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한 여행가이자 차분한 관찰자인 강신재는 연천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부르는 소리에 이미 많은 것이 별처럼 흘러가는 ‘하동’이나 ‘남해’의 품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길어 올릴 수 없는 텅 빈 글자 ‘연천’이어도 상관없지만, 그 지명에 붙어버린 어떤 치우친 마음으로부터는 멀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군대’와 ‘민물매운탕’ 두 단어에 너른 연천 땅을 통째로 구겨 넣으려는 무심한 억지나, 보고 싶은 것만 볼거리라고 믿는 눈들의 ‘연천은 볼 것 없는 동네’라는 편견 같은 것으로부터.
나는 강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연천을 감싸고 흐르는 임진강, 한탄강은 반드시 뭔가를 얘기해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하지만 연천 사람들에게 강을 묻고 다니면서 믿음은 의문으로 바뀌었다. 누군가는 북한군의 잠재적 육로가 되어버린 언 강을 떠올리며 그 얼음의 강도를 시험하던 장갑차와 탱크를 말했고, 다른 누군가는 강이 녹으며 갈라지는 소리를 아느냐 물으며 짐승의 울음처럼 기괴하고도 거대한 울림을 돌이켰다. 강가의 진흙을 타고 놀며 즐겁던 유년기의 추억이 물비늘처럼 반짝이다가도, 군인이 강에서 노는 소년을 끌어내기 위해 석벽에 쏘던 총소리에 몸서리치며 회상은 끝나곤 했다. 수면 아래 까맣던 잉어를 맨손으로 잡아내던 어부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그 마지막은 결국 차마 팔 수 없어 제 밥상에 올리고 말던 잔뼈 투성이 잡어로 돌아가고 말았다.
왜 이리도 처연한 기억뿐일까. 남도의 어미로 상징되는 섬진강의 품을 이 두 강에서 떠올리는 사람은 왜 만나지 못할까. 강과 군대가 섞인 이 도시의 이야기는 어떤 주제로 정리해야 가지런한 결론을 얻을 수 있을까. 연천을 다니던 걸음은 그렇게 물음을 넘는 걸음이었고, 나는 불 꺼진 터널의 전기 스위치를 찾는 마음으로 환하고 넉넉한 무엇에 가까워지기 위해 스스로를 재촉하곤 했다.
하지만 연천의 삶에 들어가는 길은 어려웠고, 디딜수록 어두워졌다. 여느 지역에서 그러했듯 이곳과 당신을 일상처럼 물었건만, 돌아오는 것은 결례를 범하지 않을 수위의 답과 눈빛뿐이었다. 외지인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해버린 이야기가 온갖 데로 뻗치다 온갖 것을 건드리고 마는 헐렁한 마음 따윈 없었다. “몇 년째 살긴, 나면서부터 살았지. 여기 연천이란 동네는 말이야…”로 장대한 서사를 읊는 토박이 어르신도 만나기 힘들었다. 다잡고 앉아 묻고 물은 다음에야 연천 생활 어느 길목의 이야기를 못 이긴 척 꺼내주는 이들뿐이었다. 한결같이 삶의 전반부를 뭉텅 베어낸 이야기를.
모든 것이 닫힌 것 같다는 느낌은 문화를 들춰도 마찬가지였다. 그 땅에선 그 흔한 마을 신앙이나 생활 풍속 하나 찾기 힘들었다. 강 문화권의 산물인 뱃놀이나 무사고와 풍어를 기원하는 고사나 굿조차도 희미했고, 하다못해 어느 지역에서건 꼭 한 명은 살고 있을 것 같은 전통문화 지킴이 장인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연천의 무형문화재 목록은 전국 어디서도 본 적 없을 정도로 얄팍했다. 한마디로 사람을 타고 이어지는 문화랄 게 무에 가까운 곳이었다.
