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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는 멸종할까?

2019.03.19GQ

멸종 위기에 처한 과일이 있다. 달콤한 바나나를 둘러싼 씁쓸한 싸움이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트로픽 바이오사이언스의 선임 연구원 크리스티나 피그노치가 노리치에 소재한 연구소에서 캐번디시 바나나 나무를 살펴보고 있다.

1989년 여름, 마이애미 남부에 있는 랜디 플로츠의 연구실에 소포가 하나 도착했다. 발송지는 대만이었다. 당시 5년 차 식물병리학 박사였던 플로츠는 바나나 나무에 병을 일으키는 균을 수집하고 있었다. 전 세계 바나나 농장에서 보낸 병원체를 꾸준히 봐 왔지만, 이번 건 완전히 달랐다. 플로츠는 즉시 유전자 검사를 의뢰했다. TR4 혹은 변종 파나마병라고 알려진 이 병원체의 학명은 ‘푸사리움 옥시스포룸 쿠벤세’다. 토양에 사는 곰팡이의 일종이었다. 살충제에 내성이 있었고, 바나나 나무의 수분과 영양분 흡수를 차단해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한 철 유행하고 지나갈 균이 아니었다. 플로츠는 이후 30년을 TR4 연구에 바친다.

TR4는 바나나 중에서도 단 한 종, 캐번디시에만 치명적이다. 지구상에는 캐번디시 외에도 1천 종 이상의 바나나가 있다. ‘브라질 사과바나나’는 크기가 작고, 과육이 단단하며 시큼한 맛이 난다. 말레이시아 품종인 ‘피상 아왁’은 캐번디시보다 훨씬 달콤하고 길이가 짧다. 하지만 어떤 품종도 캐번디시 바나나만큼 흔하진 않다.

캐번디시라는 품종명은 자신의 온실에서 이 바나나를 기른 영국 귀족의 이름에서 따왔다. 현재는 전 세계 바나나 생산량의 47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많고, 중요한 식량 자원이 되었다. UN 식량농업기구의 자료에 따르면 캐번디시의 연간 생산량은 약 5천만 톤이고, 이는 전 세계 바나나 수출량의 99퍼센트에 해당한다. 이 중 약 50억 개의 바나나가 영국으로 수입된다. 이처럼 많은 나라에선 바다 건너에 있는 농장에서 수확한 바나나를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다. 그러나 박리다매 구조의 바나나 산업은 수십 년간 위태롭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소비자 관점에선 안정적으로 보이죠. 다량의 바나나가 값싼 가격에 공급되니까요. 하지만 공급에 소요되는 환경적, 사회적인 비용은 결코 낮지 않아요.” 엑세터 대학교의 연구원이자 영국 정부가 지원하는 프로젝트에 참가 중인 댄 베버가 말했다.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현 체계에서 뭐 하나만 어긋나도 세계 바나나 산업 전체가 무너질 수 있어요.”

캐번디시는 가장 흔한 바나나지만 유전적 특징은 결코 흔하지 않다. 자가 번식이 불가능해 뿌리를 잘라 옮겨 심어야만 재생산할 수 있다. 하지만 유별난 번식법을 이용해 대량 재배에 성공했다. 같은 뿌리에서 나와 동일한 유전적 특징을 보이기 때문에 살충제에 대한 반응, 과일이 성숙하는 속도, 그루당 열리는 바나나 수 등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베버가 말했다. “수확을 기준으로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짐작할 수 있어요. 냉장 컨테이너에 넣는 시점부터 다시 꺼낼 때 상황을 거의 예측할 수 있죠”. 캐번디시 바나나 나무는 키가 작아 허리케인이나 태풍에도 쉽게 쓰러지지 않고 살충제 살포도 쉽다. 안정적으로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이다.

