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너무 시끄러운 청바지

2017.06.26GQ

십 대 때 나는 집에 굴러다니는 미국 <지큐> 펼쳐보는 걸 제일 좋아했다. 그때마다 누가 나에게 거기 실린 옷을 한 페이지에 하나씩 가지라고 말하는 상상을 했다. 입이 비좁게 도토리를 문 하늘다람쥐 같은 마음. 내 부모는 나에게 옷을 입혔지만, 그땐 세상이 얼고 천 조각도 얼어서 정말 간절한 것 말고는 여지가 없었다. 그 나이의 쇼핑은 독립된 성인으로 가는 느린 변화 속에서 맞는 갑작스러운 패배와 같았다. 청소년은 어른들이 볼 수 없는 어둡고 낯선 나라에 가봐야 하지만 누구도 그 나이의 나를 도와줄 자격이 없었다. 옷을 못 입었다기보다 옷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나의 위대한 청바지 오디세이는 그때 시작되었다. 음악 선생님은 성악 경연대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한 나를 백화점으로 데려갔다. 그가 어른의 지혜로 고른 선물은 청바지였다. 뭔가를 선택한다는 기쁨은 좀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어떤 건 허리춤이 낮거나 밑위가 너무 길거나 엉덩이에 풍만한 공간을 남겼다. 바지가 꽉 낄 때 샅이 땅기는 외설한 기분은 무엇이었을까. 몇 벌 입어보고 나니 거울 앞에 미디엄 워싱의 스트레이트진을 입은 좀 멋진 내가 보였다. 하지만 거울 앞에 서서 멋지게 한번 살아보고 싶은 세상 모든 남자의 포부는 있을리 없었다. 그는 알았을까? 나의 옷장에 앞으로 올 시대의 선물을 주었다는 것을. 세대가 바뀌는 표식. 어른 세상으로의 환영.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즉흥성의 사인. 청바지는 나를 사회의 어둠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당구나 소주보다 안전했다.

나의 두 번째 청바지는 심지어 ‘비스포크’였다. (의지만 있다면 어떤 방법이건 찾던, 한없이 순진했던 시절이었다.) 만두 같은 지금 나에게 맞춤은 하나의 공포지만 고등학교 입학 직전, 줄자를 내 허리에 두르던 아저씨는 만족시키기 어려운 고객을 앞에 두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나에게 주머니에 박을 실은 뭘로 할 건지, 좋아하는 색은 뭔지, 두 가지 색은 싫은지, 어떤 단추를 달고 싶은지, 바지를 거는 안쪽 고리 색깔은 뭐가 좋은지, 바지 상단 양쪽에 난 무늬는 수염 모양으로 할지, 안감은 어떤 색이 나은지 …를 묻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아저씨는 멍한 얼굴로 내가 따지는 소리를 백만 번 들었다. 그 후, 두려운 데님 동굴에서 천장에 걸린 옷들을 보는 순간만큼은 내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아직 몸이 민감한, 여전히 다 크지 않은 사람이었다. 집에 있는 옷은 매시간 떠내려가고, 새 옷은 늘 필요했다. 그래서 가게 안에서 도망치지 않고 꾹 버텼다. 나는 냉정한 데님 감정가가 아니었다. 내가 원한 건 입었다는 사실조차 잊게 하는 구름 같은 청바지도, 수집가나 반색할 잘 숙성된 바지도, 상세 설명서에 유명인의 서명이 새겨진 역사적인 청바지도 아니었다.

의복은 적합성의 세계에 진정한 선택권을 제공한다. 빈티지 글렌체크 타이는 위트를 말해준다. 레드 윙 부츠는 퍽이나 남자다워 뵌다. 바이커 재킷은 클래식하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래서 진은? 강한 개인의 목소리? 겁 없는 대담함? 약식 패션?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남자들끼리의 찬가? 자기 편집에 대한 틈새 없는 주장? 나에겐 훨씬 더 넓은 범위의 요청과 같았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강화된 현재에 마법을 부리는 과거의 기만 속에서 수정한 것 없는 시간을 이동해온 진의 행렬. 누구든, 예수든 체 게바라든 등소평이든 자기만의 스타일을 갖추는 게 무척 중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신념은 마음속에 묻어둔 채 너무 꾸미지 않는 것이 최고의 표현 방식임을 알았다.