모든 이유는 단절의 역사에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의 격전지였던 임진강 유역은 전쟁통에 폐허가 됐고, 휴전을 합의한 후에도 비무장지대나 민간인 통제 구역으로 묶여 한동안 출입이 제한됐다. 이후 마을 재건을 위해 몇몇 토박이와 전국에서 모여든 이주민이 10여 년 만에 정착했지만, 상실을 겪은 땅은 그저 불안하기만 했다. 낯설고도 험한 땅에 올라탄 구성원들은 삶과 사람을 마주하는 마음을 잊었다. 그들에게 살아있는 건 황무지를 옥답으로 개간해야 하는 당위뿐. 그래서 문화가 사라지는 것도 순간이었을 것이다. 배곯던 시절 부쳐 먹을 땅을 기대하고 모여든 외지인에게 연천 땅의 본디 유전자를 기억해달라는 것은 과한 욕심이었을 테니.
정착이 안정된 이후의 삶도 다를 것이 없었다. 개발 제한이라는 접경지역의 한계를 진 연천은 주저앉기만 하다 지금껏 낙후의 딱지를 떼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무엇이 배제되어야 살 수 있는 공간은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밖에 수가 없었을까. 우연히 들어선 ‘신망리新望里’라는 마을이 꼭 그랬다. 그곳에서 나는 연천의 여러 마음들을 보았다.
신망리는 전쟁 후 미군이 만든 ‘피난민 정착촌’이라 했다. 사람들은 그 여섯 글자를 잊고 산 지 오래지만, 그 마을의 길은 과거를 지나야 나아갈 수 있는 길이었다. 그곳에서 한 낡은 흙집을 만났다. 미군이 마을에 지은 구호주택 100호 중 남아 있는 한 채. “미 공병단에선 기본 골조만 세워주고 나머지는 다 우리가 했지. 묵은 땅이라 나무가 없으니 들에 가서 대가 쭉쭉 올라가는 쑥 비어다 엮어서 흙벽을 발랐어. 모래고 돌이고 우리가 직접 져다 날랐지. 대광리, 신탄리까지 군인 차 타고 가서 타버린 집 찾아선 구들장을 캤어. 돌은 동막리에서 집어오구…. 고생이구 뭐구 재미있었지.”
내 집의 온기를 위해 전쟁통에 불탄 남의 집을 뒤지는 마음, 그래서 결국 구들장을 들쳐 메고 나오는 걸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무너진 삶을 몸으로 일으키던 며칠을 ‘재미’로 기억하는 그의 이후 생은 어떻게 펼쳐졌을까. 마을 사람들의 짐작할 수 없는 이야기는 길 건너 다방거리에서도 이어졌다. 방치된 낡은 술집 건물엔 전쟁 직후 고철을 팔아 한탕 하던 이들의 깃털 같은 부가 지나가는 듯했다. 철조망을 따고 철주를 뽑는 완력만으로 거두던 부, 하늘의 깊숙한 움직임과 땅이 보내는 느린 이야기를 읽지 않아도 떨어지던 부. 하지만 내내 농사밖에 모르고 산 할아버지가 그 누군가의 부를 돌이키는 말은 뜻밖이었다. “그래, 누구든 남한테 사정하지 않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곳이었지. 신망리 이름 그대로 어려운 사람들이 새 희망을 가지고 살러 온 곳이 여기였다고.”
놀랍도록 중심을 잃지 않는 이야기는 그 할아버지만의 것이 아니었다. 한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고 양쪽을 두루 오가며 살피는, 그래서 어쩌면 끝내 깊숙이 들어가진 못할 이야기는 역사가 쥐어준 것이었다. 태어난 지 백일 만에 신망리로 들어와 이제 환갑을 맞았다는 한 중년은 이런 얘기를 했다. “연천 땅은 38이북에 있어서 해방 후엔 북한 통치를 받았고, 휴전 후엔 남한 통치를 받았잖아요. 그 시절을 겪은 아버지가 대여섯 살 먹은 저를 불러 앉혀서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밤에 인민군이 우리 군인옷 입고 마을로 내려와서 인민군 어디 갔냐고 물어본대요. 입이 빠른 사람은 인민군 나쁜 새끼들 이 말이 먼저 나가요. 그럼 죽는 거죠. 그 얘길 하면서 저한테 당부하시는 거예요. 이런 시절에는 가장 좋은 게 뭐든 모른다고 하는 거라고요. 본 적이 없다, 모른다….”
