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래퍼가 전하는 복음 1장 1절

2017.03.22GQ

제이지보다 역동적이고 드레이크보다 다정하며 카니예보다 친숙하다. 찬스 더 래퍼는 레이블의 지원 없이 독립적으로 힙합의 새 시대를 열고 있다.

재킷은 몽클레어, 티셔츠는 리바이스 빈티지 클로딩, 바지는 래그앤본 스탠다드 이슈, 모자는 뉴에라.

버락 오바마와 린매뉴얼 미란다에게 주목받는 스물세 살 래퍼, 비욘세의 ‘조카’, 르브론 제임스의 지원군, 카니예 웨스트의 상속인. 찬스 더 래퍼를 설명하는 말이다. 지금 녹음실 안에 그 ‘래퍼’가 있고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 비트가 연신 흐르고 티브이에서는 농구 중계를 하고 있다.

음악 산업에서 찬스 더 래퍼는 늘 존재하던 인물이 아니다. 그의 복잡하고 정통적인 랩은 카니예 웨스트보다는 에미넴과 닮아 있다. 에미넴의 랩에 윙크와 핑거-건 스타일의 수다를 더해 재탄생시켰다고 할까. 찬스 더 래퍼는 노래도 종종 부른다. 그의 노래는 러그래츠와 비비킹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 고통과 희망이 공존하고 순진하지만 지혜가 서려 있다. 그는 인디펜던트 아티스트다.

소속된 레이블이 없다. 유통 계약도 마찬가지다. 그는 그의 모든 앨범과 믹스테이프를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 그의 비상은 하룻밤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젊은 나이에 시작했을 뿐이다. 그는 고등학교에서 정학을 당한 10일 동안 첫 믹스테이프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믹스테이프 < Acid Rap >은 북미에 있는 모든 레이블 경영자의 이목을 끌었다. 그 후 친구 도니 트럼펫과 < Surf >라는 프로젝트 앨범을 발표했다. 솔풀하고 혁신적인 이 앨범은 그의 작품 중 가장 과소 평가받은 것이다. 작년, 카니예 웨스트는 자신의 앨범 < The Life of Pablo >의 오프닝을 찬스 더 래퍼에게 맡겼다. 이윽고 전 세계가 그를 지켜보고 있을 때, 찬스 더 래퍼는 세 번째 믹스테이프 < Coloring Book >을 내놓았다. 이제 그는 백악관에서 놀고 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그는 마치 모험 게임의 주인공 같다. 그의 한 손에는 그가 들기엔 너무 크고 무거운 검이 들려 있고, 그가 쓰고 있는 왕관은 너무 커서 그의 눈을 가린다. 월드 투어, 빌보드 차트, 그래미어워드….

녹음실 안, 그는 담배를 태운 후 마이크로 다가가 숨을 들이켰다. 모자는 낮게 눌러쓴 채였다. “크리스마아아아스야, 크리스마아아아스라고.” 찬스 더 래퍼는 크리스마스 앨범을 만드는 중이다. 후렴을 부르며 내내 정신없이 몸을 들썩였다. 찬스 더 래퍼가 즉석에서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모습은 어린아이의 본능 같다. 느낌이 오면 바로 실행했고 느낌이 안 오면 바로 버렸다. 이런 그에게 레이블과 계약하고 누군가에게 음악의 권리를 양도하는 건 영 느낌이 안 오는 일이었다. 한편 활기 있고 희망차며 말쑥한 음악은 그에게 언제나 옳았다. 또 합창을 가미한 노래는 때때로 다른 기분을 선사했지만 모자를 쓰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수많은 노래가 정밀한 프로듀싱을 거쳐 쏟아지는 이 음악 산업 속에서 그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창작자다. 심지어 이름조차도 본능적이다. ‘찬스, 더 래퍼’라니.

고등학교 때 늘 모자를 압수당했다. 나는 모자를 쓰는 게 일종의 반란이나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재킷은 루이 비통, 후드는 찬스 더 래퍼, 바지는 구찌, 부츠는 레드 윙 헤리티지, 모자는 뉴에라.

