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소설가 최진영의 이런 단편

2019.06.21GQ

여름이 오기 전, 네 명의 사진가와 네 명의 소설가가 이야기를 보내왔다.

놓은 마음

그날 해변에서 너는 조개껍데기를 주웠고, J는 모서리가 마모된 돌멩이를 주웠지. 각자 주운 것을 손으로 매만지며 너와 J는 천천히 해변을 걸었어. 그때 너는 스물다섯 살. 너는 네 손의 조개껍데기와 J 손의 돌멩이를 보면서 생각했어. 외로움이 조개껍데기라면 사랑은 돌멩이. 완전히 달라서 이것으로 저것을 덮을 수도 가릴 수도 없는데, 나는 어째서 매번 이것으로 저것을 어찌해보려고 애쓸까. 다른 두 개는 여기저기 널려 있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거나 보지 않는다. 줍거나 줍지 않는다. 주웠다가 다시 버린다. 간직하다가 어딘가에 넣어두고 잊는다. 그 중에서도 줍는 행위는 참으로 신기하다고 너는 생각했어. 돈도 보석도 아닌 것을 주워 주머니에 넣는 행위 말이야. 밀려오는 파도를 피하려다 너는 넘어졌지. J가 너를 줍듯 일으켜 세웠잖아. 흠뻑 젖어서 더 파래진 치마를 넌 가만히 내려다봤어.

어쩌지.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너는 괜히 울상을 지었어.
괜찮아. 말리면 돼.
J는 너를 모래사장 쪽으로, 그러니까 자기 쪽으로 살짝 끌어당기며 말했지.
금방 마를까? 네가 물었고,
물론. 여긴 햇살도 바람도 아주 넉넉하잖아.

J는 대답했어. 너는 헤어진 연인 M을 떠올렸어. 이런 상황에서 M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조심 좀 하지, 하고 말했을 거야. 너를 일으켜주려고 손을 내밀지는 않았을 거야. 너는 지금보다 더 걱정했을 거야. 젖어버린 치마를. 왜냐면, M이 싫어할 테니까. 젖은 치마를 말리는 시간과 수고를 성가셔할 테고, 일단 네가 조심성 없이 넘어졌다는 사실에 짜증 낼 테니까. 걱정하면서도 M의 눈치를 보느라 너는 울상을 짓진 않았을 거야. 괜찮은 척했을 거야. “금방 마를까?”라고 묻는 대신 “금방 마를 거야”라고 말했을 거야.

네가 힘들어하는 M의 화법이 있었지. ‘너 때문에’로 시작하는 말. 자기의 불안과 후회를 네 몫으로 떠넘기는 방식. 연애를 시작했을 때 너는 스물두 살이었고 M은 스물여섯 살이었어. 그래, 앞날을 모색해야 하는 시기였지. M은 대학원에 가겠다고 했다가 회계사 시험을 보겠다고 했다가 돈부터 벌어야겠다고 했다가 호주에 가서 이주노동자로 살겠다고 했다가 그냥 죽어버리고 싶다고 했다가…. M은 자주 이렇게 말했어. “나는 너 때문에 시험도 포기하고 취업 준비 중인데.” 처음에는 흘려들었지만 거듭될수록 견딜 수 없어졌지. 마치 네가 M의 혹 같았으니까. 너는 시험을 포기하라고 한 적도, 돈을 벌라고 보채지도 않았으니까. 어떻게 살든 당신이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대꾸하면 M은 “네가 아직 어리고 세상을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라고 신경질적으로 말했어.

너는 이해할 수 없었지. 네가 보기에 M은 자기 자신도 책임지지 못하는 것 같았고, 그게 불안할 때마다 널 탓하는 것 같았거든. 미래를 위한답시고 지금 관계에 소홀하면, 그럼 미래에는? 미래에는 미래가 없나? 이게 무슨 바보 같은 돌려막기람. M에게 사랑과 연애와 결혼은 마치 숙제 같았지. 하고 싶은 게 아니라 해야만 하는 것 말이야.

