뻗대는 걸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도시, 그렇게 도무지 불가능을 모르는 것 같은 도시, 그러나 막상 찾으려 들면 좀처럼 없는 도시, 아예 불모지인 것만 같은 도시, 서울. 서울에 사는 60인이 말하는 아직도 서울에 없는 것들.
NBA 스토어
NBA가 글로벌화 전략을 쓰면서 전 세계적으로 조던 시절보다 훨씬 인기인데, 마누 지노빌리 같은 선수의 저지를 서울에서 사려면 하다 못해 일본이나 홍콩이나 중국에 가야 한다. 물론 아디다스에서 코비나 르브론 정도는 구할 수 있고 일부는 라이선스로 들어와 있긴 하지만 MLB 같은 캐주얼 의류에 로고만 박는 식이라 영 착잡하다.
김교석(칼럼니스트)
피에르 에르메
서울에도 ‘스위츠’가 서서히 자리를 잡고 있다지만, 정말 그 맛과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이스파한 하나를 사더라도 그 박스나 쇼핑백만으로 대단한 사치품인 양 머릿속까지 달콤해져야 비로소 진짜 ‘스위츠’다. 귀여운 척하는 캐릭터나 싸구려 종이봉투로는 언감생심 먼 얘기다. 풍문에 따르면 피에르 에르메가 조만간 서울에 들어온다고 하던데.
박창용(그래픽 디자이너)
도토루 커피
도쿄에서 2백 엔 주고 마시는 커피 한 잔. 거기에서도 일본특유의 장인정신을 느낀다. 적당한 가격으로 편안히 찾을 수 있는 가게를 만드는 마음이야말로 장인정신의 기본이 아닐까. 한때 도토루 커피를 우리나라에서도 만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다시 서울에 도토루 커피가 생겨서, ‘서울에는 도투루 커피도 있지’ 경부선기차에서 생각할 것이다.
윤철희(대전 ‘플레이버거’ 대표)
랜드마크
서울 하면 딱 떠오르는 랜드마크가 무엇일까? 다시 지은 광화문? 다시 지은 숭례문? 아직 그런 게 없다는 건, 그만큼 열려 있다는 건지, 이미 꽉 닫혀 있다는 건지, 생각할수록 헷갈린다.
박모과(VJ, ‘파르크’ 대표)
마리화나
서울에는 마리화나가 없다. 어딘가 있고 누군가 알겠지만, 있다고 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합법화를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라고도 덧붙여야 한다. 그것은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함영준 (‘커먼센터’ 대표)
스포티파이
올해 초부터 스포티파이라는 해외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를 결제해 쓰고 있다. 이 서비스는 TOP 10 차트가 없다. 하지만 새로운 음악을 찾아나설 때 들어야 할 충실한 지도이자 나침반이다. 내가 듣는 음악, 친구들이 듣는 음악 그리고 페이스북에서 가져온 내 정보를 이용한 추천부터 블루 노트, 가디언, 하이프머신, 피치포크 등의 레이블과 웹진 심지어는 웹 서비스를 넘나드는 앱들, 아이튠즈 라디오 이전부터 있었던 정교한 알고리즘이 돋보이는 라디오, 만들고 공유하는 게 친구에게 컴필레이션 테이프 녹음해주듯 자연스러운 플레이리스트 기능까지.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가 아닌 사용자 중심의 서비스 회사다. 국내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TOP 10을 치운다면 뭐가 남고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박국(‘영기획’ 대표)
포토샵
파리의 골목골목을 쏘다니던 시절에 사진 가게를 본 적이 있다. 크고 작은 사진들이 액자도 없이, 백 년은 돼 보이는 나무 진열대에 빼곡히 꽂혀 있었다. 주인을 알 수 없는 가족사진부터, 모두가 익히 아는 사진가의 오리지널 프린트까지. 서울에서 사진은 찍거나 찍히는 거지, 사거나 갖고 싶은 게 아니라서 없는 걸까. 엽서나 사진 책 파는 데 말고 ‘포토샵’이 있었으면 한다.
이윤호(사진가)
알로카시옹
프랑스 정부에서 학생 또는 신혼부부들에게 주택임대료의 일부를 환급해주는 제도다. 외국인도 받을 수 있다. 파리 유학 당시 매달 6백30유로의 집세를 내고 1백90유로를 환급 받아 숨통을 틔우고 살았다. 프랑스의 느릿한 행정 처리 속도 탓에 가끔 두세 달 밀리기도 했는데, 밀린 돈을 한꺼번에 받는 날은 계 타는 날이었다.