나는 아저씨 청바지부터, 테이퍼드 진, 부츠컷, 배기 진, 더티 진, 블리치 진, 롤업 청바지까지 입었다. 브루클린에선 별의별 다리 모양을 설명하던 점원의 열의를 못 견뎌 하단부가 손목보다 좁은 청바지도 샀다. 분무기로 뿌린 듯 반짝이는 스키니 진만은 입지 않았다. 좁아터진 피팅룸에서 한 벌이라도 맞길 바라며 이 옷 저 옷 갈아입는 신세가 너무 처량하고, 지퍼를 올려 버튼을 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쁜 인생이 좀 안됐어서. 그리고 옷장 깊숙이 하나밖에 없는 세븐진이 보이면 쓸쓸히 웃는다.

아마 가장 깊은 두려움도 외향적인 데서 올 것이다. 패션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에는 위험이 따른다. 위험이란 방종을 뜻할 수 있기 때문에. 방종이 정확히 무엇이든 적어도 속임수를 뜻하진 않는다. 진이라는 제복 안에 프레임된 단순한 감각은 역할을 강요하는 문화의 규준을 구부린다. 그리고 그게 나라고 생각했다. 나는 새앙쥐들 틈에 선 기린처럼 눈에 띄진 않는다. 스타일을 다루는 매체에서 일하면서 자존심 상하도록 패션을 맹종하지 않는다는 게 직업의 작은 모순이긴 하지만, 어떤 면에선 그것이 옷감이 잔뜩 덮인 바다에 나뭇잎 배처럼 떠다니는 복식의 정수 아닌가.

‘유행을 타지 않는’ 것은 패션 저널리즘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지만 디자이너 진이 재등장함으로써 청바지는 요동치는 신성한 존재가 되었다. 나는 쥔 것 없는 손으로 메카가 아닌 디젤 진을 좇는 순례자가 되었다. 이때, 패션 자체가 아닌 것에 심오하고 친숙한 폭로가 개입한다. 진 디자이너들은 자주 그들 기록 보관소의 컬렉션 중 하나를 골라 재창조한다. 선별한 청바지와 똑같은 색깔과 얼룩과 구멍을 가진. 근데 뭐라고? 멀쩡한 청바지를 망가뜨린다고? 그것도 100년 전에 죽은 사람의 청바지 하고 똑같이? 사람들이 좋아하도록 청바지를 낡게 만들자면 복수의 인원이 연금술을 방불하는 의식을 치러야 한다. 화학물질을 다루고 샌딩 작업을 마친 뒤엔 작은 동물도 희생시켜야 한다. 물론 그렇게 따지면 태평양에 운명적으로 떠다니는 나일론 레인 코트와 플라스틱 신발도 패션을 다음 생애로 보낼 것이다. 폴리에틸렌 링에 질식한 해달, 빗과 나일론 실이 내장에 박힌 바다거북, 황폐해진 보라보라 해변, 마침내 지구의 죽음. 엔터테인먼트라는 인식이 지배적인 패션 산업 종사자들은 예쁜 걸 말하는 벌로 환경에 대한 감각이 없는 돼지라는 자의식과 패션이 지적· 도덕적 가치와 관련되었다는 추궁에 늘 직면하고 마는 것이다.

청바지는 버리지 못한 일기장과 같다. 청바지에 처음 구멍이 났을 때의 허탈함은 코믹하게 생생하지만 모든 옷은 결국 낡게 돼 있다. 성격과 버릇, 육체로서의 삶에 따라 낡음의 정도는 달라진다. 인생이 그런 것처럼 청바지가 낡는 과정에도 이젠 다들 천천히 익숙해져야 한다.

밴드 레드 제플린의 DVD에서 존 본햄의 연주에 입을 떡 벌리다 로버트 플랜트의 주머니 없는 청바지를 보니 참 웃기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허공에 떠 있는 지구부터 당신 얼굴까지 웃기지 않은 게 뭐란 말인가.

    에디터
    이충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