캐번디시에 역량을 집중한 결과 바나나 농업은 연 80억 달러 규모의 수출 산업이 되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열대에서 기른 과일을 킬로그램당 1파운드 이하의 가격으로 영국 슈퍼마켓에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도 구축했다. 사과를 비롯해 산지가 훨씬 가까운 과일보다도 가격이 저렴할 정도니까. 하지만 베버는 바나나가 저렴한 과일이 되어버려 위기에 직면했다고 지적한다. 값싼 캐번디시 바나나 한 가지 품종만 소비하게 된 것이다. 단일 품종의 대량 생산은 바나나 나무 한 그루당 수익률 상승을 의미한다. 바나나 생산자가 캐번디시가 아닌 다른 품종을 심을 이유가 없었다. 플로리다 대학교의 플로츠 교수는 바나나 업계가 캐번디시에 중독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캐번디시가 처음부터 인기였던 건 아니다. 1950년대 이전만 해도 유럽과 미국 소비자가 가장 선호한 품종은 캐번디시보다 부드럽고 달콤한 ‘그로 미셸’이었다. 껍질이 약해 박스에 담아 운송해야 하는 캐번디시와 달리 껍질이 단단하고 질겨서 길고 험난한 대서양 횡단길에 적합했다. 껍질이 얇고 비교적 맛이 밍밍한 캐번디시는 그로 미셸에 밀려 ‘B급’ 바나나 정도로 취급됐다. 그러나 그로 미셸 바나나의 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푸사리움 곰팡이의 일종인 TR1 때문이다. 파나마병으로도 부르는 TR1은 1890년에 처음 발견된 이후 남미 바나나 농장을 휩쓸었다. 손실액은 현재 물가 기준으로 23억 달러에 달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대형 바나나 업체들은 유일한 대체 품종인 캐번디시로 전환했다. 1960년, 세계 최대 바나나 수출 기업인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현재의 치키타)가 캐번디시로 품종을 교체했다. 유나이티드의 경쟁사인 스탠더드 프루트 컴퍼니(현재의 돌)는 이미 1947년에 같은 결정을 내린 바 있다. TR1에 완벽한 내성을 갖추고 있다는 장점은 캐번디시의 몇몇 약점을 상쇄했다. 대세는 빠르게 바뀌었고, 1965년에 이르자 그로 미셸은 시장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바나나의 대명사가 된 캐번디시는 이제 TR4에 속수무책이다. 플로츠가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TR4 감염 사례는 극소수였다. 플로츠는 1992년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서 발견된 TR4 샘플 소포를 받았다. “당시 우리가 아는 거라곤 새로운 병원체라는 사실뿐이었어요. 이 병원체가 미칠 여파가 얼마나 클지 예측할 수도 없었죠. 바나나 농장에서 온 샘플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볼수록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해질 것 같았어요.” 플로츠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2013년엔 아프리카에 있는 모잠비크에서 TR4 감염 사례가 발견됐다. 플로츠는 동남아시아의 바나나 농장에서 건너온 신발과 장비가 곰팡이를 옮겼을 거라고 추정한다. 이제 TR4는 레바논, 이스라엘, 인도, 요르단, 오만, 파키스탄, 호주까지 번졌다. 2018년에는 미얀마에서도 발견됐다. 중동과 오세아니아를 넘어 동남아 전역으로 퍼진 것이다.

TR4가 습격한 바나나 농장은 순식간에 초토화된다. 플로츠가 말했다. “농장에 독한 제초제를 뿌린 듯한 모습이라고 하더군요. 식물 한 포기도 자라지 않는 황무지가 되어버리는 거죠.” TR4가 잠복한 땅을 구분하는 방법은 없다. 길게는 수십 년씩 토양에 잠복해 있다가 뿌리를 통해 바나나 나무에 침투한다. 이후 수관과 영양관 세포로 퍼져 바나나 나무의 영양분을 모두 빼앗는다. TR4에 감염된 바나나 나무는 2~9개월 내에 속이 텅 비어 쓰러지고 만다. 새로운 나무를 심어도 소용없다. TR4가 정복한 땅에선 더 이상 바나나 나무를 재배할 수 없다. 한 가지 종이 득세한 바나나는 새롭게 등장한 균 앞에 맥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플로츠는 TR4로 인해 폐사한 캐번디시 바나나 나무의 수가 TR1로 인한 그로 미셸 바나나 나무의 폐사량을 이미 넘었다고 진단한다. 절망적인 건 미셸 사태 당시와 달리 TR4에 내성이 있는 대체종이 없다는 것이다. 해결 방안을 찾을 시간적 여유도 없다. 플로츠가 말했다. “이제 남은 건 남미 뿐이에요. TR4가 언제쯤 들이닥칠지 아무도 몰라요. 이미 왔을지도 모르고요.” 남미는 현재 세계 바나나 생산의 주축 지역이지만, 그는 시간 문제일 뿐이라고 경고한다. “중미의 한 농장에서 TR4가 발견됐어요. 농장 측에서 이를 숨겼다가 확산이 심해진 후에야 사실이 밝혀졌죠. 지구상에서 TR4에서 자유로운 곳은 없다고 봐야 돼요.”

