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torial

현대 미술가 보스코 소디의 흑백 세계

2019.11.20GQ

멕시코를 대표하는 현대 미술가 보스코 소디가 창조한 흑과 백의 기묘한 세계.

부산 달맞이 고개에 위치한 조현화랑에서 열리는 보스코 소디의 전시 전경. 흑백 시리즈 연작 10여 점, 지름 약 40센티미터 크기의 원형 점토 조각, 단색 회화 소품 30여 점을 감상할 수 있다. 전시는 12월 8일까지.

부산에 도착했을 때 인상적인 풍경이 있었나? 지난번 왔을 때는 날씨가 굉장히 좋았는데 이번에는 태풍이 몰아닥쳤다. 폭우가 내려서 부산 곳곳을 아직 충분히 둘러보지 못했다. 이런 천재지변은 피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몇 년 전 브루클린에도 큰 홍수가 나서 작업실이 물에 완전히 잠겼다. 그때 수많은 작품을 잃었다. 스튜디오가 있는 뉴욕과 바르셀로나도 바다가 가깝다. 그래서 그런지 부산이 낯설지 않다.

조현화랑에서 12월 8일까지 열리는 첫 개인전은 ‘흑과 백’이 중요한 테마다. 이렇게 극적인 대비가 느껴지는 작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2년 전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면서 생과 사에 대해 깊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 물질과 영혼, 선함과 악함, 빛과 어둠처럼 상반된 보편적 개념과 삶의 이중성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흑과 백은 이런 이중성을 제일 잘 보여줄 수 있는 재료다.

깊숙하게 숨어 있는 작은 전시실로 들어가면 다른 컬러로 작업한 작은 사이즈의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당신에게 컬러란 어떤 의미인가? 멕시코 사람들은 색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정서를 드러내는 데도 주저함이 없다. 영혼이 강한 사람들이다. 멕시코에 방문해보면 집은 물론, 사람들이 입고 있는 전통 의상의 색깔도 정말 다양하다. 멕시코 출신의 건축가 루이스 바라간이 건축물에 사용한 컬러를 보면 무척 황홀하다. 그런 문화권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나 역시도 자연스럽게 많은 색깔을 과감하게 시도해보고 작업에도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색을 찾아 종종 여행을 떠난다고 들었다. 최근에 발견한 아름다운 색은 무엇이었나? 궁극의 빨간 색을 찾아 모로코 마라케시로 떠난 적이 있다. 10년 전부터 식물에서 채취한 붉은색에 매료되어 그것으로 작업을 하곤 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수상한 자루를 들고 있는 나를 의심한 경찰과 공항에서 실랑이를 벌이다가 모두가 붉은 가루를 온몸에 뒤집어쓴 적이 있다. 천연 안료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들의 눈에는 폭탄이나 마약처럼 보였을 수 있다(웃음).

멕시코에서 태어나 지금은 뉴욕과 바르셀로나를 오가며 작업과 전시를 왕성하게 하고 있다.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나? 브루클린 레드훅 근처에 집과 스튜디오가 있다. 세 아이를 학교와 유치원에 보내고 스튜디오로 출근해서 2시까지 작업을 한다. 점심을 먹으러 집에 갔다가 다시 저녁까지 작업을 이어나간다. 영화도 보고 음악과 공연도 좋아하고, 가능한 모든 것에 마음을 열어놓고 살고 있다.

작업할 때 음악을 들으면서 하는 편인가? 주로 모차르트와 쇼팽, 재즈, 그리고 가끔 핑크 플로이드 음악을 틀어둔다.

이번 흑과 백 작품 연작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을 선곡한다면? 재즈 뮤지션 존 콜트레인의 음반. 들어보면 굉장히 멜랑콜리한데 생과 사의 이중적인 면과 잘 어울리는 음악이다.

당신의 회화 작품은 측면에서 바라봤을 때 더 경이롭다. 땅, 우주, 행성 등 초자연적이고 원초적인 순간을 상상하게 만든다. 천연 재료로 작업을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어린 시절부터 자연과 가깝게 살았고, 그런 나와 자연과의 관계를 최대한 친밀하게 표현해보고 싶어서 천연 재료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자연과 협업하는 것이 좋다. 안료, 톱밥, 목재 펄프, 천연 섬유질과 아교의 혼합물을 섞어서 사용한다. 매일매일 무작위로 재료의 비율을 다르게 섞어서 실험해본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서 배합은 달라진다. 어떤 날엔 뻑뻑하고 반대로 축축한 날도 있고. 어린 시절 찰흙놀이를 하던 기분을 떠올려 보면 된다. 부드럽고 물렁물렁하고. 이 혼합물을 캔버스에 오랜 시간에 걸쳐 흩뿌리고 두껍게 쌓아 올린 후 그대로 굳게 내버려둔다.

그런 과정은 회화 혹은 조각의 일종인 부조이기 전에 퍼포먼스의 성격을 보여준다. 나는 언제나 에너지의 변화를 만들고 싶다. 작업 과정에서 물리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한 자리에서 정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건 내게 너무 지루한 일이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즐긴다. 외부와 단절된 상태로 굉장히 몰입해서 작업을 할 때는 종종 내가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일종의 트랜스 상태로 나만의 세계에 들어가면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의식이 점차 희미해진다.

