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와 ‘영드’는 새로운 아이템 찾기에 골몰한 방송가가 근 몇 년간 열심히 파헤쳐온 광맥이다. 그리고 <부부의 세계>가 등판했다.
전 국민 양치기 소년 프로젝트 드라마인가. 다들 혈압 올라 더는 안 보겠다, 혀끝을 차면서도 어김없이 다시 찾아 보는 분위기다. 드라마 게시판엔 매주 피의 성토가 들끓는다. “혼자면 외롭고 둘이면 괴롭다”는 소크라테스형 고백부터 “살아봐야 아는 세계”라는 조언형, “간통죄는 부활해야 한다”는 대안 제시형까지, 공감과 자조와 욕설과 참회가 뒤섞인다. 이런 흐름을 타고 역대 비지상파 드라마 최고 시청률도 찍었다. ‘메이드 인 UK’ 콘텐츠를 원작으로 한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 이야기다.
‘미드’와 ‘영드’는 새로운 아이템 찾기에 골몰한 방송가가 근 몇 년간 열심히 파헤쳐온 광맥이다. tvN 드라마 <굿와이프>가 방영된 2016년은 영미권 드라마 리메이크의 원년.
<굿와이프>로 유의미한 첫발을 디딘 tvN은 <안투라지>와 <크리미널 마인드>를 발빠르게 내놓았다. 결과는 침울했다. tvN이 주춤한 사이, OCN이 영국발 리메이크 <미스트리스>와 <라이프 온 마스>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지상파 드라마들도 미국과 영국에서 아이디어를 수혈받아 <슈츠>와 <나쁜형사>를 선보였다. 특히 MBC <나쁜형사>는 지상파로는 드물게 19금의 딱지를 달고 첫 방영에 나섰다. 사람들은 MBC가 변했다고 말했다. 절치부심하던 tvN은 <60일, 지정생존자>의 성공으로 구겨진 자존심을 다시 폈다. 그리고 <부부의 세계>가 등판했다. <부부의 세계>를 기점으로 국내 영미 드라마 리메이크는 새로운 변곡점을 맞는 분위기다.
<굿와이프> 이전까지 국내 드라마 리메이크의 VIP 고객은 일본과 대만이었다. 문화와 제작 환경이 비슷해서 재가공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반면 영미 드라마는 표현 수위나 소재 면에서 정서적으로 이질적인 부분이 많아 현지화의 장벽이 높았다. 보수적인 국내 드라마 환경은 작품의 창작력과 표현 수위에 태클을 걸곤 했다. 이미지를 염려한 주연 배우가 자극적인 부분에 대한 대본 수정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찾아온 영미 리메이크 붐은, 그들의 표현 수위를 한국 드라마가 수용할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가령 <굿와이프> 원작에서 나나가 연기한 김단 캐릭터는 양성애자다. 한국 버전에서도 김단은 다행히(?) 양성애자로 등장한다. 일본의 동명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심야식당>이 게이 바 마담을 지우면서 논란에 휩싸인 5년 전 사례를 떠올리면 적지 않은 변화다. 제작진도 배우도 시청자도 그렇게 변했다.
여기엔 OTT 시장의 활성화가 한몫한다. 영미권 드라마 접근성이 용이해지면서 국내 시청자들은 다양한 서사에 익숙해졌다. 다양한 것에 열렸다는 건, 기존 것들이 상대적으로 시시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출생의 비밀’, ‘재벌 아니면 실장님’, ‘모로 가도 로맨스’인 한국 드라마 관성에 질린 시청자들에게 영미 드라마들은 장르 전문성으로 매력을 어필했다. 마침 <나인>, <시그널>, <비밀의 숲> 등의 성공이 장르에 목말라하는 시청자 수요를 확인시켰다. 장르물을 다룰 줄 아는 신진 작가진의 등장이 이와 맞물리면서 리메이크 트렌드가 일드에서 미드-영드로 빠르게 이동했다.
외국 작품을 리메이크할 때 국내 현실에 걸맞은 설정 업데이트는 필수다. 재해석 능력에 따라 명암은 엇갈린다. 이를 호되게 경험한 드라마가 <안투라지>다. 할리우드 쇼비즈니스의 실상을 가감 없이 담아낸 원작 <안투라지>의 매력은 마약, 폭력, 섹드립을 과감하게 담아낸 대담성이었다. 그런 19금 드라마를 15세로 낮추려 했을 때, 왜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을까. (아니, 했나?) 19금 드라마를 기대했던 이들에겐 심심하고, 원작을 모르고 드라마를 접한 이들에겐 음담 패설이 불편한, 이도 저도 아닌 앙꼬 없는 결과물에 시청자들은 TV 앞을 떠났다. 애국가 시청률만이 남았다.
