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안동으로 떠난 1박2일 가족 여행

2017.07.21GQ

칠순이 되도록 낙동강 쪽으론 가본 적이 없는, 구글 어스로 세계 여행을 하는 취미를 가진 아버지와 함께한 1박 2일간의 안동.

안동 부석사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방안퉁수로 성장한 나는 이십 대 중반 미술 이론을 공부하면서 봄, 가을에 정기적으로 문화유산답사를 다녔고 이때 비로소 여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학기간 동안 모든 답사에 개근을 했고, 그외에도 몇 차례 더 갔으니 학과 답사를 통해서 국내의 웬만한 유적지들은 둘러본 것 같다. 첫 해외여행도 학과에서 함께 간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답사였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답사를 갈 때 마다 과에서는 사전 답사, 답사자료집 제작, 숙소 및 식사 계획에 만반의 준비를 하기 때문에 주마간산이 아니라 대체로 유익한 여행이 되곤했다. 그리하여 나는 내게 그럭저럭 여행의 노하우가 축적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014년 5월, 아버지의 칠순을 기념하여 가족 여행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환갑을 그냥 넘긴 나의 아버지는 칠순에도 아무것도 하지 말라 하셨다. 사실 아버지는 이삼십 년 동안 혼자 붓글씨를 써온 아마추어 서예가인데 퇴계 이황을 몹시 좋아한다. 늘 퇴계의 문장으로 붓글씨를 써왔고, 퇴계 한시를 혼자 번역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조 방안퉁수인 아버지는 칠순 인생 동안 안동은커녕 낙동강이 흐르는 쪽으로는 가보지도 않았다. 특히 건강이 나빠진 후로는 타지역으로 일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면 그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을 동경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건강 탓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아버지는 컴퓨터를 켜고 구글 어스로 세계여행을 하는 괴상한(?) 취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칠순 1년 전, 가족들은 아버지의 생신 주간인 5월 첫째 주의 1박 2일 여행에 흔쾌히 동의했다. 해가 바뀌고 날짜가 임박하자 정작 아버지는 컨디션을 염려하며 여행을 거부 했는데 우리들의 거듭된 설득에 결국 채비를 하고 막내의 차에 올라탔다. 여섯 식구 중 안동을 가본 이가 나밖에 없으니 내가 가이드를 하고, 막내가 운전을 하기로 했다. 나는 일찌감치 하회마을의 한 고택에 숙소를 예약해뒀고, 아버지의 관심사에 따라 1순위를 서원(도산서원, 소수서원, 병산서원), 2순위를 사찰(부석사, 봉정사)로 안내하고자 계획했다. 그러나 여행은 운전수 막내의 툴툴거림으로 금방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툭하면 화를 내는 동생은 내키지 않는 여행을 따라나선 아버지가 불편한 심기를 꾹꾹 누르고 있다는 건 안중에도 없었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사후에 그의 학문과 덕을 기리고자 퇴계가 생전에 거처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을 낀 채로 지었는데 선조는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하기도 했다. 서원의 각 건물은 산의 경사면을 따라 배치되어 있는데, 입구 가까이에 소박하게 지은 도산서당이 있고, 서원의 중앙, 가장 위엄 있는 자리에 전교당이 자리 잡고 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전교당에 올라섰을 때 아버지는 한석봉의 글씨인 전교당 현판 사진부터 찍더니 마루에 걸터앉아 사진을 먼저 확인했다. 여행을 마다했던 아버지는 막상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미러리스 카메라를 들고 연신 사진을 찍고 확인을 했는데, 반면 카메라가 없었던 어머니는 아버지 옆에 걸터앉아 마냥 환하게 웃기만 했다. 나머지 가족들은 제각기 카메라나 휴대전화로 어딘가 포커스를 맞추며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같이 있으면 무뚝뚝하기가 일등인 우리 가족들은 아무도 다 같이 기념사진 한 장 찍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도산서원이 두 번째 방문이었지만 퇴계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만큼 잠자코 부모님 곁을 배회하기만 했다. 부모님이 어떻게 여행을 즐기는지 지켜보는 데 꽤 신경이 가 있었다.

