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 있는 술을 찾아 문을 두드렸다. 아무 데서나 팔지 않는 술, 혹은 누구에게도 팔고 싶지 않은 술 좀 보여달라고.
마티아스 와인수입사 카보드 디렉터
피에르 시가 바는 남산 아래 위치한 은밀한 아지트다. 어둑한 블라인드 곁에서 짙은 연기를 뱉으며 시가를 음미하는 사람들. 하지만 이 공간의 진가는 와인이다. 저 멀리 보이는 평범한 와인 셀러는 빙산의 일각. 같은 건물 지하에 내추럴 와인 중심의 수입사 카보드가 있다. 그렇고 그런 와인 리스트에 권태를 느낀다면 이곳의 와인 리스트가 일말의 해방감을 선사할지도. 수백 병의 내추럴 와인 가운데 아까워서 꽁꽁 감춰두고 있는 와인을 살짝 공개한다.
왼쪽부터 | Jeremie 2008 “레이블에 있는 사람은 저희 아버지예요. 동생이 그렸죠. 와인 메이커와 아버지 사이에 인연이 좀 있어요. 친한 사람들을 위해서만 따로 만드는 와인이에요. 150년이나 된 포도나무 열매로 만들어서 그런지 맛이 엄청나요. 완숙미 넘치고 파워풀하죠.” Stefano Bellotti Etoile Du Raisin 2007 “재미있는 와인이에요. 레이블을 타로 카드로 만들었는데 물질적인 세상과 액체의 세상 중간에 있다는 뜻이래요. 30일 동안 10밀리리터씩 매일 마셔보라고 권장해서 그렇게 해봤더니 신기하게도 와인이 계속 살아 있어요.” Valdonica Baciolo 2015 “한국을 위해 따로 만든 매그넘 사이즈의 와인이에요. 이 와이너리의 화이트 와인이 2016년에 와인 잡지 <디캔터> 시음회에서 1등을 차지하며 내추럴 와인 신에 화제를 불러일으켰어요. 화이트 와인도 좋지만 개인적으로 레드가 더 매혹적이에요. 여운이 참 길죠. 귀한 와인이라서 제가 다 마시고 싶어요.” Domaine Seguin-Manuel Vosne-Romanee ‘Aux Communes’ “1854년에 설립한 와이너리예요. 이들의 리스트 가운데 엘리제궁에 들어간 와인도 있어요. 부드럽게 시작해서 마지막엔 강인한 남자로 변신하는 반전 매력이 있는 와인이에요.” Montemarino 2010 “2018년 가을에 와인 메이커가 작고하셔서 남아 있던 와인을 모두 가져왔어요. 참깨 향도 나고 오렌지 껍질 같은 상큼함도 있고 뒤로 갈수록 우아해져요. 천천히 음미해보면 좋아요.”
도정한 핸드앤몰트 설립자
핸드앤몰트는 2014년 남양주에 설립한 크래프트 양조장이다. 경기도 가평에서 홉 농장을 운영하며 맥주의 가장 중요한 재료를 직접 재배하고 있다. 탄탄한 기본과 기발한 실험, 위트와 진중함처럼 상반된 가치가 브랜드를 관통한다. 올 여름 오픈한 ‘브루 랩 용산’은 창의적인 연구소이자 맥주를 가장 신선하게 즐길 수 있는 펍이다. 지하 양조장에서 만든 맥주를 1층 매장으로 바로 연결 짓는 독특한 구조로 설계했다. 66평 규모의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이곳에서 가장 진보적인 맥주를 맛볼 수 있다.
왼쪽부터 | 루즈드부아 “붉은빛의 사워 에일을 오크통에서 효모와 함께 1년 정도 숙성시켜서 만들었어요. 그래서 이름도 프랑스어로 ‘빨간 나무’라는 뜻이에요. 나무에 물들어 은은한 붉은빛이 매력적이죠. 기분 좋은 산미가 느껴지고 굉장히 복합적인 맛이 나는, 솔직히 난이도가 좀 있는 맥주예요. 5명이 마시면 아마 그중 한 명만 좋아할 거예요. 오직 브루 랩 용산에서만 맛볼 수 있는데 양이 얼마 안 남았어요.” 소원 페일 에일 “평양에서 태어난 아버지가 부쩍 고향 이야기를 많이 하셨어요. 언젠가 아버지를 위한 맥주를 만들어보고 싶었죠. 북한에서 재료를 가져오고 싶었는데 합법적으로 쉽지 않더군요. 그러다가 중국 경로를 통해 백두산의 물을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어요. 남한의 물과 백두산의 물을 반반 섞었고 거기에 단일 홉과 몰트를 사용했어요. 원래 맥주를 만들던 방식보다 몇 배는 더 힘든 도전이었어요.” 브루랩 샘플러 “브루 랩은 일종의 실험실 같은 장소예요. 어느 날 양조장 연구실에 가보니까 비이커가 정말 많더라고요. 실험실이라는 테마에 맞게 비이커 모양 잔으로 샘플러를 만들어봤어요. 샘플러의 맥주 5가지는 올 때마다 바뀌어 있을 거예요. 쉽게 마실 수 있는 것과 난이도 있는 것을 골고루 섞어서 말이죠. 10월에는 새로운 맥주를 많이 만들 겁니다. 그동안 미친 맥주를 만들고 싶은 열망이 컸어요. 이를테면 여과를 전혀 하지 않은 신선한 맥주요. 뿌옇고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정말 맛있어요. 서울 한복판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신선한 맛을 보여주고 싶어요. 처음 맥주를 만들던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가려고요.”
