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나쁜 말들

2016.03.26이충걸

어렸을 땐 소리나 모음 체계를 가지고 놀았다. 탁구보다 재미있었다. 의성어로 연상되는 사물의 이름을 찾고, 애매한 낱말과 어중간한 문구의 끝을 잇고, 초성 게임을 했다. 멈추지 않는 리듬으로서 단순한 단어의 반복은 아이들의 노래에 많았다. 칠판에 쓰인 유치환의 시를 해부하고 E.E. 커밍스의 체제 전복적인 시를 읽으며 느낀 건, 음악은 낱말의 의미를 일깨우지만 소리는 더 중요한 문맥을 전달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멜로디를 만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절은 도드라진 모험과 같았다. ‘펄럭이다’ 라는 동사는 움직임뿐만 아니라 빛과 속도, 상태, 한편 감정도 포함한다. 은유적인 데다 정결함 같은, 아름다움을 수식하는 특징도 드러낸다. 의미와 운율, 품사와 지혜는 화자話者의 목소리를 만들기 위해 결합한다. 덧없이 주절거릴 땐 말의 조각들이 허공에 던져져선 무작위로 붙어버리는 것이다. 어쩔 도리도 없이.

예전에 큰 목소리와 상스러운 말씨는 금지되었다. 말은 대중적 표준을 지탱하기 위해 존재했다. 그러나 겨우 일구어낸 다정한 언어의 역사는 속절 없이 끝났다. 품위 있는 말은 수분기 없이 바짝 말라버렸고, 사전에서 찾던 즐거움이 시들해졌으며, 소리를 가지고 놀던 본질적인 능력은 사라졌다. 토론을 하는 집단적 추억은 가져본 적도 없이, 마주 보며 하는 대화란 시선의 무심한 반영에 그쳐버렸다. 그 몇십 년 동안 충격을 다루는 방법도 이해도 달라졌는데, 시대도 경험의 스케일도 변했는데, 입을 떼는 것 자체가 여전히 숙제라니.

거리에서든 작은 모니터에서든 방송에서든 내용은 더 쇼킹해졌다. 어조는 불쾌해지다 못해 수용될 수 있는 표준적 수위를 침범했다. 뒤죽 박죽된 혐오감의 세계. 나쁜 말은 국가적 구조를 지탱하는 근원이 되었다. 어떤 반발도 봉인해버리는 재빠른 냉소, 노골적이거나 비밀스러운 경멸의 신호, 극단적 배타성, 직감은커녕 척추조차 없는 요점, 잠시 실룩거리다 이빨 위로 팽팽해진 윗입술, 비하의 뉘앙스를 빼면 남는 말이 얼마 없다. 논쟁에 참여하는 대신 질문을 차단함으로써 쟁점을 끝내고, 잘못을 정당화하기 위해 타인을 비난하는 건, 그러지 않고는 삶의 앞뒷면을 표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의무 태만으로서의 독선과, 벌 받기는커녕 늘 보상받는 편협함만이 무기라서? 모욕에 무감각해진 사람들은 결국 험한 말을 순진한 엔터테인먼트로 받아들였다. 무관심으로 진정시키다가, 무지로 무뎌지다가, 신경도 안 쓰게 된 것이다.

이슈가 너무 커졌다. 도대체 상식의 범주에서 허용할 수 있는 단어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그렇게 내뱉은 단어를 자유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유롭게 말할 권리가 방어될 만한 가치를 가질까? 민주주의는 서로 잘 아는 사람들 사이의 논의에 대한 것 아닌가? 지성의 의무는 내러티브 속에서 생략된 핵심을 불러오고, 유해한 이야기가 함축하는 무엇을 점검하는 것 아닌가? 말의 문화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말은 인간이라면 터득해야 하는 기술이자 기구다. 두뇌 다음으로 중요한 신체 부위는 혀. 펜처럼 필수적인 거래 도구. 그런데 교활한 얼버무림, 공공 연설이 아닌 공공 읽기, 혼미한 이마, 자기도 모르는 관점에 재빨리 들러 붙는 맺음, 산문처럼 주제를 건축하기 위해 문장이 쌓이고 길어진 게 아니라, 그냥, 할 말이 없어서, 제대로 끝낼 줄 몰라서 늘어지는 말, 종속절을 이끌지 않는 주절, 수시로 바뀌는 인칭, 당황과 역설, 허풍과 애국주의…. 아니, 생각할 권리는 자유의 시작이고, 말은 언어의 기초이자 사고의 매개 아냐? 말이 후진 건 생각이 후져서잖아. 생각이 뭐야? 그냥 전기 같은 거야? 그래서 자꾸자꾸 들어왔다 나갔다, 꺼졌다 켜졌다 그러는 거야? 사람에게 말은 의식의 건강을 측정하는 청진기이며 체온과 몸의 관계와 같은 것. 즉, 고열은 몸의 어딘가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말하는 당사자에겐 황홀해 죽겠는 메들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듣는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걸 보고 겪고 맡는다. 생각으로부터 혁명을 이끌어낸 큰 사건들을 꾸역꾸역 떠올려보지만, 그래본들 인간이 원숭이였다는 사실을 되새길 뿐이다. 무의식에 대한 프로이트의 가정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자신에게조차 낯선 원숭이라는 것을.

사람의 평생은 타인의 말이 준 고통과 수만 가지 회상으로 쓰여진다. 일상을 지배하는 다양한 쓰레기 중 나쁜 말보다 악취나는 건 없다. 세상은 거친 말이 만든 광활한 쓰레기장. 쓰레기의 예술적인 가능성은 탐구할 만하지만 유독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의 의무는 아니다. 이젠 다른 말을 듣고 싶다. 사물의 밝은 면을 보는 말, 그동안 받아온 축복을 헤아리는 말, 시간이 치료한 상처를 보게 하는 말, 눈물 고인 웃음으로 끝나는 말, 권위에 도전하고 힘에 대항하는 말, 또 그 말을 넓게 포용하는 말. 거기에 유머와 억양, 총알 같은 관점, 관점을 더 뾰족하게 만드는 태도, 기벽이 있는 쿨함, 감정적이면서 조용한 내레이션도 곁들였음 좋겠다.

나만 그런 건 아니겠으나, 나의 진실한 감정이 무엇인지 자주 모르겠다. 언어가 만드는 철학에 관심이 많은 건 그래서인 것도 같다. 철학은 치 통을 치료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 감정이 어떤 방식으로 감응하는지 말해 주니까. 타이어 가는 법이나 닭을 죽이는 법은 몰라도 살 수 있다. 셔츠를 직접 다리거나 깨진 창문을 바꾸지 않아도 괜찮다. 나 대신 해주는 누군가에게 돈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그러니 목청의 색깔 자체가 세련되지 못하고, 높이, 리듬, 강도에 심오한 패턴이 없다 해도 내 목소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나쁜 말을 덜 들리게 하는 백색 소음이라 해도.

    에디터
    이충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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