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의 연기. 박정자의 무대. 박정자의 목소리. 박정자라는 이름. 71년 동안의 박정자. 그리고 오늘 지금 여기의 박정자.
지금 이 목소리를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요?
책에다가 목소리를 넣을 수 없잖아요?
박정자의 연극을 한 편도 안 본 사람이라도, 박정자의 목소리를 안다 말할 수 있지요.
알아, 알아요. 많은 사람이 내 성대모사를 하는데, 어느 핸가 한번은 광주의 아주 유명한 한정식집에 갔는데, 여럿이 모인 자리에 내가 들어가니까, “어머, 헤레나 루빈스타인 왔다?” 이러는 거예요. 나는 너무 놀란 거야. 그게 내가 처음 한 광고였는데 뭐, “여성의 아름다움을 과학으로 만든다” 카피가 이렇게 딱딱했어요. 그러니까 날더러 하라고 했겠지. 그냥 뭐 했어요. 그게 방송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나가자마자 전화가 오기 시작했어요. 대체 이 목소리가 누구냐.
요즘 같았으면 ‘박정자 CF 제의 쇄도’ 이런 기사가 떴겠어요.
참 기뻤던 게 뭐냐면 나한테는 그게 수입이었기 때문에. 연극은 항상 내가 어떤 수입도 가질 수 없으니까, 연극을 통해서는 그런 걸 기대하기가 너무나 어렵고 이미 포기를 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러고 내가 연극 한 작품을 위해서 한 달 두 달 연습하고 공연하고 그러는데, 이거는 그냥 한 시간 미만이면 끝나는 거야. 이런 세상도 있구나. 이렇게 쉽게 돈을 벌 수도 있구나. 그게 너무 이상한 거예요. 신기한 거야. 나한테 이런 기회가 좀 더 많았으면. 근데 뭐 많지는 않았어요. 많았으면 내가 쉽게 타락했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내 목소리를 대중들에게 알리게 되었죠.
사실 그 목소리를 오늘 듣고 왔어요. 영화 속에서요. 김기영 감독의 영화 <충녀>를 잠시 보고 왔어요.
하하. 그걸?
1995년 유현목 감독의 <말미잘>이후로는 영화를 안 하셨죠. 박정자는 연극만 하고 영화는 안 한다, 라는 인식도 있어요.
아니에요. 안 그래요. 이번에 영화 하나 해요. 특별히 시나리오가 맘에 든다거나 배역이 탐난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언제까지나 기다리다간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영화를 아예 못하겠다, 이건 정말 고도를 기다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하하하. 첫 촬영을 며칠 전에 했어요. 현장에 가니까 나는 또 신인이구나, 하하, 또 신인이구나 그랬죠. 나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늘 열려 있어요. 그러니깐 콘서트도 하고 전시도 하고 남들이 안 하는 거 다 하잖아요? 그니깐 나는 그렇게 답답하게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내 멋대로 살고 싶어. 저지르는 거야. 그래야지, 뭐 하는 거지 지금? 이 세상에 소풍 왔다 가는 건데, 뭘 그렇게 뱀처럼 도사리고 살아. 눈치 코치 다 보면서?
19세기에 소년이었던 마르셀 푸르스트가 눈치 코치 안 보고 만든 질문이 있어요. 친구들과 어울려서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놀았대요. 19세기 소년이 만든 질문을 20세기에 태어난 배우 박정자에게 물어서 21세기의 대답을 들어보려고요.
날 또 고문하려고 하는구나. 어디 해보세요
가장 완벽한 행복이란?
박수. 관객들의 박수.
가장 끔찍한 공포는?
MRI 기계 속에 들어가는 것.
어떤 역사적 인물에게 동질감을 느끼나?
음, 헬렌 켈러의 가정교수였던 앤 설리반 선생이 정말 끊임없이 내게 찾아와요. 내가 그 책을 보면서 그렇게 울었거든. 그 책을 아이들한테 읽어주면서, 내가 막 울었어. 포기하지 않는 거죠. 물론 나는 보잘것없는 의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포기해요. 하지만 끈을 놓지 않고 부단히 가고자 하는 길로 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요. 글쎄, 설리반 선생님을 나는 그렇게 떠올려요.
자신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바보라는 거. 나는 바보예요. 나는 모든 것에 미달이에요. 나는 지금 신인이에요. 이건 어떤 말의 수사가 아니에요.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나는 늘 신인이라는 거예요. 그거는 정말 숨기진 않는, 숨길 수 없는 나의 고백 같은 것이기도 해요. 할 줄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정말 나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알고 보니 농구 자유투 성공률이 70퍼센트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하하, 아니에요. 춤을 추고 싶어도 박자를 못 맞춘다든가 노래를 하고 싶어도 악보를 못 보거든요. 그리고 박자치예요. 그러면서도 뮤지컬도 하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박정자 노래 잘한다는 거예요. 반주하는 사람은 나 때문에 골 아파요. 그래도 난 해요. 바보는 바보대로의 그 뭐랄까, 어떤 뻔뻔함이 있는 거죠.
가장 큰 낭비는?