도산서원을 둘러보고 건너편 낙동강 꼬부러진 물길 한가운데 서 있는 누각인 시사단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후 소수서원과 병산서원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아버지는 점점 더 여행에 열중하는 모습이었고, 운전대를 잡은 막내는 점점 더 일행에서 뒤처지기 시작했다. 녀석은 심퉁이 날 만큼 나 있었는데, 때는 바야흐로 어린이날과 석가탄신일이 연달아 있는 황금 연휴.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였고, 특히 병산서원에서의 주차난은 상상초월이었다. 심사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막내는 병산서원에는 들어와보지도 않고 주차장에서 대기했다. 가족들도 흥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아버지의 심기만 살폈다. 병산서원이 네 번째 방문이었던 나는 한국 건축 수업 시간에 병산서원의 각부 건물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걸 배웠던가. 만대루가 두보의 시에서 착안해 지은 이름이며 이 누각의 마루에 올라서서 바라보는 풍경이 장관이라는, 바람결에 흘러가는 그런 말을 해봤다가 아무도 듣지 않기에 또 잠자코 있었다.

서원 세 곳을 둘러본 우리 가족은 다시 교통 지옥을 뚫고 숙소인 하회마을의 한 고택에 당도했다. 다들 출출해진 탓에 나는 저녁 먹을 곳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하회마을에는 아무리 둘러봐도 식당이 없었다. 언제부턴가 하회 마을에서는 취사가 금지되어 모든 음식점이 마을 밖에 있는데 내가 몰랐던 거다. 이리 될 줄 몰랐던 나는 가족들을 데리고 식당이 몰려 있다는 마을 밖으로 나갔다. 주차난이 심한 만큼 도보로 이동했는데 가족들은 인내심이 바닥난 상태였다. 그날 저녁, 가족들과 뭘 먹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해는 지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어둑어둑했는데, 여섯 식구가 터벅터벅 점점이 흩어져 걸었다.

다음 날 아침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비슷한 시간에 모두 일어났다. 아침 공기가 좋아서 부모님과 나는 한 번 더 하회마을 산책을 했다.아버지의 칠순 기념 여행이라는 것을 잊은 듯 여행에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한 막내는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어 했으나 나는 우리 가족이 언제 다시 이런 여행을 하겠냐며 부석사만 더 둘러보고 가자고 성질 반 협상 반 했다. 그리하여 가게 된 부석사는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안동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반 거리인 경북 영주 봉황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봉황산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소백산국립공원에 속하는데, 미술사학자 최순우의 저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는 “백산 기슭 한낮…”으로 시작하는 부석사에 대한 글이 있다. 가족들과 봉황산 초입에 주차를 하고 한참 동안 등산하다시피 산을 오르니 부석사 당간지주와 일주문이 보였다. 이후 천왕문과 안양루를 지나면 무량수전이 나온다. 천왕문과 안양루 사이에는 길고 긴 돌계단이 이어진다. 좁고 가파른 편이다. 희한하게 가족들은 엎지락뒤치락 걸으며 땀을 뻘뻘 흘리는 이 구간에서 평화로워졌다. 산 아래에서 아침으로 산채비빔밥을 먹을 때도 가족 일행이 맞나 싶을 정도로 대화 없이 밥만 먹고 나온 이들이 안양루를 지나 무량수전이 있는 높이까지 올라서자 서로 사진도 찍어주며 화기애애해졌다. 숨을 고르고 경내를 둘러보는 가족들에게 나는 무량수전 안에도 들어가보자고 말했다. 대체로 불자가 아니면 문 앞에서 고개만 내밀어 들여다보고 마는데 나는 무량수전 내부 공간이 지닌 기운을 경외하는 편이라 가족들이 꼭 들어가봤으면 했다. 무량수전의 건축은 배흘림기둥, 주심포, 팔작지붕 등 외양도 빼어나지만, 아미타여래를 모신 법당 내부는 외부와 마찬가지로 배흘림기둥이 받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포, 서까래 등 천장의 건축 부재가 모두 노출되어 있고, 본존불인 아미타여래 위 닫집도 화려하기가 그지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뿜어내는 기운은 경외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내 기억에 어머니와 여동생만 나를 따라 법당 안으로 들어왔던 거 같은데,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기에 불공을 드리고 있는 불자들 뒤에서 조용히 내부 공간을 둘러보다가 나왔다.