<안투라지> 반대편에 타임슬립 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가 있다. BBC의 동명 수사물을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균형 넘치는 로컬라이징을 이끌었다고 호평받은 사례. 원작의 틀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의미 있는 시대로 꼽히는 1988년대로 시대를 옮긴 것이 주효했다. ‘88 서울올림픽’, ‘수사반장’ 시그널이, 박남정과 김완선 등 추억의 아이콘들이 소환돼 <응답하라 1988>과 같은 향취를 흩뿌리는 가운데, 수사극의 쫄깃함도 놓치지 않았다. 원작이 담고 있는 인종 차별적 문제는 고아성이 분한 윤나영 순경이 겪는 남녀 차별 문제로 풀어내 페미니즘 이슈와도 적절하게 호응했다. 대한민국과 미국의 헌법 차이를 고려해 제목에 ‘60일’을 추가하고 나선 <60일, 지정생존자> 역시 ‘로컬화’에 안착한 케이스다.
원작의 높은 인지도가 독이 되는 경우도 있다. 200여 개국에 방영된 미국 ABC 장수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는 ‘미드 좀 본다’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거친 작품이다. 인기는 ‘양날의 칼’과도 같아서 허술하게 건드렸다간 역풍을 맞기 쉬운데, 이 작품이 그랬다. 원작의 핵심 매력인 프로파일링 기법 수사는 허술하게 다뤄지고, 그 자리를 스타 배우의 멋들어진 액션이 들어서면서 방영 내내 혹평에 시달렸다. 배우들도 원작의 아우라에 짓눌린 인상이 역력했다. 캐릭터 해석에서의 인지 부조화가 보는 이들을 어색하게 만들었다.
<부부의 세계> 원작 드라마 <닥터 포스터>는 국내에 덜 알려진 작품이다. 원작 프리미엄은 약하지만, 비교에서 자유롭다는 장점이 있다. 이 드라마 현지화의 최대 장점은 소재에서 나온다. 부부의 배신과 이혼과 파국, 아들의 방황, 처가 갈등 등은 국내 드라마들도 사랑해온 것들이다. <부부의 세계>는 익숙한 이 모든 것을 롤러코스터에 태워 달린다. 보통의 드라마가 몇 회에 걸쳐 풀어낼 ‘불륜 발각’ 서사를 1회 만에 풀어헤치며 주인공 지선우(김희애)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 박력이라니. 매회가 마지막회 같은 속도감, 머플러에 붙은 머리카락 한 올도 놓치지 않는, CSI 뺨치는 소품 활용 능력은 원작 드라마가 쥐어준 선물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가 시청자의 감정을 쥐고 흔드는 가장 큰 요소는 여주인공에 기인한다. 가련한 본처의 전형에 머물지 않고 자신을 속인 세계에 강한 어퍼컷을 날리면서, 그 와중에 우아함을 사수하는 지선우는 본 적 없는 캐릭터다. 여성의 홀로서기라는 점에서 <굿와이프>의 변호사 김혜경(전도연)과도 비교되지만, 김혜경의 커리어가 ‘검사 아내’ 스펙에 빚져서 다시 시작한 것과 달리 지선우는 시작부터 ‘그 누구도 아닌 지선우’였다. “사랑이 죄는 아니잖아”라는 망언은 물론, 아들 보험금까지 손대는 지질한 남성 주인공 역시 기존 규범에서 벗어난 뉴타입이다.
<부부의 세계>가 불륜 드라마인 건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 흥미로운 것은 “또 불륜 드라마냐? 또 막장이냐?”라는 비난이 원작 드라마가 영국이라는 점에서 다소 희석되는 면이 있다는 점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이 세계에서는 “우리가 하면 막장인데 영국이 하니 뭔가 있어 보인다”는 묘한 심리가 작용한달까. 필터링 약한 폭력장면들 역시 ‘이건 영드니까’라는 인식 아래 조금 더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인상이다. 보통 리메이크는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소재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은데, <부부의 세계>는 반대로 우리에게 익숙한 소재에 정면 돌파한 사례라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이것은 앞으로 활발하게 펼쳐질 영미 리메이크 작업에 어떤 방향키가 될까. 마침, 또 한 편의 영국 원작 드라마 리메이크 소식이 들려온다. 제목이 <언더커버>라는데 이야기 중심에 부부가 있다. 글 / 정시우(칼럼니스트)
- 피쳐 에디터
- 김영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