정하봉 JW 메리어트 서울 플레이버즈 총괄소믈리에
‘한국 와인이 달라졌다’. 먼지 뽀얗게 쌓인 마트 한구석이 아닌, 저 멀리 장 미셸 오토니엘의 유리구슬이 어렴풋이 보이는 근사한 호텔 레스토랑 와인 셀러에 가지런히 진열된 한국 와인의 단아한 자태를 보며 든 생각이다. JW 메리어트 서울 플레이버즈 와인 리스트를 총괄하는 정하봉 소믈리에는 직접 국내 와인 산지를 찾아 가서 생산자를 만나 대화하고 시음해본 것을 토대로 ‘한국 와인 베스트 10선’을 선정했다. 그야말로 한국 와인의 신세계를 만날 수 있다.
왼쪽부터 | 수도산 와이너리 크라테 프리미엄 스위트 2015 “김천 지역 해발 1,317미터 수도산에서 키운 산머루로 만든 레드 와인이에요.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해보면 사람들이 놀라곤 합니다. 정말 한국 와인이냐고 되묻죠. 한국 와인에 대한 선입견을 깰 수 있는 고품질을 보여줍니다. 특히 균형감이 상당히 좋아요.” 그랑 꼬또 청수 2018 “대부도는 한자로 높은 언덕이라는 뜻이에요. 누구도 와인을 만들지 않던 2001년에 와인 양조에 뛰어든 와이너리죠. 청수라는 덜 알려진 품종을 재발견해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뒀어요. 지금은 대부도 전체 면적의 30퍼센트에서 포도를 재배하고 있죠. 한국 와인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 ‘로버트 몬다비’라고 불리기도 해요. 미국 나파밸리 와인의 부흥을 이끈 사람과 비교되곤 하죠. 소믈리에로서 사람들이 좀 더 알아봐줬으면 하는, 정말 좋은 숨은 와인이에요.” 샤또 미소 로제 스위트 2017 “한국의 보르도라고 불리는 충북 영동 지역에는 43개의 와이너리가 있습니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숫자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품종인 캠밸 포도의 캐릭터를 아주 잘 표현한 와인이에요. 한국 와인도 이렇게 충분히 맛있을 수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추사 로제 스위트 “충남 예산에서 재배한 사과로 만든 와인이에요. 추사 김정희 선생의 고향이 바로 예산이었죠. 레드 러브라는 사과 품종이 있는데 쪼개보면 핑크빛이 납니다. 그 사과를 압착해서 만들기 때문에 로제 와인처럼 색깔이 예쁘죠. 닭볶음탕을 먹을 때 이 와인을 한잔 곁들이면 달콤함이 매콤한 맛을 중화시켜줍니다. 한국의 식재료로 만든 음식은 한국 와인과 궁합이 잘 맞을 수밖에 없어요.”
김준수 몰트코크 오너 바텐더
역삼동의 작은 건물 2층, 좁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초현실적인 장면을 목도할 수 있다. 겉보기엔 여느 바와 크게 다르지 않은 위스키 진열장 뒤로 한 발자국 넘어가는 순간 집념의 끝이 거기에 있다. 김준수 바텐더는 자신이 태어난 해인 1990 빈티지 위스키를 브랜드별로 3병씩 모은다. 이 술은 팔 수도 없고 팔기도 싫은 컬렉션이다. 그는 기이한 위스키를 모으는 컬렉터다. 광기 혹은 순수한 애정 그 사이쯤일까? 귀하고 희한한 술을 바 어딘가에 촘촘하게 숨겨놓는.
왼쪽부터 | 카발란 “대만은 아시아에서 싱글 몰트위스키 소비량이 1위예요. 위스키로 급부상하고 있는 나라죠. 많이 마시는 만큼 잘 만들기도 하고요. 최근 국내에서도 대만 위스키가 주목받기 시작했어요. 온라인 동호회 ‘위스키 & 꼬냑 클럽’이 10주년을 맞이해 카발란 위스키의 샘플을 테이스팅한 적 있어요. 위스키 애호가들의 득표수가 가장 많은 제품을 병입했죠. 한국 위스키 시장이 그만큼 커졌다는 점, 그리고 국가 단위에서 커뮤니티 단위로 영향력을 보여준 의미가 남다른 술이에요.” 글렌드로낙 코리아 에디션 1996 “당시 이 위스키를 들여오던 한국 수입사 대표가 스코틀랜드 글렌드로낙 증류소의 위스키 메이커와 함께 1996년에 증류된 199번 캐스크 한 통 전체를 병입한 싱글 캐스크 제품이에요. 그 모든 숫자와 기록이 병에 자세하게 기입되어 있어요. 당시 한국 시장에 515병만 풀렸던 제품으로 국내에서는 처음 있는 사례였죠. 묵직하고 힘도 좋고 끈덕진 술이에요. 그야말로 매니악한 위스키로 지금은 구하기가 힘듭니다.” 맥켈란 18년 1984 “지금은 빈티지가 거의 사라졌지만 과거에는 증류한 해를 병에 표기했어요. 빈티지 위스키의 가격은 굉장히 가파르게 뛰고 있어요. 단순히 오래돼서 비싼 게 아니라 그만큼 맛이 있다는 뜻이겠죠. 시간을 견뎌낸 술은 폭발적인 풍미를 선사합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매물 자체가 드물어요. 이 기사가 나가면 제가 좀 귀찮아질 수 있겠는데요?” 맥켈란 18년 1990 “아주 오래전부터 여러 브랜드의 1990 빈티지 위스키를 모으고 있어요. 제가 태어난 해의 빈티지 위스키라서 더 특별하죠. 생일 때마다 하나씩 오픈해서 마셔봅니다. 제 생일요? 2월 언저리요.”
- 에디터
- 김아름
- 포토그래퍼
- 이현석
- 로케이션
- Pierre Cigar Bar, The Hand & Malt Brew Lab, JW Marriott Seoul Flavors, Maltco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