캐번디시 바나나의 멸종 위기에 맞서 세계 최초로 TR4에 내성을 갖춘 캐번디시를 개발 중인 학자들이 있다. 갈 길은 멀다. 유전자 변형 기술을 활용해야 하기 때문에 기술적 한계는 물론이고, GMO 식품을 우려하는 정치인, 환경운동가, 소비자의 반발도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TR4가 점점 남미를 향하며 바나나 산업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유전자 조작은 인류가 선택한 단 한 품종의 바나나를 구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일지도 모른다.

험프티두는 호주의 노던 테러토리주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TR4에 내성을 지닌 캐번디시 바나나가 6년째 마을 외곽에서 자라고 있다. 퀸즈랜드 기술대학교의 제임스 데일 교수는 “TR4는 이 지역 거의 모든 바나나 생산지에 침투했어요. 대부분의 농장은 지금도 닫혀 있죠”라고 말했다. 폐사한 바나나 나무가 둘러싼 환경 속에서 세계에서 유일한 TR4 내성 캐번디시 바나나가 자라고 있다.

데일 교수의 연구실엔 TR4에도 끄떡없는 바나나를 만들 수 있는 ‘열쇠’가 8년간 숨어 있었다. 2004년, 데일은 ‘무사 아쿠미나타 말라켄시스’라는 야생 품종에서 유전자를 하나 추출했다. 캐번디시의 먼 조상 뻘인 품종이다. 작고 가느다란 과육 안에 직경 약 0.5센티미터의 단단한 씨가 60개 정도 들어 있어 식용으로 대중화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만 무사 아쿠미나타는 식용이 불가능한 대신 다른 장점이 있다. TR4에 대한 자연적인 면역력이다.

데일은 무사 아쿠미나타의 TR4 면역 유전자인 RGA2를 추출해 캐번디시 바나나에 이식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 때문에 연구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균을 노던 테러토리주에서 퀸즈랜드에 있는 연구소 온실로 옮겨도 된다는 허가를 받지 못했어요.” 호주의 엄격한 검역 규제가 문제였다. TR4에 감염된 노던 테러토리의 흙을 호주 바나나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퀸즈랜드주로 옮길 수 없었던 것이다.

호주 다윈 인근의 바나나 농장에서 TR4에 감염된 나무. 이 지역에선 확산을 막기 위해 검역이 진행되고 있다.

한 농장주의 연락을 받고서야 데일은 유전자 변형 캐번디시를 시험할 기회를 얻었다. 농장주 로버트 보사토는 TR4가 노던 테라토리주의 다윈에서 발견되기 1년 전, 40킬로미터 떨어진 험프티두 외곽에 바나나 농장을 열었다. 2000년대 후반부에 들어 보사토의 농장은 TR4에 점령당했다.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데일에게 도움을 청했다. 데일은 “해결책이 될 수 있긴 하지만, 유전자를 조작한 바나나가 실제로 면역성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아요”라고 답했다. 그래도 함께하겠느냐는 질문에 농장주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데일은 험프티두로 향했다. 실험이 시작됐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3년간의 시험 재배는 2015년에 종료됐지만, 데일은 그로부터 2년 후에야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에 결과를 발표했다. TR4 내성 유전자가 없는 바나나는 67~100퍼센트가 TR4에 감염되거나 폐사했다. 반면 RGA2를 유전자에 이식한 바나나 나무의 감염률은 30퍼센트를 밑돌았다. 감염 징후가 전혀 나타나지 않은 것도 있었다. 회충에서 이식한 TR4 내성 유전자로 DNA를 변형한 캐번디시도 비슷한 생존률을 기록했다.

1차 시험 재배에 성공한 데일은 기존 시험장보다 10배 이상 큰 토지를 험프티두에 확보해 새로운 연구를 진행 중이다. 그의 희망대로 2021년에 개량형 캐번디시가 만들어진다면 호주 최초로 유전자 변형 바나나가 시장에 등장할 것이다. 호주를 넘어 세계 최초일 수도 있다. 데일의 연구팀은 한 재단의 후원으로 비타민 A를 강화한 캐번디시 바나나를 재배하는 실험도 하고 있다. 이 바나나가 TR4 내성 바나나보다 먼저 출시될 가능성이 높다.

