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레오의 내일 2

2011.11.04GQ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선택할 수 있는 배우다. 그러나 그를 흥분시키는 역할은 많지 않다. 그런 그가 FBI의 전설, 존 에드가 후버를 선택한 이유는 뭘까? 이 영화를 감독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기보다 마흔 살 어린 배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늑대와 같은 자신을 위로해줄 영혼의 동반자를 만났다고.

의상 협찬/ 수트는 엠포리오 아르마니, 셔츠는 래그앤본, 신발은 알렌 에드몬즈, 양말은 폴케.

의상 협찬/ 수트는 엠포리오 아르마니, 셔츠는 래그앤본, 신발은 알렌 에드몬즈, 양말은 폴케.

(디카프리오에게) 당신은 많은 젊은 배우들이 겪는 힘든 시기를 겪지 않았습니다.
제 영화 인생은 <이 소년의 삶>에서 로버트 드 니로와 함께 시작됐어요. 그 역을 맡았을 때 전 열다섯이었는데 누군가 제게 그랬어요. “같이 영화 찍을 사람이 누군지 아니? 그분 영화를 다 보거라.” 강박적으로 비디오테이프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어요. 압도되는 기분을 느꼈던 기억이 나요. 젊은 브란도나 제임스 딘, 몽고메리 클리프트를 보면서도 ‘세상에, 다시 또 누가 저런 위대한 일을 해내고 싶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겠어?’ 싶었어요.

(디카프리오에게) 다른 시대의 배우였다면 어떤 연기를 해보고 싶어 했을까요?
우리 세대에겐 언제나 70년대죠. 그 시기엔 아직 감독에게 권한이 배분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제작사들은 관객들도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게 놔두기를 바란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리고 물론 다들 실패했고요. <택시 드라이버>는 내게 최후의 독립영화예요.

(이스트우드에게) 제작사의 통제가 심하던 스튜디오 시스템의 말미에 주연배우가 되셨습니다. 되돌아보면 좋은 일이었나요?
제작사에서 우리를 소유했지요. 하지만 아주 안전했어요. 일도 있고 돈도 많이 벌었고. 유니버설에서 일할 때는 록 허드슨과 토니 커티스가 있었는데 둘 다 거물이었어요. 우린 그저 놀기 좋아하는 고용인들이었죠. 조금만 더 줘요, 뭘 좀 가르쳐줘요, 하면서. 가능한 많이 배우려고 했어요. 세트란 세트는 다 가서 봤어요. 뭐가 되고 뭐가 안 되는지 알 수 있었죠. 그리고 50년대 후반이나 60년대 초반에 텔레비전 시리즈를 하면서 여러 감독과 작업을 할 수 있었어요. 훌륭한 영화를 만든 분들도 계셨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알게 되고, 머릿속에 이런 건 해야지, 이런 건 하지 말아야지 하는 목록이 생기게 되었던 것 같네요.
디카프리오 캐그니를 봐요. 그는 뮤지컬을 했고, 갱스터를 했고, 비밀수사관을 했어요. 터프했죠.

하지만 제임스 캐그니조차도 때로는 워너브라더스에 “이 갱스터 영화를 하면 내가 다음에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주겠어요?”라고 말했겠죠?
디카프리오 그렇죠. 아마 많은 젊은 배우들이 그럴 겁니다. 좋아하는 것만 계속할 수도 있지만, 생명을 지속시키려면, 조금 상업적인 것도 해야 하니까요. 모든 시나리오가 다 훌륭한 건 아니잖아요. <인셉션> 끝나고 전 일 년 반을 기다린 후에야 이 영화를 만났습니다. 즉각 달려들었지요. 투자를 받는 영화들은 같은 드라마가 아니거든요.

가장 영향력 있는 두 명의 스타가 할리우드 규칙에 위배되는 영화를 만드는 데 뛰어들었습니다. 대다수의 제작사가 하는 일에는 두 분 다 큰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요.
이스트우드 맞아요. 디카프리오 지난 8년간 6천만 달러에서 1억 달러 규모의 R 등급 드라마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봤어요. 저예산 예술 영화와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붓는 스튜디오 영화 사이에 중간 단계가 없어요.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에요. 하지만 다시 바뀔 겁니다. 60년대 이후처럼 말이지요. 그때는 휘황찬란한 뮤지컬들도 있었고 온갖 종류의 급진적이고 독립적인 영화감독들도 쏟아져 나왔어요. 전 예술이 가는 곳을 보고 싶어요.
이스트우드 예술은 이전에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지. 할리우드엔 언제나 표절이 있었어요. <무법자 조시 웰즈>나 <용서받지 못한 자>를 리메이크해도 되겠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늘 있어요. 그러면 나는 말하죠. “그게 나온 게 엊그제인데 왜 그걸 리메이크하려는 거지? 할 수야 있겠지. 하지 말라고 막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자기 작품을 만드는 게 낫지 않아?” 3D 영화 같은 겁니다. 첫 번째 나왔을 때가 기억나는데, 그걸 만들고 또 만들고 하잖아요. 다들 뒤만 보는 거지요.
디카프리오 <다이얼 M을 돌려라>가 첫 번째 3D 영화였나요?
이스트우드 아니, <브와나 데블>이나 <하우스 오브 왁스>였을 거야. 찰스 브론슨이 나왔었지.
디카프리오 아, 저도 본 적 있어요.

(이스트우드에게) 60년대와 70년대에 스타가 됐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신문이 있었고 사진가들이 있었지만 지금과는 달랐죠. 오라는 데만 갔으니까요. 30년대나 40년대는 더욱 재미있었을 거고.
디카프리오 적어도 그때는 다음 컷을 찍으려면 전구를 갈아 끼워야 했겠죠. “제기랄, 뭐야, 잠깐! 저놈이 여자와 도망쳐버리잖아!”
이스트우드 하하. 이젠 싸구려 수영복처럼 착 달라붙어서는 떼어지질 않으니 숨을 쉴 수가 없는 지경이지요. 하지만 그래 봐야 결국엔 벌을 받게 되어 있어요. <뉴스 오브 더 월드>를 봐요. 그 신문은 지겹게도 사람들을 밟아 죽이더니 결국 도를 넘게 된 거지. 정보에 대한 갈망이 너무 커지다 보니, 그런 속도가 나오는 거지요.

    에디터
    글/ 마크 해리스(Mark Harris)
    포토그래퍼
    크래그 맥딘(Craig McDe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