이름이 재미있다. 찬스 더 래퍼라. 그 세대의 농담 같은 것인가. 당신은 그래미어워드 7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이름이 재능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다. 바꿀 생각은 없나?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아빠도 “네 이름을 찬스 더 아티스트로 바꿀 필요가 있어”라고 한다. 어릴 적 함께 놀던 저스틴이 생각난다. 저스틴은 모범생에다 똑똑하고 말도 잘하는 친구였다. 당시 아빠 친구들이 “너는 커서 뭐가 될래?”라고 물어봤을 때 저스틴은 이렇게 대답했다. “생체공학 전문가요.” 걘 그때 일곱 살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 질문이 왔을 때, 내 대답은 바로 래퍼였다. 나는 어릴 적 카니예 웨스트가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가장 뛰어난 시인이자 가장 옷을 잘 입는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나에게 래퍼란 그런 존재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래퍼란 단어에 대해 나처럼 느끼길 바랐다. 래퍼란 단어는 나에게 ‘블랙’이란 단어와 거의 같은 말이다. 누군가 내 노래를 듣고 “젠장, 찬스 더 래퍼의 음악은 내 기대와 달라”라고 한다면 불명예스러울 것 같다. ‘뮤지션’이나 ‘아티스트’, 혹은 ‘레코딩 아티스트’나 ‘보컬리스트’로 날 소개해야 하는 상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래퍼다! 그리고 래퍼란 단어는 사람들을 이렇게 놀라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오, 당신이 래퍼라구요? 그럼 당신은 대통령하고도 알겠네요?” 래퍼란 단어는 이렇게 대우받아야 한다.

모자는 왜 쓰는 건가? 고등학교 때 늘 모자를 쓰고 다녔다. 그리고 거의 매번 압수당했다. 어마어마한 개수였다. 학년이 끝날 때면 학교에서는 압수한 모자를 돌려줬다. 난 박스째로 돌려받았다. 그래서 나는 모자를 쓰는 게, 일종의 반란이나 저항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내가 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몇 가지 안 하는 일이 있다. 채소를 먹지 않는 것이 그중 하나다. 난 채소를 먹지 않는다. 채소를 싫어한다. 햄버거 속의 상추만 먹는다.

이제 당신의 ‘3’ 모자가 여기저기서 보인다. 이유는 단순하다. < Coloring Book >이 세 번째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그때 난 믹스테이프 타이틀을 무엇으로 정해야 할지, 또 타이틀의 타이포그래피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원래는 < The Magnificent Coloring Book >이 타이틀이었다. 하지만 글자가 너무 많아 모자에 어떻게 새겨도 형편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냥 숫자 3을 새기기로 했다. 그 후 숫자 3이 세 번째 믹스테이프, 성삼위일체, 그리고 3명으로 이루어진 나의 가족(나, 아내, 딸)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합리화했다.

아이를 더 낳고 싶나? 당장은 아니다. 지금은 딸에게 좋은 아빠가 되어줄 시기다. 시카고에서의 삶, 그리고 얼굴이 알려진 사람으로서 나쁜 평판을 조심해야 하는 건 여러모로 쉽지 않다. 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나이를 먹고 싶을 뿐이다.

지금까지 여성을 위해 한 가장 로맨틱한 일은 무엇인가? 좋은 질문이다. 고등학교 때 여자친구를 위해 페이스북에 시를 써서 올린 적이 있다. 그 일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영원히 고통받았다. 부디 그 시가 지금은 지워졌길 바란다. 확인해야겠다.

그 시의 하이라이트를 소개해준다면? 반대도 좋고. 시에 그녀의 이름을 넣은 것이 최악이었다. 보통 이런건 비밀스럽게 해야 하지 않나. 하지만 그때는 노래나 시에 누군가의 이름을 넣는 것이 형편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지금쯤 어딘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을 것이다. “있잖아, 예전에 찬스 더 래퍼가 나한테 시를 써서 주곤 했어.” 나한테 왜 이러나. 그녀는 지금 분명 잘나가고 있을 것이다. 내가 써준 시들이 전부 효력을 발휘했을 테니까. 걔가 쿨하긴 했지.

셀럽으로서의 삶에 단점이 있다면? 나는 뮤지션과 셀럽은 서로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셀럽이란, 만약 내가 프로즌 요구르트 가게에 간다면, 계산원이 날 알아보겠지. “오 마이 갓! 찬스 더 래퍼 맞죠?” 하지만 옆에 있는 직원은 “난 누군지 모르겠는데” 할거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날 몰랐던 그녀도 결국은 나에게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곤 사진을 찍은 후 날 모른단 사실을 한 번 더 강조하겠지. 자, 그녀의 오늘은 셀럽을 만나서 특별해졌다. 난 이런 게 정말 싫다. 또 셀럽이라서 옳고 모범적인 행동을 은근히 강요받는 것도 싫다.