이별은 쉽지 않았어. 미련은 길게 남았고 씁쓸한 감정은 쌓여 갔지.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J의 다정한 말투와 행동 앞에서 M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짐작하는 방식으로. 너는 자주 M을 떠올렸어. 잔상이랄까, 여진이랄까, 그런 게 남았던 거지. 네 안에는 여전히 M이 살아 있었던 거야. 옅어지고 있었지만 완전히 없애버릴 순 없었던 거야. 사랑했으니까. 아꼈으니까. 행복하다 느꼈던 순간이 분명 있었으니까.

너는 그때 베이커리 숍에서 일하며 양식조리사 시험을 준비 중이었지. 졸업 뒤 구인 공고를 뒤져보다가 브로슈어를 만드는 작은 회사에 덜컥 들어가 1년 6개월 만에 그만두고 바리스타 자격증과 제과제빵 자격증을 땄잖아.(너는 퇴사 결정을 후회하게 될까 봐 걱정하고 망설였지만, 이제 와 말하자면, 정말 좋은 선택이었어.) 명확한 계획이 있었다기보다, 그래, 너 또한 불안했으니까. 사람을 티슈처럼 쓰는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경력을 쌓는 것보다는 네가 좋아하는 일을 배우고 자격증을 손에 쥐는 게 훨씬 선명한 ‘모색’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그러니 너의 1년 6개월은 헛되지 않았던 거야. 네가 무얼 좋아하고 견딜 수 없어 하는지 알게 되었으니까.

빵과 쿠키를 만드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지. 일하지 않을 때, 퇴근한 뒤에, 쉬는 날이면 복잡한 상념이 무럭무럭 부풀어 올랐어. 미래를 아주 조금만이라도 엿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했잖아. 하지만 알잖아. 미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거니까.

살아봤으니 하는 말이지만, 네 선택은 늘 옳아. 옳지 않은 선택이라도 결국 옳게 되지. 순간마다 선택은 늘어서 있었고, 넌 잘못된 선택을 조금씩 수정해서 너의 길로 만들고야 말거든. 늘 그래왔지.

성수기도 유명한 관광지도 아니어서 해변에 사람은 많지 않았어. 수영복에 얇은 셔츠만 걸치거나 핫팬츠에 크롭티를 입고서 물 장난을 치는 사람 몇몇만이 눈에 띄었지.

너는 괜찮아?
너는 J에게 물었어.
나? 내가 왜?
젖은 옷을 입은 사람 옆에 있는 거, 신경 쓰이지 않아?
봐, 여긴 초여름 해변이잖아. 젖은 옷쯤 아무것도 아니지. 그러니까 너도
마음 놔.

J는 싱긋 웃으며 말했지. 너는 J의 말을 곱씹었어. 마음을 살짝 잡고 들어 올려 몸에서 꺼내는 상상을 해봤지. 몸에서 꺼낸 마음을 윤슬이 보이는 환한 해변 어딘가에 내려놓는 장면을. 긴장하고 찌푸렸던 마음이 따뜻한 햇살과 바람 속에 서서히 평온해지다 까무룩 잠든다면. 한숨 자고 일어나 개운하게 기지개를 켠다면.

너는 J에게 이상한 고객들 이야기를 했어. 단팥빵을 찾던 중년 고객들 말이야. 저희 매장에서는 단팥빵을 팔지 않습니다, 하고 말했더니 그들은 빵집에 단팥빵이 없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 살다 살다 단팥빵 없는 빵집은 처음 본다, 그러고도 여기가 빵집이냐며 소리를 질러댔지. 소리를 지르면 단팥빵이 놀라서 튀어나올 것처럼 말이야. 그들은 불쾌한 표정으로 매장을 나서며 장사를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이상한 훈수를 뒀어. 단팥빵을 팔지 않는 빵집에 굳이 들어와서 왜 단팥빵을 팔지 않느냐고 호통치는 그들은 꼭…, M 같았고 부모님 같았고 선생님 같았고, 너는 왜 그런 사람이냐고 따지는 이 세계 같았어. 너는 끝내 죄송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 다음부터는 단팥빵을 만들겠다고도 하지 않았어. 네 얘기를 들은 J는 기분을 풀어주겠다며 호빵맨의 주제가를 흥얼거렸잖아.

