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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호 피디의 2라운드

2019.11.09GQ

김태호 피디가 돌아왔다. 그는 과연 MBC 주말예능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 유해한 콘텐츠가 판치는 세계 속에서 김태호가 지키려는 것, 새로운 미디어 지형도 속에서 그가 놓치고 있는 것을 분석했다.

“김태호 어때요?” 얘기를 꺼내자마자 술자리는 난장판이 됐다. 한 20대 친구는 “대학시절 <무한도전>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라며 “알고 지내는 언니가 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무한도전만은 본방을 사수했다. 일개 예능에 그렇게 열정을 쏟을 필요가 있나”라며 화를 냈다. 자리에는 <한겨레>에 칼럼을 쓰는 유주얼(필명) 씨도 있었다. 유주얼 씨는 <무한도전>의 열성 팬까지는 아니지만, 꽤나 열심히 봐왔던 소극적 팬이다. 그는 “솔직히 <무한도전>도 그렇고 최근의 프로그램도 그렇고 자기가 신뢰할 수 있고 사람들을 안정적인 앵글 속에 넣어 두고 굴리는 기획”이라며 “김태호는 성장을 하지 않는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무한도전>의 팬인 나는 살짝 반감을 드러내며 물었다. “최근 작품은 다 보셨어요?”

지난 몇 주간 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시간이 나면 꼭 물었다. “김태호 피디의 최근작을 보았느냐”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놀면 뭐하니?>를 봤다가 무슨 콘셉트인지 이해가 잘 안되어서 답답해하며 전원을 끈 사람이 있었고, <같이펀딩>을 보다가 태극기함을 제작한다는 얘기에 깜짝 놀라 채널을 돌린 사람이 있었다. 시청률이 이를 방증한다. 일요일 오후 6시 30분 황금 시간대에 방송 중인 <같이펀딩>은 8회 차에 접어들었으나, 평균 시청률은 3.5퍼센트를 넘긴 적이 없다. 토요일 오후 6시 30분에 편성된 <놀면 뭐하니?>도 비슷하다. 딱 한 회차에서 6.6퍼센트를 찍고 나머지 회차에서 모두 4퍼센트대를 기록했다. MBC의 주말예능을 구원하리라 기대를 모았던 구세주의 어깨는 아직 무겁다.

왜 사람들은 김태호를 보지 않을까? 어쩌면 질투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해본다. 3040을 관통하는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김태호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마저 애정과 질투가 함께 담긴다. 아무것도 없는 멤버들을 모아서 무모하게 도전해 대한민국 대표 예능으로 이끈 예능 거장에 대한 존경심을 비집고 마음 한편에서는 “흥, 유재석이 목요일 토요일 이틀을 비워두고 김태호의 예능 복귀를 기다렸다고? 결국 유재석 카드를 조커처럼 사용하는 스타 게임의 수혜자가 아닌가?”라는 삐뚤어진 시선이 새어 나온다. 누군가는 “또 유재석이고, 또 유희열에 이적이다”라고 말했다. 자기가 경쟁사 피디도 아니면서, 남들은 쉽게 섭외하지 못하는 최고의 카드를 너무 쉽게 쓸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질투가 살짝 묻어나온다. 이 질투심은 간혹 유재석을 향하기도 한다. <놀면 뭐하니?>에선 최근 유재석이 드럼을 배우는 과정을 조명하는 ‘유플래시’ 편을 기획했다. 유재석이 친 엉터리 드럼에 유희열, 이적, 이상순, 적재가 유려한 편곡의 멜로디를 얹어 아름다운 노래 하나를 완성하는 과정이 담겼고, 최근 회차에서는 8비트 기본 드럼을 배운 유재석이 한상원의 재즈 밴드와 협연을 하는 모습이 담겼다. 이를 본 한 뮤지션은 “그게 유재석이니까 ‘천재 드러머’라며 방송에 나오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지 팬이 아닌 사람이 보기엔 그냥 중년 아저씨의 취미생활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삐뚤어진 나와는 다르게 <지큐>에서 내 원고를 담당하는 김아름 에디터는 “이렇게 유해한 콘텐츠가 판을 치는 와중에 김태호는 그래도 무해하고 유익한 방송을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느냐”라며 “어쩔 수 없이 나영석과 자주 비교되는데, <신서유기>처럼 남탕 유머로 가득한 예능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앞서 언급한 유주얼 씨는 “김태호나 나영석이나 남탕예능을 해온 건 마찬가지”라며 “무한도전이나 1박2일이나 남탕인 건 마찬가지고 나영석 역시 최근에는 <삼시세끼> 산촌편에서 여성 출연자들 위주의 기획을 냈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예능이 뭐라고 이렇게 사람들이 갈린다. 다만, 김아름 에디터의 말에서 중요하다고 느낀 표현이 있었다. ‘무해한 예능’이라는 키워드다.

