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서울야곡

2016.06.11장우철

현인의 노래 ‘서울야곡’의 가사에는 아름다운 구절이 여럿 나온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 “네온도 꺼져가는 명동의 밤거리엔, 어느 님이 버리셨나 흩어진 꽃다발.” 어두워진 도시에서 버려진 꽃다발을 선명하도록 느끼는 감각이 서울에 있었다니. 남산에 우뚝 솟은 타워와 한강의 가로등, 어두운 골목길과 세포까지 들여다보일 것 같은 간판들. 서울의 야경은 어떤 균형을 가지고 있을까, 거기서 어떤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을까? 숭례문, 선유도, 한강공원 등 서울시와 함께 지난 십여 년간 서울의 야경을 설계해온 조명 전문가 정강화 교수에게 답을 청했다.

서울의 야경이라는 말에 즉각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면 무엇인가? 2000년부터 서울시와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야경에 관한 계획도 많이 만들었고, 서울의 밤이 다른 도시와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독특한 느낌을 살릴 수 있는지, 그런 게 과연 있을지, 십 몇 년 동안 고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야경은 이런 거라고 뚜렷하게 잡히지는 않는다. 서울은 대단히 큰 도시다. 산이 많고, 종로를 중심으로 하는 구도심이 있고, 한강이 있고, 또 강남이 있다. 그리고 그 지역들이 또다시 복잡하고 다양한 면모로 혼재되어 있다. 서울의 야경이라는 말은 어려운 얘기다.

그렇다면 서울의 야경을 설계하는 전체적인 맥락이나 방향은 무엇인가? 그릇에 뭔가를 새로 담으려면 반드시 그릇을 비워야 한다. 서울의 야경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곧 뭔가를 정리하고 덜어내는 일이 되었다. 빛이라는 게, 빛을 내는 쪽과 받는 쪽 사이에 어떤 이해 관계가 있는 건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서울의 야경은 그저 무질서했다. 어떤 룰이 필요했다. 디자인이나, 운치나, 예술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기에는 우선 해결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일부는 강제하고 일부는 권장하면서 어떤 안정화 과정을 거치는 것, 그 일을 10년 넘게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도시의 역사로 보면 10년은 매우 짧은 시간일 수도 있다. 그렇다. 굉장히 짧은 시간이다. 그래도 한강공원처럼 자리를 잡아가는 곳도 있다. 한강은 폭이 매우 넓어서 밤이면 강 이쪽에서 강 저쪽이 안 보인다. 그러니 중간에 시커먼 빈 공간이 생긴다. 근경, 중경, 원경으로 이어지는 시각적 체험에서 중경이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런 한강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요 몇 년 동안 한강을 중심으로 시민들의 여가활동이 부쩍 활성화된 것과 조명 설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나? 예전에 그곳을 고수부지라고 부를 때는 엄청나게 밝은 조명이 사방으로 빛을 퍼뜨리는 식이었다. 빛이 하늘로도 갔다. 방향성이 없는, 매우 무심한 빛, 범죄 예방의 빛이랄까? 게다가 홍수 피해에 대비하기 위해 굉장히 높은 기둥을 세웠다. 그럴수록 더 강한 빛을 쓸 수밖에 없었다.

마치 오징어잡이 배같이. 맞다. 그렇게 밝으면 근경이 무너진다. 근경은 뭔가 아기자기한 느낌을 지녀야 한다. 나무도 보이고 풀도 보이고 도로와 풀숲 사이의 대조가 보이고, 그림자가 보여야 하는데, 너무 빛이 강력하니까 그런 세부가 다 뭉개졌다. 지금은 그런 조명이 없다. 기둥을 낮췄고, 빛이 위로 올라가지 않도록, 눈부시지 않도록 바꿨다. 말하자면 한강공원은 예전보다 많이 어두워졌다.

조명이 너무 밝은 술집에서는 술맛이 안 나는 것과 비슷한 얘기 같다. 밤의 운치가 있어야 하는데 예전엔 대낮보다 더 밝았다. 그런 빛을 정리해서 기초를 만든 다음, 색감을 따뜻하게 바꿨다. 오렌지색 나트륨 램프를 할로겐 같은 따뜻한 느낌으로 바꿨다. 메탈 할라이드라는 램프인데, 색깔을 뚜렷하게 잘 드러내주는 연색성이 뛰어난 램프다. 나트륨 램프는 오렌지 빛이 너무 강해서 청색 계열을 재현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까 사물의 매력을 느끼기 굉장히 부족하다. 지금은 밤에 한강공원에서 치맥을 즐기면서 상대의 옷이나 표정을 세밀하게 볼 수 있다. 한강은 어두워졌지만 사실 더 잘 보이게 됐다.

