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2015.01.29이충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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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모두가 초능력자로 산다. 디지털에 취약한 나조차 회사 후배에게 뭔가 묻자고 50미터를 걷는 대신 문자를 보낸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한 달 걸려 기별을 전하던 고리짝 일을 생각해보면 옛사람들에 비해 수명이 천배쯤 늘어난 셈 아닌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래 예측엔 아이러니가 적었다. 미래는, 미래적이라기보다 의외로 과거에 관한 것이었다. 옛날의 미래, 거꾸로 가는 미래, 재활용된 미래, 미래의 땅이라는 허무, 돔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관한 무서운 꿈, 쓸쓸한 달의 암석이 전시된 파리 날리는 나사 전시장, 산업혁명 직후 세계 박람회에 나왔음직한 세기 중반적 메아리, 세미 키치적인 우주 시대의 향수…. 우주 유영에 사용하는 개인용 분사 추진기 제트팩이나 자유의지를 가진 제멋대로 인공지능 컴퓨터보다, 깡통 로봇이 자기 머리를 뜯어 위에다 넣었다가 뒤에 두었다가 어깨에 놓았다가, 하며 걷는 영화야말로 미래의 신성한 리얼리티 같다. 전형적인 형상이건 아니건, 디즈니의 ‘해저 2만리’를 닮았건 말건, 팀 버튼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상상과 비슷하건 그 반대건, 우리는 매일 과학이 예견했던 미래를 경험한다. 아직 화성은커녕 달 생활권 시대도 오지 않았는데, 우주 판타지는 보다 현실적 으로 채워졌다. 미래 탐험이 독창성을 행성계에 알리는 은유인지, 끝이 안보이는 낭비인지는 차치하고, 시공연속체로서의 새로운 차원에서라면 에스테틱 랩조차 우주 왕복선을 대신하는 것만 같다.

미래는 시간처럼 조금 더 가까이 혹은 조금 더 멀리 다가왔다. 사람들은 미래를 두드리고 과거를 두드린다. 다양한 삶의 단계마다 우선순위를 정하고, 더욱 생산적인 요소를 선택하며, 모든 방식으로 자기 삶을 재주문한다. 전통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각자 자기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는데 전통이 왜 필요하지? 주류라는 것도 사라질 것이다. 적어도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방식의 주류는.

그래도 미래의 모든 게 능률적이고 합리적인 구도로 연결되어 있을리가 없다. 오히려 정신 없는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방어수단이 창궐하고, 모든 주제가 논쟁을 부를 것이다. 대다수가 채식주의자가 될 거라는 전망처럼. 식물로부터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는데 왜 가축을 죽여야 하지? 하지만 수백만 년 동안 고기를 먹어왔는데 왜 이제 와서 그만둬야 하는데? 항우울제를 타이레놀처럼 일상적으로 먹는 사람이 그렇게 많아지고 삶의 괴로움과 즐거움이 무덤덤하게 변하는 건 나쁜 징조일까? 점점 고달파지는 세상에서 화학적 구원을 받아선 안 되는 이유가 뭐지? 약물치료가 안먹히면 종교가 역할을 대신할 텐데, 종교에 대한 관심은 해가 될까? 신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은 더 나은 사람으로 이끌지 않을까? 목 위쪽을 중시하는 삶 속에서 꿈꾸던 얼굴을 갖고 싶어서 의사의 기술을 빌리는 게 잘못인가? 그러나 지금도 정직함이 멸절됐는데 모든 게 가짜라면 대체 뭘 믿어야 하나? 노화를 막을 순 없지만 80대에도 매일 일해야 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죽을 때까지 살아남기 위해 육체적으로 경쟁해야 한다면?

발달된 의학과 공중 보건은 신체와 정신의 결점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돌볼 테지만 어디까지일까? 전화 회사는 두개골 사이로 암호화된 전화기를 삽입해 사람들이 서로 은밀하게 대화하게 만들까? 뇌에 임플란트를 심어 생각만으로 차의 시동을 걸 수 있다면 다들 그걸 원할까? 대한의 부모라면 행동이 굼뜬 아들을 위해 뇌를 전자로 휘감고 기억을 되살리는 내장형 장치를 주문하지 않을까? 기억력을 두 배로 증진시키는 약이 전국 석차 20위를 보장한다면 부모와 상관없이 당사자 스스로 더 원하지 않을까? 열 배 빠르고 강한 의족을 식약청이나 FDA에서 승인한다면 다리가 건강한 누구라도 인공의 것으로 교체할지 말지 잠깐 고민하지 않을까? 그런데 토론 중인 정치가나 무대에 선 가수가 지능과 기능을 최대한 활용하게 만드는 신경이식을 감행했다면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지?

시각장애인에게 부분적인 시력을 되찾아줄 장치로서, 안구 뒤쪽에 심은 작은 센서는 손상된 연결 부위를 조만간 대체하지 않을까? 언젠간 피부 아래 끼운 광섬유 라인을 거쳐 뇌로부터 작동하는 더 진보된 의족이 개발되지 않을까? 지금은 제한된 줄기세포의 적용 범위가 뇌, 심장, 간 세포에 적용되는 게 먼 훗날의 일일까? 새로 생성된 세포와 DNA가 병을 다고치고 맞춤형 인간을 만들어 급기야 2040년이 되면 다들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주장은 합성생물학자들만의 욕심일까? 기대 수명은 그렇게 해마다 늘어나지만 그렇다고 누가 인생의 마지막 10년을 인공호흡 장치에 의존하고 싶을까?

수명 연장이라는 윤리적 도전은 누가 그 혜택을 받는지, 비용은 얼마나 드는지에 관한 논란을 포함한다. 사회 내부에서는 이미 부자와 빈자 사이의 격차가 만연하다. 부자들이 신체적, 유전적, 생체공학적인 혜택까지 갖는다면 민주주의는 그야말로 위태로운 시험을 맞게 되겠지만, 그 또한 인간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도전 아닐까?

진짜 문제는 매초 발전하는 기술을 거부할 수 없는 순간이 올 때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것이다. 황폐하고 외롭다는 생각이 들까? 아니면 무한한 가능성을 느낄까? 둘 다건, 둘 다 아니건, 요약 불가능한 세상 속에서 개인은 각자 취할 수 있는 최대치 용량을 삼킬 뿐이다. 기술의 산등성이, 대양에서 밀려오는 물결 위를 떠다니는 문화적 거지가 되어.

    에디터
    이충걸(GQ KOREA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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