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2015년의 순간들 – 2

2015.11.03GQ

이상했다. 기괴했다. 우습고 슬펐다. 윤곽이 보였다. 숫제 뿌리가 드러났다. 그런가 하면 꽁꽁 숨었다. 기쁘기도, 웃기도, 잊히기도 했다. 새로운가? 넘쳐났나? 2015년은 우리에게 과연 어떤 시간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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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준 일민미술관 책임 큐레이터

2015년이 힘들었나 생각해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데, 또 어땠는지 돌이켜보면 엄청나게 힘든 해였다고 기억할 것 같다. 특별한 사건이 있어서 힘든 게 아니라, 사이비 점쟁이처럼 얘기하자면, 기운이 남다른 해였다. 서울을 오가며 생활해온 시간 동안 이렇게 강한 에너지를 느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강력한 방사능이 떠도는 공간에서 살아본 기분이랄까. 별일이 아닌데도 예민하게 반응하다 보니 정작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에는 둔감해졌던, 두텁게 쌓인 광기를 버티느라 피로가 누적될 대로 누적된 시기가 2015년이었던 모양이다. 그 광기의 백미는 아마도 한 무리의 퍼포먼스 단체가 출몰하던 기억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기독교 단체로 추정되는 그 무리를 처음 본 것은 지난 3월초 였다. 그들은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공연을 벌였다. 그들은 연하늘색 개량 한복을 입고 무리지어 발레 비스무리한 몸동작을 하다가 부채춤을 추다가 하더니, 통성기도 드리듯 괴성을 지르며 조촐한 퍼포먼스를 끝냈다. 장 자크 아노의 <불을 찾아서> 같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의식이었는데,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몸동작에 비해, 깊숙히 진정성의 영혼을 맞이하려는 표정이 대비되는, 무의미함에 열중하는 광인들이었다. 알다시피 이 공연은 주한 미국 대사인 마크 리퍼트를 공격한 김기종의 죄를 씻기 위해, 한민족을 대표한다는 자부심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후 그들은 성소수자 행진이 있던 날도 등장해 똑같은 동작으로 춤을 추면서 마치 망국의 한을 풀려는 것처럼 슬퍼하거나 격노했다. 대표적인 성소수자 작곡가로 추정되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 맞춰 춤추며, 동시에 이성애자의 인권에 대해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다. 그 맹목의 광기, 그들에게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것이 이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지만 나는 그들이 그렇게 이상한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물론 아주 이상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보통의 서울 시민에게서 받는 느낌과 어쩐지 흡사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까, 지하철을 타거나,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거나, 맛집 앞에 줄을 설 때, 언제든 내 앞에서 문을 쾅 닫고 지나가거나, 내가 계산 중인 계산대에 제 물건 먼저 올려놓거나, 지하철에 앉아 신발을 벗고 있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평범한 서울 사람들 속에 그런 사람들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어쩌다가 2015년에 모습을 드러낸 것뿐이다. 공교롭게도 그러한 모습과 정확히 어울리는 전시가 거의 같은 시기에 열렸다. 3월 19일에 통인동의 시청각에서 열린 잭슨홍 작가의 <체리 블라썸Cherry Blossom>이라는 개인전이었다. 한옥을 개조한 전시장에는 한국인들이라면 언제나 낯익은 미감과 텍스처의 등신대 인형들이 설치되었다. 그 인형들이 하나씩 특정 한국인을 표상하면서 자리를 잡고 무언의 연극을 진행하는 기이한 한옥의 공간. 서까래에 설치된 조상님의 영정 액자 아래로 펼쳐지던 모던-코리안 디오라마. 그 박제된 광기의 못생김을 발견한 순간이 바로 나의 올해의 순간이다.

 

하박국 HAVAQQUQ (영기획YOUNG, GIFTED&WACK 대표)