그래서 ‘오늘’이란 상자 안에서 안전할 수 있었던 그들이었지만, 시간은 이제 그들이 어찌할 수 없는 곳으로 흐르고 있다. 연천역 앞 오래된 슈퍼에서 만난 두 할아버지는 그 끝에 다다라 있는 듯했다. 소주 한 병을 상 위에 올리고 안개 같은 오늘을 치르는 그들. 이야기는 오로지 늙음과 죽음에 수렴할 뿐이다. “교동이가 죽었잖아. 거기 갔다 오는 길이야”, “교동이가 죽었어?”, “너랑 같은 파평 윤 씨가 모르다니 야단났네”, “뭐 누구나 죽을 껀데”, “그래도 산 놈은 죽은 놈 배웅을 해야지”, “고담에 우리 차례네.” 그 틈에서 머뭇대다 ‘찾아와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벗’의 소중함 운운했던 것은 잘못이었다. 할아버지는 내 말을 받자마자 되물었다. “살아 있으니까 오는 거지 죽으면 오겠어?”
그것이 연천의 끝이었다면 이곳을 며칠쯤 애달파하다 잊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튿날 한 지질학자와 연천의 돌을 찾아다니면서 나는 들었다. 콜로라도강이 약 1,700만 년 동안 깎아 만든 그랜드캐니언의 암석 종류도 따지고 보면 서너 가지가 전부지만, 연천에는 서른 가지가 넘는 암석이 흩어져 있다고. 다양한 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땅의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뜻이며, 겪어온 오래된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든지 보여주는 것이 암석이라고. 나는 19억 년 전의 돌을 매만지다가 곧 7억 5천만 년 전의 돌에 올라서면서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는 듯한 땅에 이미 있었던 너무나 많은 것을.
연천의 시간을 길고도 아득하게 펼친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 시간의 점이 되기로 한다. 그러자 문득 오늘의 연천을 함께해온 작은 생명들이 떠오른다. 목련이 필 때면 어김없이 임진강에 나타난다는 물고기 두우쟁이는 지금쯤 어디를 오르고 있을까. 성질 급하기로 소문난 녀석은 목련의 빛깔을 과연 알긴 알 텐가. 매년 철원 직탕폭포까지 수십 킬로미터를 오르내리느라 가을이면 다리가 닳아 반들댄다는 참게는 오늘 어느 바위틈에서 쉬어가려나. 고놈들은 제 몸을 닳아 없애는 강을 무엇으로 기억할까. 받을 수 없는 답인 줄 알면서도 나는 자꾸만 묻고 묻는다. 물음 아래 그들의 마음과 나의 마음을 나란히 놓아보기도 한다. 우리는 알지 못할 어떤 돌 위의 하나의 무늬, 하나의 점으로 언젠가 함께 돌아갈 것들이니까.
선거철마다 등장하는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다. 고향과 여행지, 이제 막 다다른 곳과 언젠가 떠나온 곳, 잘 아는 동네와 두 번 다시 찾지 않은 고장. 우리는 거기서 겪은 시간으로부터 생각과 감정과 말들을 부려놓는다. 제주를, 송파를, 안동을, 충남을, 남원과 철원과 분당을… 여행자이자 관찰자이자 고향사람이자 외지인으로서 각각 들여다본다.
- 에디터
- 글 / 강신재('시골기행', '모든 날은 인생이다' 저자)
- 포토그래퍼
- 박정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