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날 듯 끝나지 않는 부 캐릭터의 세계. 한국 예능에서 부 캐릭터라는 장치의 생명은 유재석이라는 이름과 함께 거듭한다.
2020년 한국 예능의 부캐라는 이야기는 결국 2020년의 유재석이라는 주제로 이어진다. 유재석과 김태호는 <놀면 뭐하니?>에서 다양한 이름의 부캐를 만들며 쇼를 꾸린다. ‘부캐란 자기 자신과 다른 보조 캐릭터다’라고 적어두면 왠지 옛날 사람 같지만, 이참에 의미를 한번 정리하는 게 독자 여러분께 나쁘지는 않겠지. 아무튼 유재석은 이 프로그램에서 유산슬, 지미유, 유DJ뽕디스파뤼, 유두래곤, 닭터유, 유귀농 등의 보조 캐릭터를 선보였다. 나는 이게 한국의 예능 불사신 유재석이 부캐라는 새 옷을 입으며 생명 연장에 한 번 더 성공한 거라고 본다.
부캐 자체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A 캐릭터를 가진 특정 인물이 B 캐릭터를 구현해서 기존과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는 경우는 해외에도 많았다. 진지한 영화감독 겸 영화배우 기타노 다케시는 일본 예능계의 슬랩스틱 코미디언 비트 다케시였다. 몇 년 전 미국 SNL 쇼트 클립으로 유명했던 그룹 론리 아일랜드도 일종의 부캐라고 할 수 있다. 본 캐릭터가 아닌 보조 캐릭터였기 때문에 저스틴 팀버레이크도 본래 이미지와 다른 ‘딕 인 어 박스’ 같은 걸 부를 수 있었다.
해외판 부캐의 특징은 여기서부터다. 메인 캐릭터 A와 부 캐릭터 B의 격차가 아주 멀다. 완전히 다른 캐릭터라고 봐도 좋다. 저스틴 팀버레이크와 론리 아일랜드, 기타노 다케시와 비트 다케시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일세를 풍미했던 카페베네 창업주가 사실은 추풍령감자탕으로 돈을 벌었던 것과 비슷하다. 카페베네는 추풍령감자탕의 부캐였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2010년대 한국 엔터테이너계의 정통파 부캐는 마미손이었다. 마미손은 래퍼 매드클라운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사자는 공식 석상에서 본인이 매드클라운이라고 밝힌 적이 한 번도 없다. 그 결과 이 설정을 둘러싼 캐릭터 게임 자체가 콘텐츠가 된다. 2020년 5월 유튜버 진용진은 ‘마미손과 매드클라운에게 동시에 인터뷰를 요청하면 어떻게 될까’라는 영상을 올렸다. 둘 다 인터뷰를 하겠다고 하고, 마미손이 먼저 도착해 “저는 마미손으로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데, 사람들이 계속 그분을 끌어 들이니까 답답하다”라고 하는데, 그동안 매드클라운은 한참 안 오다가 전화 연결로 “차가 너무 막혀서 못 간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부캐 세계관의 세련된 구현이었다.
부캐 엔터테이너의 또 다른 특징은 음원을 발매한 가수라는 점이다. 한 곡 정도라면 특정 캐릭터를 새로 만들어서 활동할 수 있다. 마미손 역시 노래 ‘소년점프’로 부캐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다비 이모로 활동하며 ‘주라주라’를 낸 김신영이나 카피추로 활동하는 추대엽도 음원형 부캐다. 이쪽의 세계적인 히트는 일본의 피코타로다. 일본 연예인 고사카 다이마오는 가상 캐릭터 피코타로로 활동하던 중 월드클래스 히트곡을 만들고 말았다. ‘펜-파인애플-애플-펜’이 바로 그 노래다.
마미손은 훌륭하지만 마미손을 한국 음원 부캐의 시작점이라고 보기엔 좀 머쓱하다. 한국형 부캐의 씨앗은 이미 있었다. <무한도전>에. 유재석의 영혼 파트너 김태호 PD는 <무한도전> 멤버와 함께 만들었던 일련의 예능형 콩트와 드라마에서 이미 무한도전 인물들에게 다른 캐릭터를 많이 입혀 내보냈다. 하하가 앞머리 가발을 붙이고 ‘하이브리드샘이솟아리오레이비’ 같은 걸 했던 게 그 예다.
