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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모렌지 시그넷의 원류를 찾아 떠난 여행

2019.12.14GQ

위스키, 커피, 초콜릿이 동시에 만나는 순간이 있다. 글렌모렌지 시그넷의 원류를 찾아 스코틀랜드로 떠났다.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높은 위스키 증류기.

1843년에 설립한 글렌모렌지 증류소.

초콜릿과 커피 풍미의 시그넷.

최고급 오크 캐스크가 있는 숙성고 .

바다가 펼쳐지는 증류소 앞 풍경.

글렌모렌지의 수장 빌 럼스던 박사.

고요한 자연 속에 놓인 글렌모렌지 증류소.

10월, 스코틀랜드의 날씨는 스산하고 축축했다. 에든버러에서부터 3시간 내내 유리창 너머로 안개만 상영해주는 황송한 자동차가 하이랜드에 거의 다다랐을 때 작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맛있는 위스키를 만들려면 하늘도 어쩔 수 없어요.” 기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글렌모렌지 증류소는 스코틀랜드의 최북단인 테인 Tain 지역에 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연하게 바다 내음이 느껴지는 해안가에. ‘하이랜드의 대성당’이라 불리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증류소가 있다. 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가열과 농축이 반복되는 치열한 증류의 현장을 마주하게 된다. 일상의 묘약, 위스키의 탄생 과정을 볼 수 있는 곳. 가장 압도적인 순간은 기린처럼 키가 큰 12대의 증류기를 목격했을 때다. 실제로 5미터가 넘는다.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목이 긴 증류기다. 길이는 맛에도 영향을 준다. 증류기가 높을수록 순수한 원액을 얻을 수 있다. 가장 섬세한 알코올 증기가 증류기의 꼭대기로 도달하는 원리다. 거대하고 우아한 증류기는 위스키를 만드는 연금술이다. 구리가 만들어낸 옅은 빛, 레스토랑의 주방처럼 후끈한 열기, 안정감을 주는 미세한 소음. 액체를 끓여 증기를 모으고 다시 액체가 되는 신비로운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인간의 지적, 미적 갈망이 만들어낸 과학의 술. 누군가는 말했다. 증류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필요하다고. 글렌모렌지 증류소는 그런 호기로운 주장이 조금은 수긍 가는 공간이다.

글렌모렌지의 총괄 책임자인 빌 럼스던 박사. 그는 이번 여정에서 위스키의 일생을 들려줄 사려 깊은 안내자가 되었다. 1995년 2월, 할아버지의 생일이 입사 날짜와 같다고 했다. 그래서 절대 잊을 수가 없다고. 2016, 2017, 2019년 국제위스키대회(IWC)에서 ‘올해의 마스터 디스틸러’를 연속으로 수상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퇴근 후에는 위스키 하이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에게 위스키란 낯간지럽지만 첫사랑 같은 애틋함이 드는 존재다. 1984년 3월이란 숫자까지 기억하는 걸 보면 분명히 그렇다. 글렌모렌지 오리지널을 처음 마시던 날에 대해 얼굴이 붉어진 채로 말했다.