데일의 TR4 내성 바나나는 아직 한 가지 중요한 시험이 남았다. 신종 바나나를 먹어 본 사람이 아직 없다. 결과물의 취식을 금지하는 실험 규정 때문에 몰래 먹어본 적조차도 없다. 수확한 바나나는 으깨서 뿌리 덮개로 사용해야 했다. 결국 전 세계에서 유일한 TR4 내성 바나나는 거름 신세가 됐다.

상품화의 가장 중요한 조건인 맛을 볼 수 없는 이유는 데일의 바나나가 GMO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무사 아쿠미나타에서 추출한 유전자는 박테리아를 통해 캐번디시 유전자에 삽입됐다. 호주 유전자기술규제국은 모든 위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고, GMO 식물이 번식을 통해 비GMO 식물의 유전적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없을 때만 실험을 허가한다. 무성생식만 가능한 캐번디시 바나나에는 필요하지 않은 규정이다.

데일은 노스 퀸즈랜드의 GMO 바나나 재배 실험장에 사이클론이 상륙했을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바나나가 모두 땅에 널브러져 있었어요. 바람에 떨어진 거죠.” 다음 날 아침, 데일은 GMO 바나나의 유전 물질이 호주 전역으로 퍼졌느냐는 유전자기술규제국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뭐, 그럴 것 같기도 하고요”라고 얼버무렸다. 하지만 캐번디시 바나나는 생식 능력이 없으므로 사이클론이 퍼뜨린 GMO 바나나의 DNA가 다른 식물에 유입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어떤 GMO 작물도 바나나만큼 안전하지는 않을 거예요. 유전자가 도망칠 데가 없거든요.”

다음 시험이 성공한다면 데일은 시식 허가를 얻어 바나나를 시장에 판매할 생각이다. “규제 절차를 통과하려면 4~5년이 걸릴 텐데, 그사이 TR4는 호주 바나나 업계에서 아주 큰 문제로 떠오를 거예요.” 현재 호주는 가공하지 않은 바나나의 수입을 금지하고 있다. 훗날 GMO 바나나 수용과 수입 규제 해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것이다. 데일은 “아마 GMO 캐번디시를 택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라고 예측했다.

호주 밖으로 나오면 GMO 바나나의 전망은 더욱 어둡다. EU에서 판매 허가를 받은 GMO 작물은 64종(대부분이 면화, 옥수수, 유채, 대두, 사탕무)에 불과하며, 이마저도 대부분 사료로 사용된다. 유일하게 경작되고 있는 GMO 작물은 ‘MON 810’이다. 식물 내부에 구멍을 뚫는 나방에 저항력을 갖도록 개량한 옥수수 품종이다. 미국에서는 비교적 흔한 GMO 과일과 채소가 EU에서는 한 번도 판매된 적이 없다. 바나나 업체들도 GMO를 꺼렸다. 델몬트의 한 임원은 GMO 작물에 대한 질문을 받자 “우리는 완전히 자연적인 기업”이라고 답했다.

크리스퍼로 수정한 세포가 바나나 모종으로 자란 모습. 연구진은 모종이 TR4 내성 바나나로 성장하길 기대한다.

데일은 자신이 개발한 TR4 내성 바나나가 호주 밖으로 수출될 가능성이 낮다는 걸 알고 있다. “세상이 GMO를 받아들여야 밖으로 나갈 수 있겠죠.” 세계보건기구와 미국의학협회의 공식 입장처럼 GMO 식품의 섭취가 인체에 야기할 수 있는 영향은 아무것도 밝혀진 바 없다. 그래도 소비자와 환경단체는 오랜 시간 GMO를 반대해왔다. 중국, 러시아, 일본, 호주, 브라질, EU 등 수십 개 국가는 GMO 식품의 별도 표기를 의무화했다. 미국에서는 많은 식품 업체가 자발적으로 제품에 “GMO 작물 없음”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2016년 7월에 오바마 대통령이 GMO 식품 표기 의무화 법안에 서명했으나, 식품 업체들은 새 규제에 천천히 적응하는 모습이다. 데일은 “GMO 바나나가 세상에서 영영 환대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GMO 논쟁에서 졌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2016년, GMO 캐번디시에 대한 희망을 되살려줄 만한 소식이 찾아왔다. 미 농무부가 ‘크리스퍼’라는 신형 유전자 변형 기술을 사용해 갈변을 줄인 버섯을 허가한 것이다. 2018년 3월엔 “기존 자연 교배 방식으로 만든 품종과 구분이 불가능한 신품종을 개발하려는 기술”은 규제 대상이 아니라고 발표하며 이전 입장을 더 명확히 했다.