잠. 잠을 많이 자요. 잠을 좀 줄였으면 좋겠어요. 내가 별명이 착한 아이거든. 잠을 잘 자서요. 어디 여행을 가면 잠자리가 바뀌어서 잠이 안 온다는 이런 사람 너무 웃기게 보여. 무슨 건방진 소리야, 지들이 무슨 여왕이야 뭐야. 나는 그런 거 없어. 어디든 가면, 잘 자요.
외모 중 가장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안 드는 부분? 마음에 드는 부분을 물어봐야지.
언제 어디서 가장 행복했나?
얼마 전에 본 제주도 월정 바다. 아일랜드 조르바라는 곳에서 젊은 친구들이 나를 위해서 음식을 만들어줬어요. 여덟 명이 밥을 먹었거든? 잠깐 오다가다 들르는 사람도 있고, 내일 남편이 제주에 오는데 미리 도착한 사람도 있고, 우리 딸도 있고. 오늘 저녁은 내가 다 산다. 거기서 너무 행복했어요. 이건 너무 황홀하다. 행복이라는 건 어느 때나 있을 수 있어요. 내 마음만 준비가 되어 있으면 가질 수 있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못 느끼고 하찮게 대수롭지 않게 넘길 일이라도, 행복은 온전히 내 몫인 거예요. 어머 이건 행복해, 이건 황홀해,뭐 이런 거 있잖아요? 그게 행복이지.
가장 밑바닥의 고통은?
이걸 고통이라고 말하면 이상하지만, 역시 핏줄이겠죠. 고통까지는 아니지만 항상 이렇게 자유롭지 못한 거,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죠.
어떻게 죽고 싶은가?
너무나 허황된 욕심이지만 무대 위에서 죽었으면 좋겠어. 순간적으로 아프지 않게. 얼마나 욕심이야. 근데 무대에서 완전히 탈진할 때도 있거든요. 이러다 내가 쓰러지는 거 아니야? 그래도 안 쓰러지더라고요. 그래서 참 질기기도 하다, 생각하죠. 원컨대 무대 위에서 쓰러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냥 너무 욕심인가?
다른 것으로 태어난다면 무엇일까?
음, 새? 자기가 갈 수 있는 데는 다 갈 수 있잖아요. 여권도 필요 없고, 비자도 필요 없고, 돈도 필요 없고, 달러도 필요 없고.
프루스트의 질문은 여기까지입니다. 대답을 들으면서 더욱 사무쳤는데, 박정자라는 이름은 어떤 완결 같습니다. 조선의 백자처럼요. 심지어 ‘연극’이라는 말과 비슷하게도 들려요.
큰일났네. 내가 그런 기대를 감당 못할 텐데 어떡하나.
어떤 이름이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한결같을 수 있다는 건, 뭔가를 지켰다는 뜻일까요?
난 지킨 거 없어요. 내가 할 줄 아는 건 그것밖에 없고, 그것도 옳게는 못해요. 정말이에요. 다만 내가 뭘 지켰다면, 글쎄 나는 참을성이 있다는 거예요. 성격이 과격하지 않아요. 어떤 쪽으로는 특별히 과격하기도 하지만, 신경질적으로 발작한다거나 그러기보다는 오히려 차분한 성격이에요. 다만 누구나 나이를 먹잖아요? 시간은 흐르고, 나는 그 중 한 사람인 거예요. 근데 연극을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이렇게 인터뷰를 한다든가 사람들한테 주목을 받는다든가 이런 거죠. 그런 일상적인 삶의 한 꼭지라고 생각해요.
이번에 전시와 함께 마당에서 낭독 연극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극장이 아닌 곳에서 공기 중으로 퍼지는 박정자의 목소리가 어떤 것일지.
‘ㅁ’자 한옥 갤러리인데, 중앙에 마당이 있어요. 거길 딱 보는 순간, 여기선 뭔가 굿을 해야 해,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굿을 해야지. 그래서 매일, 딱 열흘 동안 해요. 사람들이 날더러 그래, 아주 훌륭한 기획자라구. 하하, 근데 나는, 나는 정말 바보거든요? 근데 또 어떤 때는, 이렇게 신들린 거 같애. 막 생각이 나.
기대가 더 커졌습니다.
어떤 이는, 그래 뭐 50 년 배우 했다더니, 이게 전시야? 그럴 수도 있지만, 이런 전시를 하는 거는 내가 잘났다, 이런 얘기가 아니라 이런 걸 보면서 연극 동료들 또는 뭐 후배들이 나중에 한번 기획해보고, 그런 포부도 가져보길 바라는 메시지라고 생각해요. 내가 지금까지 모아놓은 자료라는 게 정말 빈약하지만, 그중 99프로를 버리더라도 1프로 정도를 보여주는 거예요.
작품은 <맥베스>죠?
마녀로 나와요. 올 거죠?
- 에디터
- 장우철
- 포토그래퍼
- 장윤정
- 스탭
- 스타일리스트 / 박지석, 메이크업 / 이가빈, 어시스턴트/ 유미진, 어시스턴트/ 하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