고창혁(스프링 케임, 레인 폴 셰프)
SOD
서울은 여러 분야에 걸쳐 선진화를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진화’는 제자리걸음이다. 아리수는 아리수의 역할이 있고, 지하수는 지하수의 역할이 있다. 일본 AV 모델이 한민족의 이상형으로 자리 잡는 비극은 그만 끝났으면 한다. 그리고 이왕이면 SOD만큼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AV 레이블이 생겼으면 한다.
김일수(그래픽 디자이너)
프랭크 게리의 건축
뭐든 유명한 거라면 갖다 놓고 보는 나라에, 이 사람의 건축물이 없다는 건 흥미롭다. 한국은 마치 황혼기에 접어든 건축가가 특별한 경쟁 없이 초청으로 유명세를 타고, 유명세 그 자체 때문에, 예전의 작업과 비슷한 결과물을 가져오는 나라다. 옷으로 치면 기성품 같은 것을 유명하다는 이유로 굳이 가져온다. 최고의 디자이너를 섭외해놓고, 그의 기성품을 산다. 자하 하디드, 스티븐 홀, 안도 타다오 같은 건축가가 그런 식으로 한국에 건물을 남겼다.
배윤경(건축가)
애플 스토어
애플 스토어는 애플의 공식 판매처다. 이것이 있어야 애플의 공식적인 AS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은 뭘 출시하든 1차 출시국에서 제외된다. 한국이 마치 IT 선진국인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애플 입장에서는 그리 크지 않은 시장이라서 그런 걸까? 하지만 한국보다 작은 시장에도 애플 스토어는 있다. 애플 스토어의 디자인 자체에도 건축적 가치가 있다. 팔로알토 애플 스토어는 외벽이 유리로만 이뤄져 있는데, 이 유리 접합하는 방식을 특허를 냈다. 그 포스가 상당하다. 마치 제조업처럼, 애플 스토어도 애플의 정체성을 그대로 잇고 있는 거다. 긴자, 도쿄, 홍콩,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할렘에도 들어서는 가게가 서울에는 없다. 그러니까, 아직 한국은 보따리 장수 같은 식으로 들여오고 있다.
박상진(건축가)
포르노
가릴 데만 가린 에로 영화는 있지만, 포르노는 불법이다. 일본 제작사에서 웹하드 업체를 고소한다고 했지만 그 고소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들의 손해를 우리 법이 보장하지 않는다. 음성적이라서 생기는 것들. 다 감춰져 있는 것들. 포르노보다 더한 일들이 일간지에 늘어져 있지 않나? 힘도 없이.
배성환(문화평론가)
바구니 달린 자전거
도쿄에 머물던 1년 동안 자전거 바구니에 많은 것을 실어 날랐다. 슈퍼마켓에서 사온 즉석 초밥, 중고 만화책 묶음, 도서관에서 대출 받은 논문집, 부산에서 택배로 받은 김치…. 서울로 돌아왔을 때, 서울의 자전거에는 바구니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부분 작고 비싸고, 수십 단의 기어가 달려 있었다. 그것들은 주로 정비된 강가의 전용도로나 젊은 친구들이 가는 카페 앞에 서 있었다. 생활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운동과 스타일을 위한 물건이었다. 서울은 평지가 적은 도시라 자전거를 일상적으로 이용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자전거 바구니가 없는 걸까? 그러나 교통수단으로서의 자전거라면 바구니를 빼놓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도쿄에서 가장 즐거웠던 경험은 자전거 바구니에 반찬거리를 싣고 해질녘 음식 냄새가 떠도는 골목길을 내달리던 순간들이었다.
류호진( PD)
바바라 팔빈
정말이지 평화로운 얼굴과 몸이다. 내가 스위스 한림원이라면 이 여자의 몸에 노벨 평화상을 주고 싶을 정도다. 이런 여자 앞에서 전쟁을 생각할 수 있나? 세속적인 것들은 다 소용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표정이다.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 중에서도 가장 어리다. 93년생이니까, 사실 이 여자를 욕망하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 아무 데도 탄력을 잃지 않은 원시성, 그 순수. 너무 원시적이기 때문에 순수해 보인다. 한국에는 이런 모델이 없다. 죄다 말랐고, 그게 패션인 줄 안다. 여자도, 시대도 각박하다.