미 농무부의 논리는 단순하다. 식물 전체에서 작은 부분에만 영향을 끼치는 특정 유전자만 제거한다면 자연에서 발생하는 유전적 변화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정밀한 유전자 변형이 자연적 교배의 속도를 높일 뿐이라는 판단이다. 즉, 유전자 변형 바나나는 바나나일 뿐이다.

2018년 7월, 데일은 크리스퍼 기술을 통한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캐번디시의 유전자를 수정해 흰 바나나 나무를 만들어낸 것이다. 바나나 유전자에 크리스퍼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한 셈이다. 그러나 데일의 바나나 나무는 분류상으론 여전히 GMO였다. 배아줄기세포 1백만 개 정도가 포함된 용액에서 5~10퍼센트에 지나지 않는 유전자 변형 세포를 수월하게 찾기 위해 소량의 박테리아 DNA를 투입했기 때문이다. GMO라는 족쇄에서 벗어나려면 이 과정을 생략해야 한다.

TR4에 내성을 지닌 GMO 바나나를 개발한 사람은 데일이 최초일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퍼를 이용한 바나나 개량은 이제 그만의 목표가 아니다.

영국 노리치시 근교에 위치한 트로픽 바이오사이언스사의 연구실. 최고 기술 책임자인 오피르 메이르가 바나나의 미래를 바꿀 물건을 손에 들고 있었다. 회색 세포 덩어리들이 줄지어 선 샬레였다. 세포 덩어리가 몇 달 후 싹으로 자라면 실험용 관 안으로 옮겨진다. 모종 중 일부는 연구소 반대편에 있는 온실로 옮겨진다. 실험용 식물이 28.3도의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인공 성장기’에선 낮게 윙윙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메이르는 목소리를 높였다. “언젠가는 여기 있는 새싹들이 남미의 들판을 가득 채울 거예요.”

실험용 관 속의 바나나 싹은 유전적으로 바깥 세상의 캐번디시와 거의 동일하다. 유전자 몇 개가 다를 뿐이다. 이 바나나의 유전 정보는 에마뉘엘 샤르팡티에와 제니퍼 다우드나라는 두 유전학자가 2012년에 공동 발견한 ‘크리스퍼-카스9’이라는 ‘DNA 분자가위’를 통해 수정됐다. 크리스퍼-카스9을 이용하면 유기체의 DNA에서 특정 유전자를 잘라낼 수 있다. 갈변하지 않는 버섯이 미 농무부의 GMO 규제를 피한 비결이 바로 이 기술이었다. 트로픽의 CEO 길라드 게르손은 “크리스퍼는 정확하고 사용도 비교적 쉬워요. 우리 같은 작은 기업도 마음만 먹으면 바로 실행으로 옮길 수 있죠”라고 말했다. 게르손은 캘리포니아의 농업투자사인 폰티팩스 애그테크에서 일할 당시 크리스퍼가 농업의 미래를 완전히 바꿀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후 회사를 떠난 그는 2016년 7월에 트로픽을 창립했다.

게르손은 크리스퍼 기술을 “농업계의 혁명”이라고 단언한다. 수십 년간 세계 농업계는 몬센토, 신젠타, 바이엘, 듀폰 등 소수 대기업이 지배해왔다. 이들 기업은 옥수수, 대두, 면화, 유채 등 재배량이 가장 많은 작물에 GMO 연구 역량을 집중했다. “연구 한 번에 1억 달러씩 들었어요. 워낙 비용이 높다 보니 유전적 특성이 단순한 작물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이젠 이야기가 달라요. 비용이 훨씬 줄어들면서 기회가 많아졌어요.”