블랙넛이 <Show Me The Money>에 출연해 바지를 벗었을 때 모자이크에 가려진 건 팬티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일베와 디씨인사이드를 떠돌며 악성 댓글을 쓰는 지질한 청춘과 여성 혐오, 거대 기획사와 미디어 그룹의 관계, 능숙해진 미디어가 힙합의 자극적인 콘텐츠를 다루는 법, 새로운 미디어 환경과 질서에서 래퍼가 커리어를 쌓는 법이 버무려져 있었다. 그의 가사처럼 블랙넛이라는 필터를 거친 쇼는 발기하듯 이슈를 키웠다. 결과적으로 쇼는 흥행했고 블랙넛은 이름값을 높였다. 기자들은 트래픽을 보장하는 콘텐츠를 확보했고 사람들은 새로운 악플을 달 수 있게 됐다. 송민호는 가장 좋은 음원 성적으로 어차피 우승하지 않아도 쇼를 통해 가장 성공한 한 명이 됐다. 방송심의위원회는 벌금을 걷었다. 그렇게 모두가 미션을 통과하고 후원사의 매장에서 마음껏 쇼핑하는 음악가들의 표정처럼 행복한 쇼가 탄생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프로그램으로 행복하지 않은 이로 여기에 출연하지 않은 음악가와 평론가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

‘piki’라 적힌 우주복을 입은 우주인이 벽을 부수며 ‘우주의 얕은 재미’를 이야기한 순간. 피키캐스트는 본래 페이스북 페이지였다. ‘큐레이션’이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서 퍼온 자료를 짧은 동영상과 페이스북에서 슬라이드로 보기 편리하게 재가공해 올렸고 사람들은 ‘좋아요’와 ‘공유’로 이에 화답했다. 그런데 얼마 후 페이스북 정책 위반으로 페이지가 삭제됐다. 억울함을 호소하던 피키캐스트는 결국 자체 앱을 제작했고 투자를 받아 광고를 집행했다. ‘우주의 얕은 재미’의 탄생이다. 우주의 얕은 재미는 모바일 환경과 함께 탄생했다. 사람들은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4인치에서 5.5인치의 화면으로 우주의 모든 콘텐츠를 소비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가장 적합한 건 텍스트가 길지 않고 쉽게 다음 장으로 넘길 수 있는 얕은 재미다. 이제 우리는 수영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건 무려 우주의 얕은 무엇이고 여기에 적합한 행동은 잠깐 발을 담갔다 빼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유승민 씨가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증세를 이야기한 순간. 미국에서 서비스 중인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스포티파이에서 오바마를 검색하면 가장 인기 있는 곡으로 ‘Yes We Can – 01 08 2008’이 뜬다. 2008년 대선 때 오바마가 했던 연설이다. 아직 정부에서는 “통일은 대박 01 05 2014” 같은 건 서비스하고 있지 않다. 한국에 이런 서비스가 생긴다면 유승민의 “증세 있는 복지 04 08 2015”를 듣고 싶다. 이 연설은 복지를 위해서는 증세가 필요하고 이 부담을 지는 건 모두의 몫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정확히는 당연한 수식이다. 겨우 1-1=0과 같은 걸 이야기하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유승민이 원내대표가 사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직 누구도 수학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이사는 예전에도 음식 방송에 출연했었다. 지역의 산지를 돌며 요리도 하는 프로그램을 본 기억이 있다. 올해의 백종원은 달랐다. 인상이며 말투부터 달리 느껴졌다. 여유롭고 코믹하고 친근해서 순간, 내가 딴 사람을 보고 있나 했다. “식당은 분위기가 70퍼센트이다.” 백종원의 말이다. 오랜 외식업 경험으로 터득한 그의 논리다. 식당 음식의 맛은 음식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방송도 다르지 않다. 시청률은 제작진 혹은 출연진의 진정성 따위에 이끌리지 않는다. 식당이건 방송이건, 대중이 소비하려는 것은 이미지일 뿐이다.

목포대학교 함경식 교수는 천일염이 저나트륨에 미네랄이 풍부해 건강에 좋다는 ‘신화’를 창조한 분이다. 2012년 JTBC의 <미각스캔들>에서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인터뷰 마지막에 “교수님은 집에서 어떤 소금 드세요?” 하고 질문을 던졌더니 “구운 소금은 괜찮지 않겠어요?” 했다. 천일염 위생 문제를 그도 이미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올해는 SBS 다큐팀이 천일염 문제를 다루었다. 제작진이 기획한 ‘소금 토론회’에 그가 나온다더니 바로 전날 약속을 어기고 출연하지 않았다. 제작진은 대신에 전화 인터뷰 내용을 방송에 내보냈다. 질문: “교수님은 어떤 소금 드세요?” 함교수 대답: “저는 죽염 먹습니다.” ‘천일염호’ 선장은 이미 도망쳤으니 각자도생하는 일만 남았다.

