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새 장편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을 마주한 독자에게 소설의 화자인 ‘나(김병수)’는 곤란한 존재다. 치매에 걸린 연쇄살인범 김병수는 서사이론에서 말하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다. 사실과 망상, 기억과 망각이 뒤섞여 있는 김병수의 진술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독자가 묻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때 독자는 소설에 마련된 함정에 의외로 손쉽게 빠진다. 소설의 서사 ‘안에서만’ 개별 서술의 신빙성을 따지는 경우가 그렇다. 예를 들어, 김병수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는 장면은 초반에 나온다. 그렇다면 그 장면 이전의 서술은 믿을 수 있고, 이후의 서술은 비교적 믿을 수 없는가. 초반 이후의 서술은 치매의 영향을 얼마나 어떻게 받았는지 구별할 수 있는가. 의심과 불신을 밀어붙이면, 소설의 바탕을 이루는 서술들도 흔들어볼 수 있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먼저 두 가지를 확인해야 한다. 화자의 서술을 믿을 수 없다는 판단은 믿을 수 있는 서술과의 대조로 가능하다. 굳은 땅이 어디에도 없다면 독자는 소설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다. 다음으로, 김병수는 소설에 드러난 최후의 사건과 시간까지 전부 경험한 이후에 ‘자신의 방식으로’ 재배치해서 서술하고 있다. 독자는 소설의 흐름을 따르기에, 화자인 ‘나’가 뒤늦게 알았다는 어떤 사실을 그와 함께 뒤늦게 안다. 하지만 실제로 화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소설의 그 지점에서 ‘이제야 알았다’고 서술한다. 화자의 (비)의도적인 서술 전략을 고려하면, 소설의 서사 ‘밖에서’ 신빙성을 따져야 할 필요가 생긴다.
안과 밖을 구별하는 쓸모는 독자가 ‘살인자의 기억법’이라는 제목에서 어디에 방점을 찍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방점을 살인자에 찍는다면, 이 소설을 <마인드 헌터>, <덱스터>, <크리미널 마인드>같은 연쇄살인을 다룬 ‘미드’와 비교하는 작업이 흥미로울 것이다. 재밌는 시도이긴 하지만 정작 소설은 중심에서 밀려날 우려가 크다. 방점을 기억에 찍는다면, 서사 ‘안에서’ 생겨나는 의심들을 해결하려고 애쓰다가 자연스럽게 시간이라는 다른 주제로 이어질 것이다. 주제에서 깊이와 무게를 얻는 반면 소설은 평범해질지도 모른다.안과 밖을 구별하는 쓸모는 독자가 ‘살인자의 기억법’이라는 제목에서 어디에 방점을 찍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방점을 살인자에 찍는다면, 이 소설을 <마인드 헌터>, <덱스터>, <크리미널 마인드>같은 연쇄살인을 다룬 ‘미드’와 비교하는 작업이 흥미로울 것이다. 재밌는 시도이긴 하지만 정작 소설은 중심에서 밀려날 우려가 크다. 방점을 기억에 찍는다면, 서사 ‘안에서’ 생겨나는 의심들을 해결하려고 애쓰다가 자연스럽게 시간이라는 다른 주제로 이어질 것이다. 주제에서 깊이와 무게를 얻는 반면 소설은 평범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방점을 ‘법’에 찍는 것은 어떨까. 살인자 김병수가 자신의 기억을 다루는 방식과 전략 말이다. 앞서 말한 서사 ‘밖에서’ 하는 서술의 신빙성을 따지는 시도다. 독자가 주목할 것은 김병수가 드러내거나 감추는 내용이 아니다.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 숨기는 것도 아니다. 노출하는 것을 통해서 누락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독자가 읽는 모든 것을 통해서 김병수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효과를 기대하는가 물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방향에서 충실하게 읽었다면, <살인자의 기억법>은 독자로서 지루했을 것이다. 이 소설이 흥미로웠던 까닭은 김병수가 끝까지 어떤 ‘연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작가와 소설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 없(을 수도 있)고, 오로지 독자의 개별적인 망상적인 읽기일지도 모른다. 최근 개봉한 영화 <설국열차>의 ‘프로틴바’가 한국 관객에게 양갱을 연상시키고, ‘메이슨 총리(틸다 스윈튼)’가 영국 관객에서 대처 총리를 연상시켜, 영화가 해석되는 맥락을 확장시키는 것과 비슷하달까. 때론, 정연한 논리를 통해 정당화되는 비평의 자리에서 비켜나더라도, 자유로운 연상을 통해 소설의 가능성을 풍성하게 만드는 시도가 낫다.
