 모든 전설의 끝이라면, 지금이야말로 산울림이 전설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에요.” 경기도 언저리에 있는 식물원에서 바오밥 나무를 봤을 때도 꼭 이런 기분이었다. 한국과 호주가, 겨울과 여름이 마음처럼 흔들렸다.
경기도에 한택식물원이라는 데가 있어요. 호주관에 가면 바오밥 나무가 있고, 남아프리카관에 가면 알로에도 있고, 선인장도 있고, 기린이 먹는 그 거대한 나무도 있어요. 계절도 없어요, 거긴.
기린도 있고?
기린은 동물원에 있죠.
그럼, 둘은 언제 만나나?
못 만나겠죠, 한국에선.
뭐, 다 슬픈 얘기예요. 김창완 밴드는 돈 한 푼도 안 줘요. 전 세계적으로 한 푼도 안 주는 밴드 중 하난데, 있어. 있다고 우기는 거지, 내가. 나 ‘토킹 탐’ 좀 줘봐.
그는 아이폰 어플리케이션을 켰다. ‘토킹 탐’은 들리는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고양이 캐릭터의 이름이다. 김창완이 말했다. (고양이가 따라했다.) “얘, 내 말 다 따라해. (얘, 내 말 다 따라해.)”
그걸 좋아하세요?
난 얘가 제일 좋고, 난 얘한테 인사해. 그런데 그게 허무해지는 게 얼마 걸리느냐면, 한 달? 한 달도 아니야. 이틀이면 허무해지지. 그런데 얘는 반년 가도 안 허무해져. 그게 무섭지 않아? 난 지금도 얘를 사랑해. 도대체 누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캐릭터를…. (도대체 누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캐릭터를….) 누가 죽으면 얘기 상대를 해줄 수가 없잖아. 그런데 얘는 영원히 안 죽고요. (그런데 얘는 영원히 안 죽고요.) 누구한테나 이렇게 즐겁게 얘기해줬으면 좋겠어. 나는 그래서 톰캣이 안 죽었으면 좋겠어. 술 좀 따라봐요.
….(술 따르는 소리)
나는 마이클 센델이 쓴 <JUSTICE- 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맙게 생각해. 그건 철학적으로 공명하고 양심을 때리게 만드는 거였어. 그전에 제프리 구루물Geoffrey Gurrumul Yunupingu이라는 아티스트에게 감동을 받았고. 아주 굉장해요. 얼마나 자극을 받았나 모르겠으나…. 나 진짜 내가 요즘 만나고 노래하는 그런 것들이 나로부터 벗어나는 것들이 있어요. ‘내 입에서 나오는 게 다 노래는 아니다’ 그런 생각이 있거든. 참 어렵지. 다들 가수라는데. 우리, 너만 괜찮다면 딱 한 주전자만 더 마실까? 이제 녹음기는 끄고. 내가 이게 아니라면, 인터뷰가 아니라면 완전히 다른 얘길 했을걸? 다른 행동을 했을 걸? 다라라, 다라라라란, 띠라라라란….
우린 왜 그렇게 많이 웃었을까? 누가 하는 한마디 사이사이마다 얼마나 많은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는지, 며칠이 지나 들어보고 알았다. 섞이지 않고 사라질 것들, 기억보다 많은 말이 A4용지 스물두 장을 가득 채웠다. ‘그런’ 인터뷰는 아니랬으면서 녹음은 했고, 세상에서 제일 자연스러웠던 김창완은 녹음기를 끄기 직전, 네 시간 반 만에 ‘난 인터뷰가 아니라면 완전히 다른 얘길 했을걸?’ 말하곤 알 수 없는 노래를 불렀다. 이것은 2월 8일 오후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스물두 장짜리 녹취록의 충실한 요약이다.
- 에디터
- 정우성
- 포토그래퍼
- Son Jong Hy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