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ter men

담백하게 고백하는 방법

2019.09.05GQ

사귀자는 말은 아무리 담백하고 세련되게 하려고 해도 좀 촌스럽게 느껴진다.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고백할까? 그나마 담담한 고백들로만 추렸다.

보름달 고백
어느 각도에서 봐도 동글동글한 내 얼굴형이 늘 불만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들 사이에서 별명은 주로 호빵맨, 빵떡 등이었고 어른이 되어서도 별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대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보자마자 꽉 찬 보름달 같다고, 요즘 시대라면 상상도 못할 외모 지적을 했고 나 역시 유치하게 사람 외모부터 지적하는 그를 지적하면서 어쩐지 가까워졌다. 꽤 오래 친구 사이로 지내던 어느 날, 그에게 문자가 왔다. <정월대보름에 보름달을 보고 있는데 자꾸 저기 네 얼굴이 보여. 보고싶네> 약간 텔레토비 햇님이 생각나긴 했지만, 그 문자 이후 우리는 사귀게 됐다.
김해인(파티시에)

타입 캡슐 고백
동네 수학 학원을 같이 다니다 ‘베프’가 된 그와 학창 시절 재미삼아 약속을 하나 했다. “우리 서른 세 살에 만났을 때 서로 애인 없으면 사귀자!” 그 때가 13살인가 그랬으니까 일단 서른살조차 너무 먼 미래였고, 무려 20년 뒤에는 당연히 가정을 이루고 있을 줄 알았다. 원래 초등학교 때는 서른 세살도 철부지일 수 있다는 걸 모르니까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흘러 우리는 애인 없는 상태로 서른 세 살을 맞이했다. 동네 치킨 집에서 맥주를 들이키다 문득 내가 말했다. “야, 그거 기억나? 내가 우리 서른 세 살에 서로 애인 없으면 사귀자고 했잖아. 타입 캡슐 꺼낼 때가 됐지?” 그가 얼굴이 잠시 빨개지더니 “그러자”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약속을 지키게 됐다.
김안나(UI 디자이너)

여행 예약 고백
친구의 친구여서 자연스럽게 몇 번 만나 어울리게 된 그녀와는 유독 대화가 잘 통했다. 서로의 관심사, 일, 취향 등이 잘 맞아 떨어져서 어느 순간부터는 서로 알고 있는 친구를 제외하고 우리 둘이서도 곧잘 만나게 되는 거다. 서로 퇴근 후 일상을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워질 무렵, 내가 오래전부터 계획한 유럽 여행 날짜가 다가왔다. 남들이 되도록 안 가본 곳을 가고 싶어서 꾸역꾸역 유럽 소도시들을 찾아놨는데, 그녀가 어떻게 찾았는지 관련 여행 책자를 선물하는 거다. “잘 다녀오고, 다음 여행은 나랑 같이 가자” 이 말 한마디에 나는 우리가 이제 오랫동안 함께 할 사이임을 알게 됐다.
김준수(회사원)

이유같지 않은 이유 고백
직장 동기였던 그 친구는 진하디 진한 부산 남자였다. 그 사투리를 따라하다가 부쩍 가까워졌다. 놀리다가 정든다고, 가끔 하던 연락이 매일이 되고 종종 다함께 먹던 점심이 둘만의 저녁이 되었다. 야근 및 격무에 시달리고 있던 어느 날 그 친구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간식을 사왔으니 잠깐 나오란 얘기. 근처 공원에서 먹을 것을 나눠 먹고 왠지 어색해져서 가만히 있는데 불쑥 이러는 거다.”뭔가 좀 이상하제? 얘가 왜 이러나 싶제? 자꾸 연락하고 만나러 오고.” 능청스런 말에 웃음이 나와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지는 다음 한 마디. “근데 우리 만나볼래?” 나는 더 크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장은지(브랜드 마케터)

삼세번 고백
소개팅으로 두 번 만났는데, 두번째 만남에서 어쩐지 나와 맞는 사람 같진 않단 생각이 들었다. 분명 괜찮은 사람 같긴 한데, ‘나랑 잘 통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어지기 전에 그 사람에게 말했다. “우리가 잘 맞는지 확신이 서질 않네요. 더 좋은 사람 만나세요.” 그냥 악수 한번 하고 돌아설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 사람이 단호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딱 세 번만 더 만나봐요 우리!” 이상하게 그 말 한 마디가 엄청 끌렸다. 너무 간절하게 자신을 낮추지도 않고, 적당히 자신감 있는 태도 때문이었던 것 같다. 딱 세 번만 더 만나보자고 했던 만남은 어느새 3년 째에 접어들고 있다.
조예은(카페 운영)

보호관찰 고백
유난히 잘 덜렁대는 사람이 있다. 음료수 들고 다니다가 쏟을 것 같고, 아무도 밀지 않았는데 혼자 넘어지는 사람. 그게 나다. 그 친구는 나의 이런 덜렁거림을 굉장히 싫어했다. 대체 왜 알 수 없는 멍이 그렇게 많은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이다. 한번은 계단에서 굴러 크게 다쳤는데, 마침 주말이었고, 병원에 갈 힘이 없었고, 가족들도 같이 살지 않았고, 연락되는 친구도 없었다. 그때 생각난게 바로 매일 나를 구박하는 그 친구였다. 울먹이면서 다쳐서 움직일 수 없다고 말하자 주저 없이 달려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너 자꾸 넘어지는 일 없도록 내가 보호관찰을 해야겠어.” 그게 고백이었다.
박유정(회사원)

    에디터
    글 / 서동현(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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