메르스로 대한민국이 마비되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은 어디든 피했다. 퇴근 후에는 곧바로 다들 집으로 향했다. 주말이어도 집을 나오지 않았다. 자영업자들은 ‘멘붕’에 빠졌다. 보건당국이 메르스 예방 수칙을 내놓았는데, 여기에 “낙타유와 낙타 고기의 섭취를 피하라”도 있었다. 이어 이런 말이 돌았다. “대통령이 중동 순방 중에 낙타 고기를 먹었다.” 이후, 나는 낙타 고기를 ‘내 평생 꼭 먹어야 할 음식’ 목록에 적어 넣었다. 중동에 가서, 핏물 돋는 레어 스테이크로, 낙타유로 목을 적셔가며 먹을 것이다. 이건 뭐 목숨을 거는 일이니 한 50년 후에나 그럴 것이다. 그때는 돌아갈 모국이 많이 안전해져 있길 바라며.

 

스티븐 리비어 <텐 매거진> 편집장, 방송인

메르스 사망자 수가 9명에서 100명으로 뛰던 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날을 기억할 것 같다. 그날은 ‘누군가의 사건’이 ‘나의 문제’로 한순간에 취환되는 공포스러운 경험을 한 날이다. 기하급수적이라는 말도 모자랄만큼 급격하게 커진 피해 때문에 모두가 ‘메르스’를 검색창에 넣고 있었던 날이기도 하다.

골프 선수 배상문이 18번 홀에서 미스샷을 쳤을 때. 지난 10월 11일, 송도에서 열린 2015 프레지던츠컵 골프 대회의 마지막 홀. 배상문의 실수로 경기는 아쉽게 패배로 끝났다. 미스샷을 치던 그 순간, 배상문에게 쏠렸던 사람들의 시선은 한순간에 한탄으로 바뀌었다. 배상문이 속한 인터내셔널팀은 미국팀에게 아쉽게 패배하고 말았지만 팀 대항 골프 경기의 묘미를 제대로 보여준 순간이었다.

광화문에 포시즌스 호텔이 문을 연 순간. 오성급 호텔은 몇 개 있지만 포시즌스만큼 커다란 걸음을 내딛는 호텔은 없었던 것 같다. 아시아의 비즈니스 중심지로 도장을 꽉 찍는 기분이랄까? 세종문화회관을 지척에 두고, 경복궁과 미 대사관을 바라보는 이 호텔의 위치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류호진 KBS <1박 2일> 피디

나는 1980년에 부산 남구의 작은 단독주택에서 태어났다. 해운대와 광안리가 내려다보이는 남향의 구릉지에는 집장사들이 ‘복붙’한 집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고도 성장기에 ‘코리안드림’을 이룬 가장들에게 판 표준적인 양옥이었다. 나는 그 골목에서 태어나 서울에 올라오던 1998년까지 한 집에서 자랐고, 나의 부모님은 무려 32년간 그 집에서 생활했다. 예쁜 이야기와 애틋한 사연이 지면이 부족해 적지 못한다는 그런 이야기는 접어두고, 아무튼 그 집은 지난 9월 중순 한 무더기의 시멘트 더미로 돌아갔다. 사실 재개발해서 아파트 지으면 목돈이 생길 거라 동네가 술렁거리던 것이 내가 군 입대할 무렵이니 세월이 걸렸다면 엄청 걸렸다. 동네 사람들은 ‘조합 일’로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흘려보냈고, 다투는 사이 서로 얼굴을 안 보게 된 이웃도 많았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9월 ‘모두의 염원대로’ 그 집들은 헐렸다. 12년 전, 아파트를 새로 지으면 모두가 돈을 벌게 될 거라는 SK건설의 설명회가 있던 다음 날부터, 그곳은 이미 사람의 마음이 떠난 골목이 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집을 고치지 않았고, 화단에 나무를 심지 않았고, 녹슨 철물을 방치했다. 내가 기억하는 양지바른 골목은 몇 년 전부터 쭈글쭈글 병들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는, 차라리 헐고 아파트를 짓는 것이 맞아 보였다. 원래 헐릴만한 곳이었는지, 헐겠다는 마음이 그곳을 헐릴 법하게 만든 것인지, 선후 관계는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돈을 벌겠다는 마음만큼은 모두에게 분명했으므로, 나는 그 결정을 존중한다. 그러나 핵심은 어쨌든 주택 경기가 10년 전과는 달라졌다는 것이다. 결국 조합원 그 누구도 큰돈을 벌지는 못한 것 같다. 45평짜리 주택을 내놓으면 27평짜리 아파트에 5천만원 정도의 중도금을 더 주고 들어가게 된다. 이건 당연히 10년 전의 꿈에 부풀었던 설명회에서 얘기한 것과는 많이 다르다. 경기의 변동뿐만이 아니라, 협상 구도의 차이도 영향이 없진 않았던 것 같다. 마을이 망가져갈수록 점차 선택지가 좁아지는 조합원들에 비해 프로젝트의 폐기가 비교적 자유로운 건설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우월한 협상 지위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지독했던 10년간 이어진 다툼과 체념은, 주민들에게 이 모든 결과를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어쨌든 그러한 결과로, 나는 이제 다시는 내가 성장한 장소를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댐에 수몰된 사람만 실향민인 것이 아니다. 얼른 짓고, 얼른 부수고, 푼돈을 아끼기 위해 아무렇게나 지어 올리고, 다시 푼돈을 벌기 위해 아무렇게나 헐어버리는 동안, 우리는 수많은 실향민을 만들어낸다. 뿌리가 중요하다, 근본이 중요하다 백날 외쳐보았자, 자신이 크고 자란 마을조차 볼 수 없는 이 나라에서 무슨 그런 ‘헤리티지’를 가질 수 있겠는가 싶다. 훈민정음 헤례본을 갈가리 뜯어서 벽에 숨겼다가 집에 불이 나서 그 문서를 태워 먹는 사람이 사는 나라. 역사책을 새롭게 쓰려고 기존의 논점들을 아무렇게나 바꾸고 폐기하는 나라. 2015년은 나에게 과거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다시 한 번 환기시키는 그런 한 해였다.