마이클 조(투자 자문가)
뉴욕 타임스 같은 매체
좌편향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기사를 다루는 데 서는 좌도 우도 아니다. 사실관계에 근거해서, 높은 품격을 지향하는 매체다. 기사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마케팅 하는 모든 구성원의 지향점이 이념이 아니라 기사의 질, 사진의 품격인 매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회가 아주 민감한 사안을 두고 격돌할 때, 결국 이런 매체가 이념과 이해관계에 편향되지 않고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하지 않나? 이런 매체가 있어야 정치의 품격도 유지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다. 혹은 이런 매체를 향유할 수 있는 독자층이 탄탄했으면 좋겠다.
김동조(트레이더, 칼럼니스트)
요시노야 규동
일본의 규동 전문점이다. 혼자 간 일본 여행에서 호텔 조식을 우아하게 챙겨 먹을 만큼 부지런하지 못한 나 같은 사람이 은근한 숙취, 애매한 시간, 오늘의 목적지를 안고 아침을 해결하기엔 요시노야만 한 곳이 없다. 싸고 맛있고 금세 나오는 규동을 한 그릇 비우고, 주머니 속 동전을 몇 개 모아서 쓱 내밀고 나오면 되니까. 아, 이 공복은 ‘든든한 한 끼’도 아니고 ‘붕어빵 두어 개’도 아니고 딱 규동 한 그릇짜린데…. 그럴 때가 있다. 들리는 얘기로는 거의 20년 전에 들어왔다가 망했다는데,
임익종(일러스트레이터)
레이버 앤 웨이트
런던 동쪽에 있는 생활용품 편집매장이다. 투박하지만 오래 쓸 수 있고, 그래서 솔직한 물건을 여기서 살 수 있다. 한국에선 어떤 물건을 사기가 너무 힘들다. 편집매장은 속이 훤히 보이도록 비싸고, 싼 물건은 집 안에 들여놓기도 싫을 정도로 곤란한 품질인 경우가 많다. 런던에 갈 때면 뭐라도 산다. 하다못해 병따개라도.
목정욱(사진가)
예의
공공공장소에서는 큰 소리로 말하지 않는 것. 전화할 일이 있어도 오래 끌지 않는 것. 처음 보는 사람에겐 아무리 어려도 말을 놓지 않는 것. 스스로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했을 땐 ‘미안합니다’ 말하는 것. 고마울 땐 ‘고맙습니다’ 하는 것. 거리에 침을 뱉지 않는 것. 아, 여기에 글로 다 옮길 수 없는 행동양식들. 서울엔 없다. 사려 깊은 누군가에게는 있어도 공유된 바가 없다. 한국 어딜 가도 없다. 문화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 스트레스만으로도 서울은 살기 힘든 도시다.
미오(사업가)
파도
서프보드를 들고 지하철을 타는 도쿄의 젊은 서퍼들, 본다이 비치를 본뜬 요요기 공원 근처 카페에서 즐기던 아싸이볼, 뉴욕의 새터데이 서프와 필그림 서프+서플라이 같은 서퍼를 위한 공간들, 뮌헨 이자르 강 아이스바흐 지점의 민물 서퍼들. 이런 것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대도시의 느긋한 서핑 분위기’라면 적절할까? 물론 서울에도 서핑을 콘셉트로 한 디스코 서프, 봉주르 하와이를 비롯한 가게가 있고, 서해 만리포와 강원도양양에서 서핑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도쿄, 뉴욕, 뮌헨처럼 서핑이 도시에 녹아 있다는 인상은 아니다. 서울엔 파도가 없다. 월미도 앞바다의 파도가 라구나 비치 같았다면 인천과 서울의 분위기는 꽤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인천이나 영종도 앞바다가 양양 앞바다라면 얼마나 좋을까? 뜨는 비행기 보고, 석양 보고, 그러다 서핑하고.
JBW(JBW&Co. 대표)
레이저 태그
레이저 태그는 대부분의 서바이벌 게임과 비슷하다. 깃발 뺏기, 여왕 지키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한도전>이나 <런닝맨>에서도 다룬 적이 있는 요소들이라 익숙하다. 실내에서 할 수 있고, 페인트볼보다 위험성도 적어 더 가볍게 즐길 수 있다. 무엇보다 방문해본 거의 모든 레이저 태그 파크는 촬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진 모습이었다. 실제로 에이샙 라키와 친구들은 <피치포크 TV>에 공개한 프리스타일 영상을 레이저 태그 파크에서 촬영했다. 저스틴 비버 역시 레이저 태크 파크에서 ‘인증샷’을 올리는 등 젊은 스타들이 다시 레이저 태그 파크를 찾고 있다. 이태원 우사단로 어딘가에 생긴다면 제격이지 않을까?
김아일(뮤지션)
- 에디터
- GQ 피처팀
- 기타
- 일러스트레이터 / 김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