김태호는 왜 무해한 예능을 만드는가? 김태호는 해석을 참 잘한다. 사실 세상의 모든 이야기에는 해석이 붙는다. 상황이나 사건을 보고 이해하고 나만의 언어로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행동이 해석이다. 굳이 소설가나 영화 감독이 아니더라도 해석은 누구나 어쩔 수 없이 하고 산다. 영리한 이야기꾼은 해석을 숨기고 관객이 해석을 찾도록 유도한다. 이야기가 전달하는 교훈에도 가치가 있지만 해석을 찾는 행위와 이 해석을 찾아 보물인 양 자랑하는 데도 큰 즐거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김태호는 이걸 참 잘한다. 해석의 끝은 결국 ‘가치’다. 해석의 방향성은 이야기를 타고 흐르며 말을 꺼낸 사람의 가치관으로 치환된다. 김태호가 만든 예능을 보면 김태호의 가치관이 여지 없이 드러난다.

<무한도전>이 극성 팬들을 거느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가치’에 대한 열망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면 뭐 하나 그냥 한 적이 없다. 기후변화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해 북극곰을 만나고, 농민들의 값진 노동의 의미를 일깨워 주기 위해 벼농사 특집을 기획했다. ‘대체 에너지’ 편에서는 자전거로 전기를 만들어서 헤어드라이어를 작동시켜도 보기도 했다. 착한 사람이 박명수와 정준하 같은 악동을 이끌고 만든 착한 기획. 최근의 기획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같이펀딩>은 그 제목에 마저 ‘가치’가 녹아 있다. 각 출연자들이 자신만의 크라우드 펀딩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게 프로그램의 콘셉트다. 패널 중 하나인 노홍철은 ‘소모임 프로젝트’를 펀딩에 내놨다. 노홍철이 직접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일반인들의 사연을 접수 받아 소수의 인원을 선정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이 자리에 초대받은 일반인 출연자들은 노홍철이 준비한 음식을 먹으며 개개인이 힘들었던 사연을 털어놓는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서로의 사연을 주의 깊게 들어주며 공감하고 서로 다독여준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만들어 낸 자리라도 상관 없다. 아름다운 세상, 모두가 꿈꾸는 세상, 노홍철과 김태호가 꿈꾸는 세상에 우리는 잠시 감동한다. 김태호의 바이브에 잠시 같이 떨려본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이 문제다.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유준상은 열혈 애국주의자의 면모로 등장한다. ‘전생에 나는 독립 투사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유준상은 집집마다 태극기 게양일에 태극기를 걸지 않는 것이 안타까워 ‘국기함 제작 펀딩’을 제안한다. 역사 강사 설민석과 함께 진관사를 찾아 태극기의 의미와 역사를 되짚어 보고, 이 장면을 보며 패널들은 눈물을 흘린다. 노홍철의 에피소드에 공감했던 것과는 달리 태극기를 향한 유준상의 맹목적인 사랑에 내 가슴은 떨리지 않았다. 애국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애국주의를 시청자의 목구멍에 쑤셔 넣고야 말겠다는 태도에 옅은 반감이 들었다. 물론 나와 다른 사람이 다수다. 유준상의 태극기함 펀딩에 감동한 사람들의 마음은 9억 8500만원 어치나 모였다. 다수라고 안심할 것은 아니다. 어떤 콘텐츠든 가치를 극단적으로 드러내면 두 가지 필연적인 문제가 생긴다. 제작진이 강조한 가치관에 동조하지 못한 사람이 떨어져 나가는 문제, 가르치려는 태도에 피로감을 느낀 사람이 떨어져나가는 문제다. 시청률 포식자로서 나영석 피디의 영특함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우리는 나영석이 어떤 가치를 옹호하는지 선명하게 알지 못한다.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고민이 있다. 가치 있고 재밌는 콘텐츠를 실크스크린처럼 뚝딱 찍어내는 방법은 없을까? 좀 더 넓게 생각하면 기자나 에디터 뿐 아니라 일반 기업에 다니는 회사원들도 비슷한 고민을 한다. 내가 재미있고 세상에 유익한 일을 하면서 워라벨의 기대치마저 충족할 수 있는 직장은 없을까? 한때 ‘옳은 가치’를 추구하기만 해도 그걸 보는 관객이 앎의 즐거움을 느끼던 시대가 있었다. 우리 모두가 너무 무지해 교육이 필요한 시대였다. 페미니즘을 잘 몰랐고, 성소수자를 잘 몰랐고, 장애인 인권을 몰랐던 시대다. 그 시대에는 뭔가를 알려주는 것만으로 즐거움을 느꼈다. 그 시대에 우리는 <무한도전>의 ‘나비효과 특집’을 보면서 지구의 얼음이 녹으면 왜 안 되는 지를 시각적으로 깨닫게 해준 김태호에게 고마움을 느꼈고 대단하다며 존경했다. 그러나 예능에서 마저 교육이 필요한 시대는 살짝 저물고 있고, 변화는 개인의 선택에 남았다. 글 / 박세회(허프포스트코리아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