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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 편지

2019.06.28GQ

얼마 전, 오랫동안 함께 일한 친구이자 동료에게서 메일이 왔다.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전, 촬영을 앞두고 상의 겸 안부 겸 보냈던 메일을 “이것 좀 봐!” 그대로 붙여서 다시 보내왔다. 어리고 뜨겁고, 에너지가 굉장할 때라 촬영 전에 이런 메일이 여러 번 오가고, 그러도고 부족해 다시 만나서 또 얘기했다. 다른 고민 없이, 매달 촬영만 하고 싶어지는 부질없는 욕심과 함께, 세상에 이런 맥락 없는 수다라니, 웃기고 그리워서 둘 다 한참 웃었다.

어제 쇼 끝나고 잘 들어갔어요? 비가 벼락처럼 쏟아져서 모델들이 숨 쉴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날리는 게 보였어요. 아침부터 그 상태여서 다들 못 한다고 말렸는데, 기어코 하는 건 정말이지. 축축한 공기가 착 가라앉아 있던 백스테이지에서 모델들 머리를 랩으로 감던 모습이 완전히 비장해서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나왔어요. 계단 위에서는 못 봤겠지만 아래선 가슴이 철렁했어요. 너무 좋아서. 빗방울이 수천 개의 화살처럼 땅바닥에 꽂히는 것 같았거든요. 쇼는 아름다웠고 기어코 다 풀어지긴 했지만 헤어도 ‘데카당스하게’ 예뻤어요. 감기 걸리지 않았길. 4일 촬영 헤어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봤어요. 적당한 사진이 없어서 그림으로 그렸는데 이게 아메바나 퍼진 물방울이 아니고 사람 머리라는 걸 계속 생각하면서 봐줘요. 첫 컷은 우리가 늘 하는 식보다는 윗머리가 좀 선 스타일이에요. 원우에게 작은 쿠키 모양 단추가 달린 트위드 재킷과 칼라가 둥근 셔츠, 체크무늬 조끼를 입힐 건데요, 재킷을 좀 작게 준비할 거라서 어깨며 등이 팽팽하게 될 거예요. 그래서 옆머리는 아주 바짝 붙이는 게 좋겠어요. 바로 옆 페이지는 상반신 클로즈업인데, 혼자 머리를 자르다가 귀 뒤에 상처가 난 것처럼 하고 싶어요. 현욱이 뒷머리를 조금만 자르고(커팅 가위 지참!) 귀 뒤에 상처를 가짜로 만들고(적색 매니큐어를 작게 굳히는 게 좋을까요?) 잘린 머리카락을 목 주변에 부스스 떨어뜨리면(가발을 자르면 되겠죠? 쓰고 버려야 하는데 아주 싼 게 있을까요?) 생각대로 되려나. 옷은 도련님 도포 같은 분위기가 나는 셔츠를 찾고 있는데 딱 맞는 게 없어서 내일 몇 군데 더 가보려고요. 참, 언제 사대부 스타일 화보 같이 찍어요. 사대부들은 ‘엣지’의 끝이었잖아요. 갓의 각도가 약간만 틀어져도 난봉꾼 취급을 받았고, 외출하기 전에 옷 매무새 정리하는 걸 아버지한테들 배웠대요. 사대부가 남았으면 서울의 패션도 지금하고는 달랐을 거예요. 남자가 옷을 갖춰 입을 때 드는 각오랄까, 그런 게 이어졌겠죠. 그러고 보니 요즘은 각오가 지나친 남자들이 또 문제긴 하다. 각오에 찬 구두와 각오에 찬 안경과 각오에 찬 셔츠를 입고 각오에 찬 차에서 …. 그나저나 세 번째 컷에선 턱수염이 필요한데요, 가능하면 두툼한 턱수염을 만들어서 그걸 좀 다듬은 모양을 내고 싶은데 어린 모델들에겐 어색할 수도 있겠죠? 한번 해보고 다른 컷에 비해 설정이 과하면 턱수염은 잊고, 첨부 파일 3번처럼 앞머리를 내리고(더 길게 붙여도 되구요) 막 빗질을 한 모양을 만들어도 멋질 거예요. 어제 9번에서 코끼리에 관한 다큐를 했는데 봤어요? 가젤과 고라니가 옆에서 아무리 깝쳐도 풀만 씹더라고요. 작고 연약한 애들은 안 건드리는 거예요. 커다란 발로 쾅 밟으면 단번에 끝날 텐데 그걸 조용히 참더라고요. 코끼리보다 힘센 동물은 지구에 없대요. 멋있었어요. 그 ‘그레이트한’ 존재감. 게다가 식습관은 또 얼마나 초연해요. 일본 패션 디자이너들이 나오는 프로그램도 봤어요. 그 사람들은 참 일을 즐겁게 해요. 복숭아 주스 하나 놓고 일 얘기를 온종일 신나게 하니까. 좋아 죽겠어서 일을 하니 그걸 누가 당해요. 단합도 잘되고, 좋은 의견도 많이 모이고. 서로 끌어주고 힘을 주고 하는 것도 부러웠어요. 옷은 ‘사물’이지만, 옷을 만드는 것도 입는 것도 다 ‘마음’이잖아요. 그런데 내일이 수요일이고 날씨도 덥다던데 차가운 프로세코 한잔 마시면 좋겠다. 지난번에 얘기한 이중섭 사진도 가져갈게요. 스타일이 끝내줘. 저녁에 어때요? 일곱시쯤?
지영.

    에디터
    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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