이 흐름으로 보면 지금 유재석의 부캐 플레이는 신곡이 아닌 무한 리믹스에 더 가깝다. 유재석과 유재석의 부캐는 상당히 비슷할 뿐 아니라 본인이 유재석이라는 걸 숨긴 적도 없다. DJ유나 지미유는 모두 분장한 유재석이다. 즉, 유행의 흐름을 타고 자신의 특기를 새로 포장해 베스트 파트너인 김태호와 한번 더 하는 것이다. 그럼 유재석이 가장 잘하는 건 무엇일까? 김태호가 가장 잘하는 건? 둘의 특기를 정리하려면 유재석의 2010년대 후반 행보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2010년대 유재석의 최대 인기작은 <무한도전>과 <런닝맨>이었다. 연속 히트에 힘입어 유재석은 2010년대 후반 다른 포맷의 예능에 도전했다. 넷플릭스의 드라마형 미스터리 예능 <범인은 바로 너>와 JTBC의 공연&토크형 예능 <슈가맨>이었다. 이 두 프로그램은 <무한도전>과 <런닝맨>만큼의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건 프로그램의 문제가 아니라 유재석의 주특기 때문이다. 유재석은 순식간에 두 명 사이의 구조를 짜고, 그 둘 사이에 상하관계를 설정해, 그 관계로부터 계속 웃기는 장면을 만들어내는 기술자다. 2인 콩트에서 극을 받쳐주는 ‘니주’와 쏘아붙이는 ‘오도시’를 순식간에 짠다. 여러 명이 있는 상황에서도 손식간에 구조를 짜서 본인이 실시간으로 니주와 오도시를 오가며 하나의 프로그램 안에서 수많은 잔 콩트를 만들어낸다. 그 상황 설정과 캐릭터 플레이가 아주 빠르고 부드럽게 끊김 없이 이어진다. 이게 유재석판 원천기술이다. 예를 들어 유재석은 박명수나 조세호에게는 쏘아붙이는 오도시 역할을 하지만,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만난 일반인들에게는 철저히 니주 역할을 하며 깔아준다. 유재석은 신동엽 같은 실시간 진행자 타입도, 김구라처럼 오도시에 특화된 캐릭터도 아니다. 유재석은 그 자체로 기묘한 하나의 장르다. 즉, 본인의 특기가 100퍼센트 구현되지 않으면 유재석이라는 재료의 맛도 다 살아나지 않는다.
유재석 효과가 극대화되려면 PD와 주변 캐릭터가 유재석에게 완벽히 맞춰야 한다. 박명수처럼 당하면서도 큰소리를 쳐줘서 실시간으로 니주와 오도시를 바꿔가며 엉키는 카운터 파트가 있어야 하고, 유재석이 자유롭게 판을 짜도록 기획 단계부터 공유하는 PD가 있어야 한다. 유재석의 기호와 특기에 최적화된 김태호는 그렇기 때문에 유재석의 필수품이다. 유재석형 부캐는 이런 유재석형 패턴의 2020년 버전이다. 부캐가 지미유든 유두래곤이든 상관없다. ‘유재석과 게스트의 마이크로 콩트’라는 웃음의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유재석의 특기에 부캐라는 시대적 요소가 얹혔을 뿐이니까.
세상은 계속 바뀌고 예능 영웅들은 어떻게든 적응한다. 어떤 영웅은 스타일을 완전히 바꿨다. 강호동은 특유의 엄청난 에너지로 프로그램을 견인하는 시대를 지나 나영석 퍼즐의 일부가 된다는 운명을 받아들였다. 어떤 영웅은 잘하는 것만 한다. 신동엽과 김구라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안녕하세요>와 <라디오스타>를 벗어나지 않는다. 유재석은 다르다. 자신의 특기를 현재의 경향에 어떻게든 집어넣는다. 그게 유재석의 대단한 점, 일견 징그러운 점이다.
유재석은 부캐라는 시대의 흐름에 한 번 더 올라탔으니 역시 또 자기 방식의 확장을 시도할 것이다. 그 확장이란 팀플레이어 만들기다. 그의 콩트에는 숙련된 팀플레이어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재석 월드는 비슷한 패턴으로 확장해 비슷한 맛을 낸다. 이런 식이다. 번화가에 고깃집이 있다. 언제는 와인 삼겹살, 언제는 제주도 근고깃집이었는데, 요즘은 레트로풍 냉동 삼겹살을 판다. 막상 들어가서 시켜보면 주인도 양념도 똑같아서 묘하게 맛도 분위기도 비슷하다. 요즘 유재석의 부캐가 그런 고깃집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런 생존도 그런 성공도 대단하다. 유재석은 앞으로도 영생하리라.
글 / 박찬용(<요즘 브랜드> 저자)
- 피쳐 에디터
- 김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