 

김진아 골목 아이디어 & 필름 대표, 경리단 골목 바이닐 & 펍 사장

6월 12일, 내 생애 첫 프로작을 삼킨 순간. 가만히 손바닥을 내려다본다. 그것을 입안에 털어 넣고 삼킨다. 지금까진 탈출에 소질이 있다고,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꽤 잘 피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더는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남들은 쉰 살에나 시작할 ‘인생 이모작’까지 선행 학습했다. ‘대기업 성채’에서 ‘자영업 소굴’까지 다 경험해봤고 더 하고 싶은 것도 없다. 여든 살은 족히 된 것 같은데 고작 마흔이란 게 당혹스럽기도 했다. 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지 않을까? 한국이 싫어서? 마지막 카드가 이민이란 친구들을 보면 쓴웃음이 났다. 하지만 그린카드(미국 영주권) 없이 살아보니 거기도 다를 바 없던걸?

8월 19일, ‘후쿠오카 함바그’ 바이럴을 본 순간. 여자를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고기에 비유한 영상보다 더 충격이었던 건 이 광고를 유세윤, 정확히 말해 그가 대표로 있는 ‘광고백’이란 회사에서 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고작 1백만원을 받고. 아이디어의 수준은 1백만원짜리도 아니었지만…. 크리에이터라는 타이틀을 달고 10년 넘게 내가 해온 일의 단가가, 그 가치가 어느 개그맨에 의해 ‘1백만원’까지 떨어진 거다. 전문성 상실의 시대. 전문가에게 가야 할 일이 이제 유명인에게 간다.

9월 29일, ‘삐삐밴드’ 15년 만의 공연을 본 순간. 10월 GMF 무대를 앞두고 리허설 삼아 이뤄진 게릴라 공연이었다. 15년 만이라고 했다. 트레이닝복을 입은 이윤정이 마이크를 잡았다. 가사도 덜 외웠다며 머쓱해하더니 이내 그 독보적인 목소리로 지하 공연장을 휘어잡았다. 데뷔 때나 20년이 지난 지금이나 날 이렇게 압도하는 건 당신뿐이야. 다시 무대에 서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나와 동갑이다. 눈물이 조금 나는 것 같았다.

 

정미환 <CRAFT> 편집장

2015년 을지로 호프집 골목에 들어선 술집 ‘신도시’와 만물상 ‘우주만물’이 내겐 또 하나의 꼭지점처럼 느껴졌다. 신도시는 술과 음식을 파는 공간이지만, 그렇기에 이곳은 그 모든 움직임의 교집합이자 사교 공간 같은 느낌도 든다. 신도시에서는 지금 서울에서 가장 가고 싶은 파티와 공연이 열리고 술잔과 함께 재미있는 공모가 오간다. 우주만물은 틀림없이 도시에서 가장 이상하고 귀여운 가게다. 효창공원의 한적한 거리에 둥지를 틀었던 이곳은 지난여름 을지로의 낡은 건물 3층으로 이사했다. 창밖, 현판 대신 내건 깃발 너머로 ‘현무암 판매’라는 간판이 보인다. 도시의 심장들에는 제각각 고유한 매력과 기능이 있지만, 한동안은 이 일대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질 것 같다. 맛있는 골뱅이집도 많고.

