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GQ 화보와 10권의 책

2017.06.02강지영

화보 ‘me & book & myself’ 에서 모델 김원중이 들고 있는 책은 모두 10권. 각각의 책에서 앞 구절들을 옮겼다. 첫 문장으로 책 전체를 가늠해보는 즐거운 상상을 권하고 싶어서.

박태원의 단편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중 ‘수염’ 나의 코 밑에 ‘감숭’하던 놈이 ‘깜숭’하게 되기까지에는 실로 칠 개월 간의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물론 나의 노력이며, 나의 고심이며, 나의 인내이다. 칠 개월이라 하면 우스운 것 같아도, 그것이, 실로, 반년과 또 한 달인 것을 생각해보면, 내 스스로 내 자신이 ‘참을성 많은 인물’인 것에 세 번 감탄 아니할 수 없다. 또 그러하니만치, 이 ‘깜숭’한 놈이 내게는 제법 소중한 물건이 되는 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단편집 <우리 시대에> 중 ‘스미르나 부두에서’ 이상한 것은 어떻게 그들이 매일 밤 자정에 비명을 질렀는가하는 것이었다. 나는 왜 그들이 그 시간에 그런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는지 모르겠다. 우리 배는 정박중이었고, 그들 모두는 부둣가에 있었는데 자정 무렵이면 그렇게 비명을 질러댔다. 우리는 그들에게 서치라이트를 비춰 조용히 하라고 여러 번 주의를 주었는데 그럴 때마다 꽤 효과적이었다. 우리가 서치라이트를 두세 번 그들에게 왔다갔다하자 그들은 질러대던 소리를 멈추었다.

 

<서머셋 몸 단편선> 중 ‘척척박사’ 막스 켈라다란 사람을 알기도 전에, 나는 도저히 그와 친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세계대전이 막 끝난 때여서 해상을 왕래하는 여객선들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따라서 객실 예약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들어 대행사에서 알선해 주는 방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기 혼자 객실을 독차지한다든지 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침대가 둘 있는 방을 배당받았는데도 오히려 감지덕지했을 정도다. 그러나 같은 객실에 투숙할 여행자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만 기가 꺾이고 말았다. 그 이름은, 현창을 꼭 닫아서 밤 기운 따위가 전혀 스며들지 않게 하는 그런 인간을 연상케 했다.

 

이충걸의 <어느 날 엄마에 관해 쓰기 시작했다> 내가 숨쉬는 공기 속엔 다양한 영역, 애정, 혼란이 공존한다. 그러나 세속적 의미의 나의 처지로 자랑할 건 없다. 내가 가진 것들은 어쩐지 내 자신을 아주 취약한 상태로 노출하는 행위 같으니까. 그래서 나는 타인에게서 행복을 구한다. 이를테면, 나의 기념일을 잊지 않는 친족 같은 친구들을 볼 때마다 행복은 커다란 스페어 타이어처럼 내 허리에 돌돌 말려 있는 것 같다.

 