자연에서 즉흥적으로 영감을 받아 작업을 해본 경험도 있나? 흰 눈에 색을 섞어서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그렸다는 일화는 꽤 낭만적이다. 우연히 산에 놀러 갔다가 부러진 커다란 나뭇가지를 발견했다. 즉흥적으로 흰 캔버스 위에 나뭇가지로 쿡쿡 찍는 작업을 시도해본 적이 있다. 내년에 뉴욕 카스민 갤러리에서 나뭇가지를 사용한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

다른 도구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작업하는 이유가 있나? 거대한 캔버스 위에 배합한 재료를 쌓아가는 과정은 노동집약적인 ‘고행’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로 3미터가 넘는 대형 회화 작품도 어시스턴트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는다고 들었다. 내 작업은 한마디로 재료와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이다. 서로 간에 에너지를 주고받는 행위이기도 하고. 손을 이용함으로써 재료로부터 직접 기를 받는다. 이런 과정은 나에게 일종의 테라피다. 언제나 결과물보다 이런 과정 자체가 나에겐 가장 중요하다. 때때로 실수에 대한 허용과 자유를 통해서 더 아름다운 결과가 생겨나기도 한다. 우연한 사고가 많으면 많을수록 결과물이 풍성해진다.

신발에 묻어서 켜켜이 쌓인 퇴적물조차 작품처럼 멋스럽다. 패션 매거진 에디터와 사진가들이 스튜디오를 방문하면 모두가 그것을 꼭 찍어가더라(웃음).

작업할 때 늘 입고 있는 블루 점프 수트도 근사하다. 월마트에서 늘 똑같은 것을 구입해서 입는다. 값비싼 브랜드의 옷을 좋아하지 않는다. 평소에 소비를 많이 하지 않는 편이다. 심플한 것을 제일 좋아한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특별한 일은 없었나? 혼자서 무작정 미용실에 들어가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나왔다. 한옥에 반해서 얼마 정도에 실제로 살 수 있는지 물어보기도 했고. 경주에 갔을 때 왕릉을 보고서는 나도 저렇게 묻히고 싶다고 사람들에게 진지하게 말했더니 다들 웃더라.

그런 자유분방하고 엉뚱한 매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당신의 유년 시절이 궁금하다. 어머니는 마르크스 철학으로 석사를 받은 분이다. 나는 어머니 덕분에 열세 살 때 이미 달라이 라마에 관한 철학책을 2권이나 읽었다. 아버지는 화학 엔지니어였는데 부엌에서는 늘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화제도 나고, 작은 폭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그야말로 실험적 삶의 방식을 그때 터득했다. 아버지로부터 늘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는 말을 듣고 자랐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주의력 부족과 난독증 판명을 받아서 매주 3번씩 치료를 받기도 했다.

유와 방임, 기다림과 지켜봄은 당신이 작품에 대해 취하고 있는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 재료를 캔버스에 흩뿌린 이후에 길게는 몇 달 동안 방치해둔다. 작품에 균열이 생기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그걸 건드리거나 변경함으로써 방해하고 싶지 않다. 자연 분열을 통해 완성된 작품이 가장 특별하다. 무엇이든 계획하에 진행하면 고통스러울 것 같다. 결과물에 집착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에게 이런 작업 과정은 내적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명상과도 같다.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보통 어떤 순간에 작업을 멈추나? 회화가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최대한 빨리 갈라지기 시작할 때 생명력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작품의 표면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작업을 멈춘다. 신이 그림에 키스를 할 때 더 손을 대지 않는다고 말하곤 한다.

어느 평론가는 당신을 ‘물감의 조각가’라고 부른다. 페인터와 조각가 중 무엇인지 묻는다면? 오브젝트 메이커가 정확할 것 같다. 여기 작품들은 벽에 걸려 있지만 3D적인 성격의 작업이기도 하다. 내 작품이 공간의 일부처럼 흡수되기를 바란다.

개인적인 공간에 어떤 작품이 놓여 있는지 궁금하다. 가깝게 지내고 있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한다. 우리는 일종의 물물교환처럼 서로 좋아하는 작품을 주고받는다. 순전히 우정으로 하고 있는 일이다. 집 거실에 데이미언 허스트, 우고 론디노네, 칼더의 작은 조각 작품을 모아두고 있다.

2014년 멕시코 오악사카 지역에 카사와비 재단을 설립해서 다양한 문화사업을 해오고 있다. 올해는 12만 개의 벽돌로 쌓아 올린 대형 공공미술 프로젝트 ‘Atlantes’를 선보였다.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쌓아 올린 작품이다. 오악사카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히지만 반면에 영화관도 없을 정도로 문화 시설이 열악한 동네다. 재단이 어린아이들에게 예술을 가르칠 수 있는 커뮤니티 역할을 했으면 한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이 작은 도시에서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이 계속해서 일어나길 바란다.

    에디터
    김아름
    포토그래퍼
    김신애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