메르스는 2015년 한국에서 가장 큰 이슈였다. 뉴스로부터 그저 고개를 돌리고 싶은 날들 사이에서 멋지고 유쾌한 일도 있었다. 디씨인사이드의 메르스 갤러리에서 시작된 ‘메갈리아의 딸들’. 메르스갤러리의 포스팅들은 ‘된장녀’부터 ‘맘충’까지 별다른 자각도 없이 일상적으로 행해졌던 여성 혐오의 표현들을 고스란히 미러링했다. 메갤 ‘언니들’의 글은 모호하거나 감춰져 있던 것들을 환하게 드러냈다.무엇보다 재미있었다. 읽을 때마다 감탄했고, 통쾌했고, 더욱 분명해진 지점들이 있었다. 메갤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어떤 필터링들이 가능했다는 것 역시 개인적 이득.

최근 <CRAFT> 2호에서 바이닐 레코드로 한 권을 가득 채웠다. 특정 주제를 비중 있게 다루는 기사들을 진행하다 보면, 평소 가볍게 스치던 것들을 다시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지난 4월, 홍대 앞의 오래된 음반 가게 퍼플레코드가 오프라인 영업을 종료했다. 음반 가게에서 CD를 사서 나온 후 조급한 마음으로 비닐 포장을 손톱으로 긁어 벗기던 기억을 공유하는 세대들은 대체로 그 소식에 서글퍼했다. 그러나 한편, 작은 바이닐 레코드 가게들은 서울 여기저기에서 느리지만 꾸준히 생기고 있다. 여름 즈음 오픈한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의 규모와 구성 역시 인상적이었다. ‘아날로그’와 ‘향수’라는 게으른 표현으로 가장 쉽게 설명되는 레코드 붐은 디지털로의 전환기에 잠깐 일어나는 버그일 뿐일까? 매거진을 진행하는 내내, 내겐 음반과 종이 잡지의 포지션이 겹쳐 보였다. 독립 잡지와 소규모 서점들 역시 레코드 숍처럼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되돌릴 길 없이, 점점 더 많은 콘텐츠가 물리적 형체를 지우고 크기를 줄이고 빠르고 가볍게 유통되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종이 위에 인쇄된 활자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떻게 변해가거나 혹은 지켜질까? 미래는 알 수 없는 일. 이런 종류의 생각들은 앞으로도 내 머리 위에 물음표들의 적란운처럼 떠 있을 것 같다. 그냥 지금은, 퍼플레코드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주얼 케이스를 집어 들고, 문을 나서자마자 부클릿을 난폭하게 열어보던 그 순간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김용언 <미스터리아> 편집장

