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영미의 컬러와 패턴의 완벽한 조화.
지금보다 더 잘됐으면 좋겠고 누군가 나쁘게 말하면 무조건 싫고,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기쁘기도 슬프기도 한 것. 사랑하는 데도 헤어진 연인 얘기는 아니다. 우영미는 그녀와 한 시절을 함께 보낸 패션 에디터들에게는 그렇게 각별한 이름이다. 압구정에 먼지만 펄펄 날리던 때, 버스 정류장만 있던 거리에 뚱딴지처럼 문을 연 청결한 부티크 솔리드 옴므는 서울 남자들을 천천히 부드럽게 바꿨다. 옷보다 사람이 먼저 보이는‘ 플레인한’ 옷,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 보이는 여백이 많은 옷, 단정하고 수수하지만 우아하고 지적인 옷. 솔리드 옴므는 조용하고 사려 깊고 따뜻한 연인 같았다. 한편, 우영미 파리 컬렉션은 솔리드 옴므보다 더 섬세하고 예민한, 예술과 사색을 좋아하는 남자들의 옷이다. 2002년 겨울, 비 오는 일요일의 파리에서 첫 쇼를 한 후 우영미 컬렉션은 이제 10년을 넘겼다. 올가을, 솔리드 옴므는 25주년을 맞았고 우영미 컬렉션은 11주년이 되었다. 옛날의 그때보다 마르고 여원, 그러나 훨씬 평온해 보이는 얼굴의 우영미를 만났다. 맨메이드 꼭대기 층, 색연필과 가터벨트가 함께 진열된‘ 유니크한’ 편집숍에서 로이라는 이름이 붙은 향초를 샀고, 카페에서는 뜨거운 셰퍼드 파이를 주문했다.
이번 광고 캠페인은 마이클 요한슨이네요.
스웨덴 오브제 아티스트예요. 뭐든 쌓아서 사각형으로 만드는 작가인데 쇼가 끝난 후에 연락이 왔어요. 같이 작업해보고 싶다고. 그전에 우영미와 작가들의 협업을 꾸준히 봤나 봐요. 만나보니 취향도 좋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망설이지 않고 같이 했어요. 가을에 맨메이드에서 마이클 요한슨 전시를 할 건데, 그때 서울에 올 거예요.
그러고 보니 여기 있던 권오상 씨 작업이 없어졌네요. 어디다 옮기셨어요?
파리로 가져갔어요. 얼마 전에 독립 쇼룸을 만들었는데 거기로 옮겼어요.
쇼룸도 그렇고, 파리 의상조합 정식 회원이 된 것도 그렇고. 이젠 파리에서 덜 힘들겠어요.
외국인이어서 어쩔 수 없이 겪는 불이익이 조금은 없어질 거라고 믿고 있어요. 완전히 파리 사람이 될 수는 없겠죠. 그러고 싶지도 않고요.
옷들이 점점 젊어지는 기분이에요. 보통은 디자이너와 함께 옷도 손님도 함께 나이 들잖아요.
여자 디자이너여서 그럴지도 몰라요.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자는 늘 젊고 건강하고, 나이 들지 않은 채로 있어요. 내 몸이 살 찌고 빠지고 하는 것과도 상관없고요. 직접 우영미 옷을 입을 수 있었다면 이 나이에 이게 괜찮은 걸까, 고민도 했을 테고 몸이 바뀌면 좋은 옷에 대한 기준도 달라졌을 거예요.
옷에 쓰는 오묘하고 과감하고 가볍지 않은 색깔들은 어디서 찾는 거예요? 특히 이번 컬렉션에 쓴 노란색, 푸른색, 붉은색은 단순히 노랑, 파랑, 빨강이라고 할 수 없는 색깔이에요.
색깔이 눈에 확 들어오는 순간이 있어요. 전적으로 감에 의지하는 거죠. 처음에 컬러를 골라서 옷을 만들고 보니 색깔이 좀 너무 센가 싶었어요. 이거 텔레토비 같아? 직원들한테 여러 번 물어봤어요. 의견이 분분했어요. 그런데 결국 나를 믿자, 그러고 말았어요. 내가 나를 믿어야 쇼를 할 수 있어요.
우영미 옷의 가장 큰 특징은 균형이에요. 포멀과 캐주얼,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상반된 것들이 아주 적절한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섞이죠. 가장 조화로운 비율을 찾는 비결이 있나요?
결국은 같은 얘기가 되네요. 나를 의심하지 않는 것.
올 가을겨울 컬렉션 옷들은 구조적이고 유기적이라는 점에서 건축물 같아요.