나트륨 등 전에는 수은등이 있었다. 수은등은 눈으로 보면 백색 계열인데 빛은 녹색이라서 적색을 잘 표현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박정희 정권 때 에너지 효율적인 가치만 생각해서 나트륨 램프를 본격 도입한 것이다. 나트륨 램프가 서울시를 다 덮었다. 파리에서는 여전히 나트륨 램프를 많이 쓴다. 석조 건물의 외벽에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야경이 아름다우려면 빛만큼이나 어둠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둡게 만들어야 한다. 이제까지 서울의 도시의 조명을 해 온 사람들은 다 전기공학도였다. KS 표준 조도를 맹신하는, 그것만이 법인 줄 아는 사람들이다. 거기에 행정가들의 경험이 더해진다. 무조건 밝은 게 부유한 이미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천장에 하나 켜놓는 것이 모든 조명의 처음이자 끝이다. 구석에서 나오는 빛, 은은하게 옆으로 새는 빛이 얼마나 정서를 풍성하게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 마당이니, “좀 어둡게 해야 합니다”라고 얘기를 하면 막 화를 냈다.

같이 화를 냈나? “어두워야 합니다. 어두워야 감성적인 안정감을 느끼고, 안정감을 느껴야 길을 거닐면서 생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맨날 이런 말을 했다. 낮에 일하고 밤에 쉬어야 될 거 아니냐, 공원에 일하러 오는 건 아니잖냐, 그런 얘기. 대답은 “알겠다, 그런데 무조건 밝게 해라” 이런 식이었다.

그런 마당에 그저 야경이 아름답기를 바랐다니. 조형적인 아름다움이나 어떤 미장센, 이런 거 없다. 법대로, 해오던 대로 하는 거다. 밝음과 어둠이 적절히 섞여야 한다는 얘기를 정말 오래 해왔다. 조금씩 받아들여지고 있는 추세지만 그걸 정말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빛의 밝기뿐만 아니라 색깔 문제도 엄청 심각했다.

늘 알록달록하게 잔칫날 같은 분위기를 만든다. 무조건 환한 걸 좋아하듯이 무조건 화려한 색을 좋아한다. 자신의 치적이 어떻게든 눈에 띄길 바라니까. LED가 나오는 새빨간 색, 시퍼런 색, 이런 걸 막 쓴다. 물론 잘 쓴 컬러는 아름답다. 상징성도 생긴다. 하지만 과시적으로 보이려는 컬러는 문제가 된다.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다. 도시 공공 행정만이 아니라 개인도 상황은 비슷하다. 한번은 굉장히 비싼 주상복합아파트의 외부 조명 설계를 맡았던 적이 있다. 따뜻한 색감으로 굉장히 은은하게, 눈에 띄진 않지만 보면 볼수록 우아하게 보이는 디자인을 시도했는데, 주민 대표들이 즉각 반발했다. 이게 눈에 띄어야 광고 효과가 있어 값이 오른다는 논리다. 빛이 욕망을 반영하는 부분이 있어서 그런지, 어떤 공공재라는 인식이 별로 없다.

이번엔 N타워 쪽으로 시선을 돌려볼까? 지금 보이는 N타워 조명이 당신의 설계인가? 남산타워가 N타워로 바뀌던 시점에 설계를 맡았다. 지금은 아마 다른 프로그램으로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스스로 평가하자면 절반의 성공이라고 할까. 절반이면 50점이니까 매우 부족한 점수다. 원래는 나트륨 램프로 조명을 친 노란색 타워였다. 그나마 한 쪽은 어둡고 한 쪽은 밝아서 얼룩덜룩했다. 내가 처음 생각한 것은 평상시에는 조용한 빛을 내다가 특별한 날에 특별한 빛이나 색을 쓰는 식이었다. 광복절 같은 국경일에, 위기나 재난 상황에,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잠시 빛으로 달리 표현하는 거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특별할 때 색을 쓰는 게 아니라 평소에 그런 빛과 색을 다 쓴다. 될 수 있으면 안 보려고 한다. 남산을 걸을 때 보이는 풍경을 좋아하는데, N타워는 많이 아쉽다. N타워가 어려운 주제긴 하다. 막대기에 꼬치를 기운 것 같은 모양인데, 막대기가 너무 가늘다. 웬만큼 조명을 줘도 잘 안 보인다. 타워는 조용히 두고, 소월길 같은 아름다운 길을 잘 가꾸는 방향을 생각하는데, 쉽지 않다.