단팥으로 만든 호빵맨. 다정한 친구 호빵맨. 나쁜 짓하는 건 못 참아. 너는 웃음을 터뜨리며 호빵맨을 떠올렸어.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자기 얼굴을 떼어서 나눠주는 호빵맨의 기괴하고도 직관적인 위로를. J와 그런 위로를 나누는 사이가 되면 어떨까 생각하다가 너는 급히 그 생각을 지워버렸어. 사랑하고 싶지 않았거든. 사랑하고 실망하고 헤어지는 일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지.
J와 너는 말없이 해변을 걸었어. 말이 없는데도 어색하지 않아서, 내려놓은 마음이 단잠을 자고 있어서, 그날의 해변은 더없이 아름다워서, 너는 마침내 네 딱딱한 다짐과 귀여운 타협을 하고 말았지. 사랑하지는 말고 좋아하자. 좋아하는 마음으로 헤어지지 말자.

하지만 너는 결국 J를 사랑하게 되고 J와 헤어진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과 사랑하고 이별하지. 서른다섯 살의 너는 테이블이 두 개인 베이커리 카페를 운영하게 되고 그때도 단팥빵은 만들지 않아. 서른여섯 살 겨울, 넌 소중한 친구 한 명을 잃게 된다. 이후 수면제와 술 사이에서 갈등하고 헤모글로빈 부족으로 고생할 거야. 마흔 즈음의 어느 날에는 살림을 버리고 간소한 짐만 챙겨서 제주로 간다.

그곳에서 다양한 일을 하다가 다시 테이블이 두 개뿐인 매장을 열게 돼. 사랑하지 않겠다는 다짐 없이도 사랑하지 않아. 쉰이 되기도 전에 백발이 되지만 염색하지 않고, 병이나 사고로 죽는 상상을 하다가 자살과 안락사 사이에서 갈등하기도 해.

안전한 방에서 바라보는 바깥은 아주 크고 거대해 보이지만 문을 열고 나가 그 앞에 서면 막상 그렇지만도 않더라. 발을 담글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솟구쳐 보이던 바다도 다가서면 그리 높지만은 않았어. 네 불안과 두려움이 파도를 더 부풀렸던 걸까? 높은 물살과 거센 폭풍우를 겪은 뒤보다는 잔잔하고 따뜻한 해변을 마주볼 때 오히려 용기를 얻곤 했지.

늙어서도 너는 종종 그날의 바다를 떠올린다. 호빵맨 주제가와 J를. J의 낙관적인 말을 주문처럼 중얼거리기도 해. 여긴 초여름 해변이잖아. 젖은 옷쯤 아무것도 아니지. 그러니까 마음을 놔. J의 말처럼 치마는 금세 말랐지.

깨끗한 햇살과 빛나는 바다. 아름다웠지. 눈부시고 청량했어. 고단했지. 불안했어. 세계가 통째로 네게 시비 거는 것만 같았지. 미지근하고 애매했어. 빨리 나이 들고 싶었지만 늙음은 두려웠지. 막막하고 막연한, 청춘이었나. 사랑이었나. 너는 정말 나였던가. 그 바다는 여전히 거기 있겠지. 반짝이며 언제나 거기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죽음도 덜 두렵다.

나는 그날의 너를 알지. 네 삶을 아주 잘 알아. 하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네.

    에디터
    이예지
    포토그래퍼
    김강희
    작가
    최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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