바우하우스에서 힌트를 많이 얻었어요. 바우하우스의 현대적인 요소와 혁신적인 요소, 그걸 조합해서 옷에 적용시켰죠. 다 만들고 보니 생각한 대로 나와서 안심했어요.
이제 까다롭기로 유명한 미스터 포터에서 우영미 옷을 살 수 있고, 철옹성이라 불리는 스타일 닷컴에도 우영미 컬렉션 리뷰가 실리고 있죠. 사업이 커질수록 두려운 마음도 커질 것 같아요. 늘 초연해 보이지만, 어떤 다큐멘터리에서 우는 걸 봤어요.
최근에 힘든 일이 많았어요. 그동안 별다른 풍파 없이 평온하게 지냈는데, 힘든 일들이 한꺼번에 닥쳤거든요. 그 와중에 솔리드 옴므 25주년 행사도 해야 했고, 우영미 파리 컬렉션 10주년에 마레의 매장도 옮겨야 했어요. 쇼룸도 따로 내야 했고. 중요한 결정을 할 땐 거실에 혼자 앉아서 오랫동안 생각해요. 결정은 결국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외롭죠. 하지만 감정의 파도가 높을수록 내가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란 걸 알게 돼요.
그래도 혼자 모든 걸 할 순 없어요. 믿고 의지하는 뭔가가 있겠죠.
가족이 제 피난처고 휴식이에요. 주말마다 외곽의 농장에서 모여요. 약속 없이도 요리 한 가지씩 해서 가져오고 산에도 가고, 강아지도 풀어두고 나무 냄새, 흙 냄새 맡으면서 평화롭게 지내다 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에너지가 또 생겨요. 큰딸이 유럽에서 살다 서울에 오면서 골든 리트리버를 데려왔어요. 목에 여권 걸고 비행기 타고 왔는데 그게 그렇게 애잔한 거예요. 강아지 입장에선 이민 온 거잖아요. 친구들하고 마음껏 놀라고 일부러라도 농장에서 모여요. 식구들이 각자 데리고 오면 강아지만 열 마리가 넘거든요.
매번 아티스트와 캠페인 작업을 하는 건 왜인지 궁금해요.
우영미 옷을 사람으로 표현하자면 예술을 사랑하는 엘리건트한 남자예요. 그런데 그 예술적인 감성을 옷으로 표현하는 건 내키질 않아요. 주변에선 컬렉션이 밋밋하다고, 아주 아티스틱한 아이템들을 넣자고 하는데, 쇼를 위한 옷을 만드는 건 성격적으로 안 맞아요. 우영미 컬렉션을 보고 나면 모두들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팁을 얻으면 좋겠어요. 내일 셔츠를 저런 식으로 입고 나가야겠다, 이 색깔과 저 색깔을 섞었더니 이런 분위기가 나는구나, 그런 정도면 좋죠. 옷은 옷대로 현실적으로 만들고 브랜드가 얘기하고자 하는 건 광고 캠페인이라든지 브랜드 북이라든지, 다른 방식으로 전하고 싶어요. 매번 작가들과 협업을 하는 건 그런 맥락이에요.
그러고 보니 곧 코트의 계절이네요. 우영미 하면 코트죠. 그처럼 상냥하고도 고상한 코트는 우영미밖에 못 만들 거예요.
아버지가 코트를 그렇게 멋지게 입으셨어요. 아버지를 생각하면 늘 차가운 기운이 잔뜩 밴 겨울 코트 냄새가 떠올라요. 타고난 건강체에 빼어난 멋쟁이셨는데 세월과 함께 몸이 많이 약해지셨죠. 시력이 떨어져서 사물을 분별하는 게 힘들어지셨는데도 감은 사라지지 않는 건가봐요. 아침마다 커피를 드시는데 컵을 떨어뜨리면 다치실까 봐 플라스틱 컵에 드렸었거든요. 난 이 컵 싫다, 그러시면서 저기다 줘 하시는 데, 그게 제가 파리에서 사온 정말 예쁜 빈티지 잔이었어요. 희미한 채로도 아름다운 건 다 보시는구나, 마음이 복잡했어요.
매번 포스트잇에 해야 할 일을 적어서 붙여놓는다고 했잖아요. 요즘 새로 붙여놓은 게 있나요?
흔들리지 않는 것. 더 잘되려면 뭘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대부분 하기 싫은 일들이에요. 날 위한 마음인 건 알지만, 싫은 걸 억지로 하고 싶진 않아요. 지금처럼 할 거예요. 조용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우영미답게.
- 에디터
- 강지영
- 포토그래퍼
- 목나정
- 모델
- 윤진욱
- 어시스턴트
- 백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