메이르가 들고 있던 샬레의 세포 덩어리는 일반 캐번디시와 동일한 나무에서 과일의 숙성 속도만 느려지도록 만든 것이다. 바나나는 익는 과정에서 에틸렌이라는 가스를 분출해 주변 과일의 숙성을 촉진한다. 컨테이너 속의 잘 익은 바나나 하나가 연쇄 효과를 유발해 전체 바나나의 최대 15퍼센트를 망칠 수도 있다. 유전자를 수정해 숙성 속도를 낮추면 수백만 톤의 바나나가 상품 가치를 유지할 수 있고, 수출업자들의 손해도 크게 줄어든다는 게 게르손의 생각이다. 하지만 느리게 숙성하는 바나나는 계획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트로픽은 크리스퍼 분자가위를 사용해 카페인을 함유하지 않은 커피콩과 갈변이 아주 천천히 일어나는 바나나도 개발하고 있다. 가장 궁극적인 프로젝트는 역시 TR4 내성 바나나다.

한 연구원이 거대한 플라스크로 가득 찬 상자를 들고 오자 메이르가 하나를 골랐다. 플라스크를 꽉 채운 노르스름하고 탁한 액체 속에 수천 개의 흰 세포 덩어리가 들어 있었다. 크리스퍼가 활동 중인 모습이었다. 플라스크 하나 안에는 수백만 개의 바나나 세포가 담겨 있었다. 크리스퍼는 각 세포의 DNA에서 특정 부분을 찾아내 유전자를 잘라낸다. 메이르가 말했다. “세포 하나를 골라 크리스퍼 가위로 잘라내요. 그렇게 수정된 세포를 바나나 나무로 키우는 게 최종 목표예요.”

하지만 크리스퍼에 접촉한 모든 세포가 수정되지는 않는다. 세포 수백만 개가 든 용액에서 크리스퍼가 수정한 세포만 걸러내야 한다. 이럴 때는 보통 외부 DNA를 소량 투입해 수정된 세포가 눈에 잘 보이게 한다. 하지만 트로픽은 이런 방법을 쓰지 않는다. 메이르의 말처럼 외부 DNA를 주입해 세포를 구분할 수 있게 하면 GMO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그는 수십만 개의 세포를 일일이 훑으며 소수의 수정 세포를 찾지 않아도 되는 도구를 개발 중이다. 외부 DNA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 GMO로 분류되지 않는 것이 새 기술의 핵심이다.

한편 이보진과 라한 메리스템이라는 두 이스라엘 기업은 크리스퍼를 활용해 ‘블랙 시가토카’에 맞서고 있다. 블랙 시가토카는 바나나 잎을 감염시키는 곰팡이의 일종으로, 생산량을 절반까지 떨어뜨릴 수 있다. 두 회사의 바나나 공동 재배는 3년 차에 접어들었다. 이보진과 라한 메리스템은 최종 결과물이 더 빠르고 저렴하게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GMO로 분류되지 않길 바라고 있다. 이보진의 CEO 오페르 하비브가 말했다. “사회적 거부감이 없을 거라고 기대해요. 개량에 드는 비용 또한 그리 크지 않아요.”

캐번디시 바나나 나무 옆에 선 트로픽 바이오사이언스의 CEO 길라드 게르손. 그는 먼저 크리스퍼 기술을 통해 천천히 익는 바나나를 개발한 후 TR4 내성 바나나 개발에 도전하려 한다.

그런데 2018년 7월 25일, EU 사법부의 최상급 법원이 크리스퍼 바나나의 진보에 제동을 걸었다. 2016년, 프랑스 정부는 15년 전 제정된 GMO 작물 관련 규제를 최신 유전자 조작 기술에도 적용해야 할지 유럽사법재판소에 문의했다. 유럽사법재판소는 크리스퍼로 수정한 작물이 GMO의 경작과 판매에 대한 현행 규정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데일의 개량 바나나와 크리스퍼 바나나 간의 차이가 크지 않다고 본 것이다.

영국 식물 바이오공학 연구원인 조너선 네이피어는 사법부의 판단에 크게 낙담했다. “유럽의 식물과학과 농업 연구를 생각하면 정말 실망스러워요. 농업 혁신을 위해 고민하는 사람들, 선의를 갖고 연구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고요. 앞으로 유럽에서 크리스퍼를 사용하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 같네요.”