카디건은 버버리, 티셔츠는 아메리칸 어패럴, 바지는 탑맨, 모자는 뉴에라.

혹시 당신의 가치관에 카니예의 행동이 영향을 끼쳤나? 카니예의 배짱이나 자신감을 가지고 싶다. 모두가 “카니예는 얼간이야!”라고 말할 때 나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니, 카니예는 진실을 말했을 뿐이야.” 사실 카니예는 공적인 자리보다 사적인 자리에서 더 심한 말을 많이 하는 편이다. 사람들은 더 심한 말이 있다는 사실을 놀라워하겠지만. 그에게도 최소한의 필터는 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거나 사탕발림을 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람들을 크게 웃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음악은 별개의 문제일 수 있지만 사적으로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왜냐하면 나에게 카니예 같은 말썽꾼 기질이 있다는 걸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맞다. 소속된 레이블도 없이 그래미어워드 7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는 건 확실히 큰 말썽이다. 카니예 덕분이다. 하지만 나의 성격, 기질, 사교성, 사회성 등은 모두 아빠로부터 배웠다.

그래미어워드는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그래미는 음악 산업에서 매우 중요하다. 또 뮤지션이 그래미에서 수상하는 건 배우가 오스카상을 받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래미상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그 뮤지션이 재능이 없는 건 아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작년까지 오스카상을 못 받았지만 그의 연기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지 않나. 나 역시 그래미어워드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이미 승리했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디스 랩을 하는 모습은 쉽게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목적이 없으면 가사를 쓰지 않는다. 단순히 누군가가 나에 대한 말을 했다고, 당장 받아치는 노래를 만드는 내 모습은 쉽게 상상할 수 없다.

목걸이를 산 적이 있나? 래퍼들이 거는 것? 전혀. 값비싼 보석 같은 건 하나도 없다. 그건 내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가난했던 적은? 많다. 나는 자주 빈털터리였다. 맞는 일을 했다면, 반드시 보상이 돌아올 것이라고 늘 믿는다. 고등학교 때부터 내가 하는 일은 늘 그런 식이었다. ‘인스트루멘탈리티’라는 힙합 듀오로 활동한 적이 있는데, 그때 시디를 다 공짜로 나눠줬다. 그리고 그건 10배로 나에게 돌아왔다. 또 ‘소셜 익스페리먼트 투어’도 기억난다. 투어를 위해 계좌에 있는 돈을 전부 꺼냈다. 하지만 투어 2주 후에 돈이 들어와 모두 나눠 가졌다.

가장 비싸게 주고 산 물건이 있다면? 차랑 집 빼고. L.A.에서 시카고로 이사 왔을 때 한동안 가졌던 습관이 있다. 랄프 로렌 제품 중에서 가장 비싼 물건을 사는 것이었다. 그때 난 폴로에 깊이 빠졌었다. 3~4천 달러 하는 메리노 울 스웨터나 캐시미어 스웨터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셀럽으로서 겪는 일에 대해서 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하나? 난 가족 중 가장 걱정을 많이 끼치는 존재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엄마는 날 돕고 보호해줬다. 나는 아직도 아빠에게 조언을 구한다. 난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좋은 사람’이란 말이 때론 변변찮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좋은 사람은, 그러니까 내 경험으로는, 결국엔 좋은 사람이 늘 이긴다. 이게 내가 트럼프 시대를 두려워하지 않는….

어떻게 트럼프 시대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나? ‘Make America Great Again’ 같은 구호가 사람들에게 꼭 나쁜 영향만 끼치진 않을 것이다. 만약 백인 중산층 사이에서 소외되거나 과소 평가 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더 강해지라고! 약할수록 더 당하는 법이니까. 나는 지금 감성에 호소하는 게 아니다. 다만 현실의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늘 깨어 있어야겠군. 맞다. 사람들은 아이들이 더 많은 지식과 통찰을 갖길 원한다. 트럼프 시대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가 당신의 아이들을 위해 음악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희망과 통찰을 담아 음악을 만든다. 그런데 당신은 무엇이 두려운 건가.

    에디터
    글 / 마크 앤서니 그린(Mark Anthony Green)
    포토그래퍼
    ERIC RAY DAVIDSON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