(화재 사건 전에) 숭례문 조명 설계를 하기도 했다. 그 후 궁궐이나 전각 같은 전통 건축 조명에 어떤 기준을 제시했다는 생각이다. 국보 1호라는 품격이 느껴지도록 하고 싶었다. 한옥은 조명 작업이 매우 까다롭다. 처마도 있고 기와도 있고 디테일이 매우 많다. 서양 건축은 장식이 많아도 평면에 부조되는 식이라서 부드러운 빛을 비추기만 하면 알아서 건축의 이목구비가 살아나는데, 한옥은 빛을 줘도 반사를 안 하는 데다가 곡선의 맛이 살지 않는다. 조명 방식을 새롭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전에 하나 쓰던 조명을 여덟 개로 나눠 쓰는 식으로 설계했다. 디테일을 살리기 위해서 재배치를 한 거다. 어둡고 밝은 대조를 강조하니까 입체감도 살아났다.

조선 궁궐에 야간 개장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그런 변화로부터 비롯된 것 같다. 궁궐뿐만 아니라, 익선동이나 묘동 같은 곳에 정말 좋은 골목이 많다. 좀 더 차분한 정비가 이뤄진다면 좋겠다. 한양 도성길도 그렇고. 서울엔 요소가 정말 다양하고 많다.

그런가 하면 청계천을 중심으로 을지로나 종로 뒷골목은 이례적일 만큼 어둡다. 청계천은 아예 캄캄하다. 청계천은 처음 계획부터 일부러 어둡게 한 것이다. 굉장히 신경을 써서 어둡게 했다.

나무와 풀이 자라나니까 그 효과가 더욱 드러난다. 한강공원과는 사뭇 다른 기이한 운치가 있달까? 개인적으로는 아주 멋지다고 생각하는 곳이다. 청계천 조명은 잘된 편이라고 본다.

한편 청계천 주변에 대규모 조명상가가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밤에는 개미 한 마리 없는 것처럼 어두워지지만. 개인적으로 을지로 쪽에 공간을 얻어서 뭔가 해보려고 했는데, 어쩌다 성수동의 매력에 빠져서 지금은 성수동에 몇몇 공간을 만들게 됐다. 을지로나 청계천 쪽에 대해 좋은 생각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 청계천을 어둡게 정비해놓아서 기본이 좋은 편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어딘가는 낮보다 더 밝은,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는 조명 설계도 좋지 않을까? 화양동 먹자골목 같은 곳이 그렇다. 거긴 가로등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간판들이 정말 엄청나게 밝다. 아예 간판 자유구역, 간판 해방구역쯤으로 지정을 해서 극단적인 빛을 보여주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오사카 도톰보리의 글리코사 간판은 명물이 되었다.

을지로 쪽에 재미있는 공간들이 생기고 있긴 하다. 부동산 논리와 관점이 들어가면서 기대와 다른 모습이 되어버리곤 하지만. 좀 퀴퀴하게 만들면 좋을 것 같은데 말이다. ‘신도시’ 같은 공간이 재미있다. 하나둘 개성있는 공간이 생기는 건 반갑다. 그런 곳에는 무조건적인 정비를 하지 말고, 다소 무질서한 부분을 남기는 게 핵심인데 쉽지 않은 일이다.

강남은 어떤가? 강남구 야경 계획을 여러 차례 해왔지만, 매력이나 가능성을 발견하기 힘든 곳이다. 강남의 밤길은, 걷기보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기본이다. 길에서 정서를 느낄 틈이 없이 바로 실내에서 실내로 이어진다. 공공성이 없는, 너무 비인간적인 길, 생기가 없는, 죽은 길 같다.

소위 뜬다는 동네들이 강북에 집중되는 이유와도 맥이 통하는 것 같다. 강북엔 옛길이 많다. 그래서 좀 불규칙하다. 강남은 반듯반듯하다. 그 반듯함이 풍경을 건조하게 만든다. 도시에서는 좀 냄새나는 부분이 섞여 있어야 세련된 것도 더 가치를 지니게 되는데, 강남은 너무 일관되게 크거나 높거나 새 것이다. 어쨌거나 도시의 길은 인간이 걸으면서 뭔가를 느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런데 강남은 여기서 저기를 갈 때 무조건 차를 타야 한다. 곳곳이 무대가 될 뿐, 길이 되지 못한다.