<조선일보> 김광일 논설위원은 9월 22일 ‘늙는다는 건 罰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그는 임금 피크제 시행을 앞둔 ‘늙은 아버지’의 분노를 일종의 픽션으로 대변하면서 “그게 너와 나 사이 전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를 높은 연금에 탐욕스레 집착하는 볼썽사나운 기성세대라고 욕하는 건 참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같은 날, 이준익 감독의 영화 <사도>는 개봉 일주일 만에 관객 2백만 명을 돌파했다. 영조는 아들에게 “네가 그린 개 그림과 칼 장난을 보고 내 마음이 얼마나 무너졌는지 아니?”라고 물으며 “이것이 너와 나의 운명이다”라고 결론 내린다. 그리고 무릎 꿇고 엎드린 사도세자의 유령 모습 위로 영조가 탄 가마가 지나가며 개선가가 울려퍼진다. 아들을 짓밟고 넘어서는 아버지, 아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왕가의 정통성을 지키는 아버지, 남몰래 울면서 회한에 사로잡힌(혹은 회한에 사로잡혔을 거라고 이준익이 상상한) 아버지, 그리하여 자신의 비정하고 실리적인 결단에 대한 면죄부를 받는 아버지. 심지어 그 손자 정조는 “내가 아니었다면 아버지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토로하며 죄책감을 내면화한다. ‘아버지’의 죄가 아니라 ‘아들들’의 죄인 것이다. 김광일의 칼럼과 이준익의 <사도>는 ‘우리가 오랜 시간 정당하게 일궈낸 성과를 너희들이 노력 없이 받아먹는 것을 더 이상 참아줄 수 없다’는 중장년층의 노호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드라마 여자 주인공들은 남자 주인공 옆에서 기껏해야 조력자 역할, 그리고 그가 목숨을 다해 지키는 사랑의 대상에 만족했다. 그런데 정성주 작가의 <풍문으로 들었소>의 서봄(고아성 분)과 장혁린 작가의 <용팔이>의 한여진(김태희 분)은 그러지 않았다. 거칠게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남자 주인공이 겪는 극적 변화를 여기서는 여자 주인공이 담당했다. ‘서민’ 출신 서봄은 엄청난 자산가이자 변호사의 집안에 며느리로 들어간 뒤 “진짜 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집안에서 예쁨 받고 아버님한테 인정받는 그 이상으로”라며 “호랑이 등에 잠깐 올라탄 거야. 언제 떨어질지, 먹힐지 몰라. 호랑이를 내 뜻대로 움직여야 진짜 힘이니까”(4월 20일)라며 시아버지의 관용과 선심과 이해득실에 따라 조금씩 떨어지는 부스러기에 만족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용팔이>의 한여진은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대신 야망을 꺾어버린 태현(주원 분)을 원망했다. “나도 악어야. 악어는 원래 악어들 틈에서 사는 거야. 그리고 너 때문에 난 이제 물 밖으로 밀려난 거야.”(8월 27일) 그녀는 결국 자신을 식물인간으로 잠재웠던 의붓오빠와 회사 관계자들을 모조리 없애버리며 ‘악어들의 왕’ 자리에 올라선다. 이건 ‘파멸로 몰아넣는다’ 차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죽인다’는 뜻이다. 힘을 가진 누군가의 딸/연인/아내가 아니라 그 자신이 힘을 갖길 꿈꾸며 상승욕구를 거침없이 현실화하는 두 주인공의 모습은 확실히 달랐다.

시작은 2월 초 <그라치아> 48호 62쪽에 실린 팝 칼럼니스트 김태훈의 글이었다. 그는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IS에 가담했다는 고등학생 김 군의 심정을 이해한다면서 “현재의 페미니즘은 뭔가 이상하다. 아니, 무뇌아적인 남성들보다 더 무뇌아적이다. 남성을 공격해 현재의 위치에서 끌어내리면 그 자리를 여성이 차지할 거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이 글의 비열함과 경박한 무지에 충격을 받은 인터넷 이용자들은 트위터를 중심으로 2월 9일부터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을 시작했다. 이후 많은 일이 시작되었다. 장동민과 유세윤과 유상무, 가수 성시경, 황교안 총리,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등이 비판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2015년은 내 기억에, 1997년 이후 가장 뜨겁게 여성주의를 고민한 (그리고 그 주체가 평범한 여자들이었던) 해였다.

 

노정태 칼럼니스트

6월 5일. “@JeongtaeRoh 그리고 그 정신 나간 여자들은 여자라서 그런다 쳐도, 너는 왜 그러세요? 너는 왜 거기 끼어서 같이 욕하세요. 노정태 씨, 혹시 여자세요?” – 진중권. 동양대 교양학부 진중권 교수는 6월 한 달 내내 트위터에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운동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는데, 그중에는 나를 향한 것도 있었다. 많은 사람에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긴 트윗을 단 하나만 꼽아보자면 위에 인용한 바와 같다. 여성 혐오에 맞서는 방법론으로,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쏟아 부어온 온갖 차별적, 모욕적 표현을 같은 차원에서 되돌려주는 이른바 ‘미러링’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지 마세요’라고 설득하는 것보다, 남자들을 같은 방식으로 성적 대상화하는 것이 여성 혐오를 공론화하는 데 더욱 이득이 된다는 판단하에 이루어지는 언어 전술이다. 당연히 남자 입장에서는 불쾌할 수 있지만, 그것을 불쾌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나는 주장하고 있었는데, 저런 반발이 나온 것이다. 이후 약 한 달 동안 진중권은 이틀이 멀다 하고 논쟁을 벌였다.