에드거 앨런 포 소설집 <우울과 몽상> 중 ‘천일야화의 천두 번째 이야기’ 최근 일련의 동양학 연구를 하다가 나는 유럽에서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시메온 조카이데스의 작품처럼), 내가 아는 <미국 문학의 궁금한 점들>의 저자를 제외하고는 어떤 미국인에 의해서도 언급된 적이 없었던 <텔미나우 이즈잇소오어낫>을 참조할 기회가 있었다. 매우 뛰어난 이 책을 몇 장 넘겨보다가 나는 적잖이 놀랐다. 이상스럽게도 문학계는 이제까지 재상의 딸 세헤라자데의 운명에 관해서 <아라비안나이트>에 묘사되어 있는 것과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천득의 <수필> 중 ‘그 날’ 읽던 글을 멈추고 자기의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있다. 또 과거를 회상하다가 글에서 읽은 장면을 연상하는 적도 있다. 나는 <아버지의 병환>이라는 노신의 글을 읽다가 오십여 년 전 그날을 회상하였다. 엄마가 위독하시다는 전보를 받고 나는 우리 집 서사 아저씨와 같이 평양 가까이 있는 강서라는 곳으로 떠났다. 나는 차창을 내다보며 울었다. 아저씨가 나를 달래느라고 애쓰던 것이 생각난다. 울다가 더 울 수 없으면 엄마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또 울었다. 그러다가 울음이 좀 가라앉았을 때 나는 멀리 어린 송아지가 엄마소 옆에 서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왠지 그 송아지가 몹시 부러웠다. 기차는 하루 온종일 달렸다. 산이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평양은 참 먼 곳이었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올빼미의 울음> 로버트는 퇴근 시간인 5시가 지나서도 거의 1시간가량 더 일했다. 집에 서둘러 갈 일도 없었고, ‘랭글리 항공산업’의 직원들이 5시와 5시 반 사이에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 생기는 혼잡을 피할 수 있었다. 잭 닐슨도 늦게까지 일하고 있었고, 대개 사무실을 가장 늦게 나서는 나이 많은 벤슨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로버트는 자기 책상에 놓은 형광등 램프를 껐다.

 

레이먼드 카버 소설집 <풋내기들> 중 ‘춤추지 않을래?’ 부엌에서 남자는 술을 한잔 더 따르고 앞마당에 놓은 침실 가구 세트를 바라보았다. 매트리스는 시트가 벗겨져 있었고, 빨간 줄무늬 시트는 베개 한 쌍과 함께 서랍장 위에 놓여 있었다. 침대를 중심으로 그의 편에 놓인 침실용 탁자와 독서등, 그녀 편에 놓인 침실용 탁자와 독서등. 그의 편, 그녀 편. 남자는 위스키를 홀짝이며 이것을 곰곰 생각했다.

 

10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화실은 풍성한 장미향이 가득했고, 가벼운 여름 바람이 정원의 나무들 사이를 휘젓자 라일락의 짙은 향기, 혹은 분홍 꽃이 핀 가시나무의 더욱 미묘한 향내가 열어놓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 페르시아산 안장주머니처럼 생긴 긴 소파 한 구석에 누워 평소처럼 담배를 무수히 피우던 헨리 워튼 경도, 꿀처럼 달콤하고 꿀처럼 샛노랗게 만발한 금련화를 얼핏 볼 수 있었다. 금련화 가지는 활활 타오르는 듯한 아름다움의 무게를 도저히 지탱하지 못하고 떨리는 것처럼 보였고, 이따금씩 커다란 창가에 길게 늘어진 비단 커튼을 휙 스치며 날아가는 새들의 환상적인 그림자가 일종의 찰나적인 일본풍의 느낌을 풍겼다.

 

나쓰메 소세키 <춘분 지나고까지> 게이타로는 얼마 전부터 해온 별 성과도 없는 취직 활동과 그 분주함이 다소 지겨워졌다. 원래부터 튼튼하게 생겨먹은 몸이라 그저 뛰어다니는 노력이라면 그다지 힘들지 않을 거라는 건 자신도 알고 있지만, 생각한 일이 뭔가에 걸려 꼼짝 않고 버티고 있거나 또는 붙잡으려고 손을 내미는 순간 쓰윽 빠져나가는 실패가 거듭되다 보니 몸보다는 머리가 차츰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 밤에는 은근히 부아도 나고 해서 내키지도 않는 맥주를 일부러 펑펑 따서 마시며 가능한 한 스스로 호쾌한 기분을 내보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일부러 남의 옷을 빌려 입고 쾌활해지려고 하는 느낌이 가시지 않아 급기야는 하녀를 불러 주변을 치우게 했다.

 

    에디터
    강지영
    포토그래퍼
    이현석
    어시스턴트
    김찬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