시대와 세대가 달라졌다는 생각도 든다. 창밖으로 별을 보며 자란 사람과 스마트폰으로 별을 구분하며 자란 사람은 당연히 차이가 있을 것이고, 도시의 야경을 느끼는 것도 응당 다르지 않을까? 나도 용인이 고향이고, 대학생이 되어서야 서울로 왔다. 서울은 원래 서울에 살던 사람보다 서울로 온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 도시다. 그리고 그들의 주거 형태는 서울의 오래된 동네가 아니라 근교의 아파트이기 쉽다. 즉, 사람이 사는 동네가 아니라 잠시 갔다가 오는 곳이 되는 셈이다.

어둠을 느끼는 감각 또한 차이가 클 것 같다. 사람은 빛을 통해서 정보를 받아들인다. 낮에 활동하면서 받아들인 정보가 뇌에 쌓이고, 밤에는 눈으로 더 받아들이는 대신 쌓인 데이터를 어떤 식으로든 정리하게 된다. 그렇게 안정감을 찾는다. 근데 요즘은 낮에도 밤에도 너무 많은 빛에 노출된다. 정서적 흥분 상태가 매우 길게 유지되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굉장히 자극적인 빛이다. 정서적으로 안정이 안 되는 상태에서 바로 잠으로 이어진다. 한강의 야경에 중경이 없다고 했듯이 빛의 경험에서도 중간이 사라져버렸다. 어릴 때를 떠올려보면 ‘어둑어둑해질 때’라는 시간이 있었다. 더 놀지, 그만 놀고 집으로 들어갈지 결정하게 되는 시간이다. 바로 그런 중간 영역이 필요한데, 이 도시에서는 점점 그 영역이 사라진다. 모든 게 ‘온’과 ‘오프’뿐이다. 아파트의 조명을 떠올려보라.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조명이 있다. 아주 단조롭고 아주 밝게 동일한 패턴이 반복된다. 말하자면 사무실 같다. 사무실은 일을 가장 능률적으로 할 수 있게 만드는 닭장 같은 곳이다. 그런데 집에서도 내내 사무실의 연장 같은 빛에서 지낸다.

도시인의 삶에는 반드시 어둠을 만끽하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그렇다. 온과 오프만 있는 삶에서 어떤 중간을 만들어주는 게 도시 조명의 공공적인 역할이라고 본다. 밤에 산책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것이다. 밤에 유심히 보면, 정말 많은 사람이 걷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 운동장에서 걷고, 동네 길에서 걷고, 천변에서 걷고, 언덕길로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걷고 있다. 정서적인 갈구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도시 생활에서는 산책이, 특히 밤산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러 갈래의 골목길들, 자기만 아는 길, 우연히 마주치는 것들, 같은 듯 매일 달라지는 것들을 어둑어둑한 조도 속에서 겪는 시간이 필요하다.

좀 더 풍요롭게 빛을 즐기려는 개인의 노력이라면 어떤 게 있을까? 방에 조명을 달 때, 천장에 무조건 큰 조명 하나를 켜는 대신 간접적인 조명을 여러 개 설치하고 그것의 위치를 옮기기도 하면서 스스로 빛을 제어해보는 게 좋다. 우리는 사무실이든 집이든 그냥 주는 대로 받는 빛에 너무 익숙하다. 개인이 감성적으로 뭔가를 추구할 수 있는 빛이 매우 부족하다. 내 조명을 내가 산다는 생각이 거의 없는 편이지 않나? 조명은 으레 천장에 달려 있는 것으로 여기는 생각을 바꿔보면 좋겠다.

서울의 야경은, 점점 어떻게 될까? 다행인 것이, 서울은 복잡하긴 하지만 아직 도시가 어두운 편이다. 도시는 일단 밝아지고 나면 돌이키기가 매우 어렵다. 서울의 야경 계획을 하면서 가장 많이 한 얘기가 “어둡게 해야 해요”였다. 어둠을 유지하고 지키는 것이야말로 디자인의 요소다. 다행히 서울은 아직 어둡다. 조금씩, 점점 더 좋아질 거라고 본다. 한강공원 같은 예가 있듯이 사람들이 좋은 빛에 대한 경험이 다양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무들이 자라는 것도 도시의 큰 재산이다. 바람이 불고 나무가 움직이면 가로등 불빛이 산란하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든다. 그건 조명 디자이너보다 훨씬 큰 역할이다.

    에디터
    장우철
    포토그래퍼
    체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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