“부드러운 힘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사랑에 빠졌어요. 치기 어린 젊은 시절엔 샤토 무통 로칠드, 돔 페리뇽 같은 호화로운 술을 마시는 삶을 꿈꾸죠. 하지만 그 나이엔 그런 술을 마실 돈도 여유도 부족합니다. 이십 대 시절 커피를 통해 취향을 쌓아가는 즐거움을 발견했습니다. 생두가 어디에서 오는지, 로스팅의 차이가 맛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이런 것이 늘 궁금했어요.” 위스키와 커피, 그리고 초콜릿. 이 세 가지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멈추지 않고 회전하는 위스키 시그넷은 거기서부터 출발했다. ‘인장’이란 뜻의 시그넷 Signet은 위스키 업계에 하나의 혁명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빌 럼스던이 말을 이었다. “제임스 본드는 젊은 시절 저와 친구들의 영웅이었습니다. 그 시절 우린 그의 모든 것을 따라 하고 싶었어요. 하다못해 그가 좋아하던 커피 자메이카 블루 마운틴마저도요. 결국 많은 돈을 내고 그걸 자주 마셨습니다.” 몰트 위스키와 커피 로스팅. 다른 듯 비슷한 두 개의 취향은 그렇게 만났다. “전통적으로 스코틀랜드의 많은 증류소에서 피트 Peat를 태워서 맥아를 건조시키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렇게 하면 위스키에 독특한 향을 입힐 수 있으니까요. 원두 로스팅하는 과정을 위스키 양조에도 적용한다면 다채로운 층의 맛과 향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시그넷은 초콜릿 몰트로 만든다. 바삭하게 로스팅한 이 몰트에 글렌모렌지 하우스 몰트를 섞어서 사용한다. 매우 특별한 비율이라고 했다. 비밀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맥아를 손톱만큼 집어 마른안주 먹듯이 입에 넣었다. 씹을수록 고소했다. 증류소에서 목격한 방공호처럼 생긴 커다란 맥아즙통에서는 마치 에스프레소처럼 짙은 컬러의 액체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구수하고 은은한 향이 코끝에 스쳤다. 지금처럼 평온한 증류소에서 안정적으로 위스키를 생산하기까지 빌 럼스던 박사는 ‘미친(Crazy)’ 실험과 혁신의 과정을 무수히 거쳤다. “처음 시음해봤을 때 너무 강한 맛이 올라와서 실망감이 컸습니다. 글렌모렌지의 전통적인 위스키 맛에서 너무 벗어나 있었죠. 부드러움을 전혀 느낄 수 없었어요. 실패의 맛은 정말이지 너무 쓰고 강렬했습니다.” 2008년 수많은 실험과 시음을 통해 마침내 시그넷이 탄생했다. 이제는 글렌모렌지의 상징과도 같은 위스키가 되었다. 글렌모렌지의 중요한 철학인 일관성 안에서 일어난 작은 변화. 어느 커피 애호가의 호기심과 뜻밖의 발상이 선사한 기막힌 우연.

2016년에는 시그넷이 국제위스키대회에서 ‘올해의 위스키’로 선정됐다. 시그넷이라는 이름은 고대 유물인 캐드볼 스톤 Cadboll Stone에서 유래했다. 1,300년의 역사를 가진 이 미스터리한 돌 조각에는 소용돌이 모양이 새겨져 있다. 글렌모렌지 하우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자연과 시간이 만들어낸 신비로운 돌과 물, 그리고 위스키. 글렌모렌지는 게일어로 ‘고요의 계곡’이란 뜻이다. 마지막 날 빌 럼스던 박사는 작은 웅덩이로 사람들을 데려갔다. 무릎 높이의 울타리를 열고 들어가자 바닥까지 맑게 보이는 샘이 있었다. 탈로지 스프링 Tarlogie Spring은 경수다. 미네랄이 풍부해서 발효를 더 잘 돕는 역할을 한다.

시그넷을 원할 때마다 물처럼 마음껏 마셨다. 커피와 초콜릿 향이 은은하게 번지는 진한 호박색의 술. 약간의 스파이시함도 있고 끝에서는 은은하게 오렌지 향이 피어오르는. 늦은 밤 홀짝이는 술로만 알고 있었던 위스키를 초콜릿과도 마셨다. 초콜릿의 달콤함이 극대화되었고, 커피의 그윽한 풍미가 위스키의 향을 한결 부드럽게했다. 사슴고기, 육즙이 가득한 스테이크 등 붉은 고기와 흥미로운 화학작용이 일어났다. 잠들기 전 물 몇 방울을 떨어뜨려 마시면 한결 더 부드러워 깊은 숙면을 선사했다. 술이 몸에 좋다는 이상한 플라시보 효과일지라도. 위스키는 불면의 밤을 잠재운다. 고독한 빈틈을 메운다. 시그넷 위크 기간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유르트 모양의 칵테일 바에서는 위스키를 칵테일로 제조해서 마시는 것이 결코 신성모독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시그넷에 소다를 섞고 비터스 몇 방울을 떨어뜨려 직접 올드 패션드를 만들었다. 서너 잔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날의 밤은 낮보다 길었다. 시그넷의 기억을 떠올리며 서울의 바를 밤마다 유랑한다.

    에디터
    김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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