다행히 이 소설은 그런 연상을 허락하는 서술을 포함한다. 문화센터에서 미당의 시 ‘신부’를 다룰 때, 강사부터 수강생들까지 정말 아름다운 시라며 난리를 피운다. 그런데 김병수는 그 시를, 첫날밤에 신부를 살해하고 도주한 신랑 이야기로 읽는다. 김병수의 읽기 방식을 따른다. 김병수는 전두환을 ‘연상’시킨다. 금강경과 반야심경은 백담사가 떠오르고, “강사가 미당의 시를 가지고 수업을 했다”는 부분에선 그에게 찬양시를 바친 미당 서정주가 떠오르고, “나는 수의사였다”는 김병수의 말에선 ‘수방사’가 떠오른다. 김병수가 치매에 걸린다는 설정은 최근 추징금 관련 검찰 수사 과정에서 나온 전두환의 치매가 의심된다는 보도가, 김병수가 “공소시효는 다 지났다. 나가서 떠들어도 된다. 미국 같으면 회고록을 출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할 때는, 전두환이 회고록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떠오른다.
연상을 바탕으로 김병수가 이 소설로서 얻고자하는 건 뭘까? “언젠가 신문에서 본 얘기 : 말기 위암 환자가 중환자실에서 경찰을 불러달라고 했단다. 그는 10년 전에 저지른 살인사건을 자백했다. 그는 동업자를 납치해 죽였다. 경찰이 야산에서 유골을 찾아냈다. 돌아와 보니 범인은 혼수상태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는 극심한 육체적 고통에 죄책감까지 겪어야 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용서했다. 누가 봐도 그는 자신의 죗값을 치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나도 용서할까? 아무 고통 없이 망각의 상태로 들어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리게 될 연쇄살인범에게 세상은 뭐라고 할까?”
김병수를 다른 누군가로 연상하면, 그의 기억‘법’은 두렵다. 가령 전두환에게서 사람들이 맞닥뜨릴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상황은 “내가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침묵과 부인이 아닌 과거를 전부 잊어버리는 상황. 그렇게 역사가 영원히 현재에 도래하지 못하는 상황. 살아있는 전두환이 사람들에게 보낼 수 있는 가장 “짖궂은 농담”이다. 영화 <밀양>에서 신애가 자신의 아들을 유괴해 죽인 범인을 용서하기도 전에, 범인이 자신은 하느님에게서 용서를 받았다고 해버리는 것과 같은 “짖궂은 농담.”
사람들 주변에도 살인과 같은 천인공노할 범죄는 아니더라도 작은 김병수들이 있다. 그들이 침묵하거나 부인할 때 사람들은 진흙탕으로 내팽개쳐졌다. 그런데 그들이 침묵과 부인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사람들이 항변이나 저항, 이의제기를 할 수 있는 대상 자체가 아예 무효가 된다면? 죽음보다 실종이 남은 자들에게 더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우리 주위의 ‘김병수들’이 죽는 것보다 살아서 기억의 “좀비”가 되는 것이 더 끔찍할 수 있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소설 내용이나 주제보다 그런 ‘연상’을 불러일으켜서 끔찍하다. 전두환처럼, 살아남은 ‘김병수들’이 그런 방식으로 개인과 역사의 ‘기억’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예감. 김병수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입장에서.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인생이 보내는 짖궂은 농담이다.” 이 말은 이렇게 바꿔야 한다, 독자의 입장에서.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이 역사에게 보내는 짖궂은 농담이다.” 이 잔인한 농담을 마주한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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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박준석(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