가족들은 행선지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부석사 경내를 둘러보았다. 사찰을 내려오는 걸음도 한결 더 여유로워졌다. 그러나 막내와 셋째는 먼저 서울로 올라갔고, 나머지 네 식구는 둘째 차를 타고 논산으로 출발했다.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넘어오는 길은 좌우로 온통 산뿐이었는데 아버지는 그 산들을 보며 소나무들이 해충 피해를 많이 입었다고 했다. 다른 말씀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쉬움이 많았던 나는 잠깐 속리산 법주사에 들르자고 했고 부모님과 여동생은 흔쾌히 동의했다. 유학을 너무나 사랑하여 조선시대 선비라고 해야 할 판인 아버지가 사찰에 흥미를 느끼는 게 낯설었다. 부석사에서도 법당 내부에는 들어가지 않았듯이 법주사에서도 아버지는 내부로는 들어가지 않고 사찰 경내만 배회했다. 어정쩡하게 배회 하면서 눈에 들어오는 어떤 것들을 연신 카메라로 찍었다. 그리고 논산으로 돌아왔고, 나는 아버지가 찍은 여행 사진들을 아직 보지 못했다.

나는 가끔 아버지의 컴퓨터 파일들과 카메라 사진을 정리해드리곤 한다. 나뿐만 아니라 동생들도 종종 하는 일이다. 안동 여행 사진은 내가 정리하지 않았으니 동생들 중 누군가 했을 것이다. 애정을 표현하는 데 서툴고 가족의 작은 실수에도 조바심을 내는 사람들이 우리 가족이다. 가족에게 잘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늘 부모님의 생신 선물을 고민한다. 선물 하기 전에도 고민, 해놓고도 고민. 안동 여행도 잘한 것인지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내가 아버지에게 한 선물 중에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십여 년 전쯤 사드린 카메라다. 디지털카메라가 일상화될 때쯤 아버지는 우리들이 들고 다니는 카메라를 궁금해했다. 그래서 당시 우리는 큰맘 먹고 20여만원 하는 소니 디카를 사드렸다. 막상 선물을 받고는 쓸데없이 이런 거에 왜 돈을 썼냐고 했지만 그 뒤 아버지는 카메라를 늘 끼고 살았다. 아버지의 컴퓨터 하드에는 우리가 모르는 부모님의 노년의 삶이 무수히 들어 있다. 단 한 장도 지우지 말라고 하셨으니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진을 찍었을까. 언젠가 아버지가 찍은 안동 사진들을 한번 보여달라고 해야겠다.

“한국은 “전 국토가 박물관” 이라던 유홍준 교수의 말은 여전히 유효할까. ‘유치’와 ‘개발’ 플래카드 앞에서 과거는 남루할 뿐이고 ‘(문화유산)지정’ 표어가 나붙어도 실은 앞날을 계산하기 바쁜 시절. 번듯한 관광지가 아니어도, 맛집을 골라줄 순 없어도 직접 발품을 팔아 답사해 차라리 호주머니에 넣은 듯이 간직한 개별의 문화유산에 대해 말한다.”

    에디터
    글 / 이성휘(‘하이트 컬렉션’ 큐레이터)
    포토그래퍼
    이성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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