판결 다음 날 다시 트로픽을 찾았다. 게르손은 회의실에서 판결에 대해 생각 중이었다. “더 신중한 판결을 내릴 수도 있었을 텐데요….” 점심 시간이 되자 트로픽의 연구원들은 규제 당국의 괴상한 사고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 연구원은 EU의 GMO 규정이 신품종 개발을 위해 종자를 방사능에 노출시키는 행위는 눈감아주면서 훨씬 높은 정확도로 유전자를 개량하는 크리스퍼는 규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과학적 사실 관계를 전혀 따지지 않은 판결이라며 공정성에 대한 불만이 계속 터져나왔다.

게르손의 의지는 그래도 굳건하다. 유럽은 전 세계 시장의 일부일 뿐이고, 미국은 크리스퍼에 훨씬 더 개방적이기 때문이다. 2050년이면 지구 인구의 절반은 열대 기후에서 살게 된다. 토지 면적당 식량 생산량을 절박한 심정으로 높일 수밖에 없다. 지금도 우간다, 르완다, 카메룬의 농촌 지역에서는 바나나가 1인당 하루 칼로리 섭취량의 25퍼센트를 차지한다. 미래의 일로 미뤄둘 수 없다.

트로픽의 세포 배양 전문가 산드라 라자우스카이테가 크리스퍼로 수정해 샬레에서 배양 중인 세포를 검사하고 있다.

바나나 산업은 이미 막다른 골목에 직면했다. 게르손이 지적했다. “우리는 엄청나게 싼 가격으로 바나나를 공급받는 데 익숙해졌어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유통 시스템이죠. 인류가 앞으로도 바나나를 먹으려면 현명한 해결책이 필요합니다.” 실험실에서 진화한 바나나가 싫다면 아예 바나나를 포기해야 하는 기로에 섰다. 유전자 조작 과일에 들이미는 잣대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생각해 볼때가 됐다.

노리치에 한 달 이상 비가 오지 않았다. 트로픽 연구소의 잔디가 온통 노랗게 변했다. 1962년 이래 가장 가문 6월이었다. 메이르는 바싹 마른 이파리 사이로 드문드문 난 초록색을 가리켰다. 전혀 의도하지 않은 유전적 돌연변이로 인해 물이 없을 때도 성장할 수 있게 된 식물이었다. 캐번디시 바나나엔 기대할 수 없는 행운이다. 번식을 통해 우연히 등장하는 돌연변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불임 품종’이기 때문이다. 까다로운 식물이다. 하지만 몇몇 단점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수천 종의 바나나 중에서 캐번디시를 선택했다. 과학계가 소비자와 규제 당국, 식품 산업이 모두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동안 캐번디시는 멸종에 가까워지고 있다. TR4는 현실이다. 이제는 시간문제다.

바나나의 여정
세계 최대 바나나 생산 업체인 돌은 연간 1억 5천만 상자의 바나나를 수출한다. 농장에서 슈퍼마켓까지, 바나나의 이동 경로를 추적했다.

1 수확 바나나는 수확 후 3시간 만에 박스에 담겨 항구로 운송된다.

2 상자 2016년에 돌이 생산한 바나나 1백80억 개는 한 박스에 1백25개씩 담겨 수출됐다.

3 운송 돌은 바나나 운송을 위해 컨테이너선 15척을 운용하고 있다.

4 규모 바나나를 운송하는 수출선 한 대에는 약 9천9백톤의 바나나가 실린다.

5 빈도 남미산 바나나를 실은 운송선은 연 26~52회씩 미국으로 출항한다.

6 목적지 돌에 소속된 선박은 전 세계 42개 항구에 정박하며, 바나나가 판매되는 나라는 53개국이다.

7 시간 콜롬비아 해안에서 출발해 유럽 항구에 도착하기까지 약 16일이 걸린다.

8 온도 바나나의 조기 숙성을 예방하기 위해 온도를 선선하게 유지한다.

9 숙성 바나나가 항구에 도착하면 에틸렌 가스로 숙성을 촉진시킨다.

10 측정 바나나의 숙성도는 전체가 녹색인 1부터 일부가 갈색으로 변한 7단계로 분류한다.

11 등급 상품으로 팔기 적당한 바나나는 녹색과 노란색이 뒤섞인 3~4단계다.

12 판매 바나나 농장에서 슈퍼마켓에 도착하기까지 총 10~21일이 소요된다.

    에디터
    Matt Reynolds
    포토그래퍼
    Wilson Hennessy, Dan Burn-Forti, Jeff Daniels,
    일러스트레이터
    Lucy Rog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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