7월 12일. “글쟁이이면 적어도 글 읽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이 정도이면 기레기이다. 경향신문도 딱 그 수준인 것으로 알겠다.” –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의 칼럼에 대해, 내가 <경향신문>에 ‘엄마 없는 하늘 아래’라는 글을 실어 비판하자, 그의 블로그에 올라온 반박문 중 일부다. 나는 “백종원에 대한 대중적 열광을 분석하는 그의 시선은, 자녀들에게 좋은 것만 먹이고 싶지만 시간도 없고 경제력도 부족한 엄마들의 죄책감을 부추긴다는 면에서, 무심하고 또 잔인하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황교익은 “‘맞벌이를 했다, 그들은 아이들을 제대로 먹이기 힘들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만으로 죄책감을 부추긴다고 지레짐작을 하고 있다”며, 블로그 게시물의 마지막에는 “#자유기레기인가”라는 태그까지 붙였다. 하지만 날더러 어쩌란 말인가. 그의 칼럼 마지막 문장이 다음과 같았던 것을. “‘백종원 엄마’의 음식을 두고 내가 ‘맛없다’ 했으니 화가 날 만도 할 것이다. 이럴 바에야, 진짜 엄마한테 진짜 엄마 손맛을 배우면 어떨까. 엄마도 그때 맞벌이하느라 사랑을 듬뿍 주지 못한 것에 마음 한구석이 늘 짠할 것이다.” 이 논쟁 덕분에 나는 10월 8일 여성환경연대의 초청을 받아 집밥에 대해 강연을 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9월 25일. “이번 경향의 엠마 왓슨 글에 십자포화를 퍼부은 사람 중에 노정태 씨는 내게 정식으로 사과하기 바란다. 입에 발린 사과가 아니라 진짜 사과. 그는 차별에 반대한다는 구실로 내게 진정 차별적이고 비열한 언어를 휘둘러댔다. 그의 천박한 글을 본 순간, 나는 그를 나름대로 평가했던 나 자신에 절망했다. 그의 발언은 저잣거리 무뢰한에게서도 듣기 힘들 만큼 저질의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아무런 핑계 없는 사과를 바란다. 그가 내게 사과를 안 한다면? 노정태 씨에게 아무런 불리한 일도 없다.” – 고종석. 절필을 푼 자유기고가 고종석은 <경향신문>에 ‘고종석의 편지’라는 코너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가 엠마 왓슨에게 보낸 편지가 논란이 되었다. HeForShe 운동에 대해 설명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운동이 갖는 본질적 한계 등을 지적하면서, 엠마 왓슨을 노벨평화상 수상자 말랄라 유사프자이와 비교까지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가상 편지에 대해 또 다른 가상 편지로 반박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저 분노의 트윗은 그 글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반박문을 쓰기 전 다소 불공정한 표현을 써서 그를 조롱했는데, 그걸 보고 한 말이다. 논객의 사회적 책무는 논쟁을 생산하는 것이다. 나는 그 표현에 대해 사과했으나, 내가 쓴 반박문에 대해서는 응답을 듣지 못했다. 전자로 인한 감정적 소모만큼이나 후자에 대해서도 가슴이 아프다. 내년에는 보다 좋은 논쟁들이 생겨나기를 기대한다.

 

조진서 <DBR(동아비즈니스리뷰)> 기자

3월 6일, 우버가 서울에서 영업 중단을 선언했다. 택시업계 반발에 1년도 버티지 못했다. 우버 덕분에 비싼 수입차도 실컷 타봤고(한 번은 스타크래프트 밴이 온 적도 있다) 크레딧도 3만원이나 적립해놨는데, 안타깝다. 서울 말고도 우버를 금지한 도시는 외국에도 많다. 하지만 서울처럼 정직하지 않은 이유로 우버를 금지한 도시는 없다. 서울시의 엉뚱한 변명은 대한민국 행정이 얼마나 불투명하고 예측하기 어려운지 확인시켜줬다. 아무튼 우버는 다시 돌아올 날까지 내 남은 크레딧을 고이 잘 간직해주길 바란다.

외할아버지가 독립운동에 참여했었다는 사실을 올 초에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알았다. 자랑스러운 집안일을 왜 여태껏 말해주지 않았냐는 말에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오래전 일인 데다가, 시집온 여자가 친정 자랑할 필요가 없어서”라 답했다. 이해는 간다. 한국의 복잡한 20세기 역사에서는 흑과 백을 명확히 구분하기가 어렵고, 또 얼마 안 되는 기록만으로는 개개인이 처했던 정황을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올해는 해방 70주년이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에 항상 공감하는 건 아니지만, 일제 강점기를 다룰 때만큼은 그래야 한다. 감정을 배제하고 냉정하게 사실을 기록할 필요가 있다. 솔직히 이 글을 보고도 편 가르기의 주제로 쓸 사람이 있을까 두렵다. 한국인은 항상 감정 과잉이고, 올해는 특히나 다툼이 많았다.

9월 17일,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 분당에 있는 축구장을 찾았다. KBS가 만든 축구팀 ‘청춘FC’가 K리그 팀인 성남FC와 친선 경기를 가졌다. 대부분의 관중이 홈팀 성남이 아닌 청춘FC를 더 응원하는 듯했다. 경기도 거짓말처럼 청춘FC가 이겼다. 방송을 위해 불과 몇 달 전에 만든 뜨내기 팀이지만 집중력이 좋았다. 반면 대부분이 2진급 선수들인 성남은 선수 개개인의 기량은 월등하게 좋아 보였지만 뭔가 기운이 없었다. 열심히 뛸 동기가 없어서였을까. 성남의 출전 선수 명단을 보는데 낯익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수비수 심우연. 어려서부터 엘리트 선수 코스를 거쳤고 잠깐이지만 국가대표에도 이름을 올렸던 선수다. 어느덧 서른한 살인데 팀의 주전 경쟁에서 밀려 올해는 정규 경기에 거의 나오지 못했다. 그는 이 연습 경기를 뛰면서 기분이 그리 개운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양원더스 야구단이 그랬듯, 청춘FC라는 축구팀도 프로 운동선수의 꿈을 이루지 못한 이들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준다는 뜻으로 만들었다. 뜻은 좋지만 이것도 어차피 제로섬 게임이다. 누군가 프로가 되면 다른 누군가는 밀려나야 한다. 요즘 한국인의 삶이 대체로 이런 식이다. 좋은 대학, 좋은 일자리의 수는 고정적인데 등 떠미는 사람은 많아졌다. 자꾸들 ‘미생(비정규직)’이 아닌 ‘완생(정규직)’이 되라고 재촉한다. 경쟁 사회에서 모두가 승자가 되는 건 단어의 정의상 불가능하다. 그런데 자꾸 열심히 살라고들 말한다.

 

조성준 <블룸버그> 사진기자, 드론이미지 대표

성동구청 직원이 메르스 방역복을 입고 작업하던 순간. 우주복 같은 방역복이었다. 커다란 옷에 가려져 표정을 알 수 없는 직원의 움직임을 카메라에 담았다. 외신기자들이 카메라에 담은 그 사진은 다음 날 <뉴욕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1면을 장식했다. 메르스 보도에 불이 붙던 순간이자, 메르스 사태의 심각성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순간이다.

7월 29일, 인명 구조를 위해 부산 시청이 하늘에 띄운 드론이 추락하던 순간. 부산 시청이 피서철을 맞아 해운대에 드론을 띄웠다. 올해 더욱 뜨거웠던 드론 열풍에 뜨거운 반응을 보이는 단체 중 하나가 지자체다. 부산시는 드론에 구명보트를 달고 있다가 물에 빠진 사람에게 던져주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그 드론이 3일 만에 물에 빠졌다. 조작하는 사람이 배터리 체크를 제대로 못했거나 고층 빌딩 때문에 전파 방해가 일어났을 수도 있다. 드론은 늘 추락의 위험성에 노출돼 있다. 다방면에서 활용 가능하고 영웅처럼 용맹한 일을 해낼 수 있는 게 드론이지만, 조작하는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 맥없이 빠져버리기도 하는 기계라는 걸 새삼 깨달았던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한동안 해운대 위에선 드론이 날지 못했다.

경남 합천에 있는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들의 쉼터를 방문하던 순간. 올해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 70주년이 되는 해다. 재외 피폭자들이 모여 사는 경남 합천에는 피폭 피해를 겪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쉼터를 만들어 생활하고 있다. 70주년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찾아갔고, 기획기사로 다루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그분들은 국내 언론의 관심도 크게 받지 못했다.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던 순간이다.

#1 2015년의 순간들

#3 2015년의 순간들

#4 2015년의 순간들

    에디터
    장우철, 정우성, 손기은, 유지성, 양승철
    일러스트
    김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