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아래에서는 전하지 못한말.
J에게
안녕하세요. J. 사실 당신과 이야기 나누던 시절에 한번도 당신을 ‘당신’이라 지칭해본 적 없지요.이 편지는 당신만 빼고 누구든 읽을 수 있는 편지인데, 당신 아닌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하고 싶어 당신을 ‘당신’이라고 지칭합니다. 네 맘대로 하라고 놀릴 것도 같지만, 모를 일이지요. 지병이 있던 당신이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갔을 때, 저는 당신이 곧 회복하여 서울에 올 줄 알았어요. 당신이 얼마나 아픈지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얼마 후에 당신이 전화로 결혼 소식을 알려왔기에 더 그랬지요. 그러다가 당신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장례식에도 가보지 못했어요. 당신의 친우라는 자가 아주아주 나중에 그것을 제게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순전히 당신을 챙기지 않은 제 무심함 탓 인데도, 그를 원망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그가 당신의 기일을 챙기는 것 같았지만 저는 당신의 재 뿌린 곳도 묻지 않았습니다. 종종 생각합니다. 당신의 친절함과 겸손함 같은 것, 그리고 나누었던 이야기들이요. 당신은 “터진 외로움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런 시 구절에 눈물 흘리던 사람이었다고, 그게 너무 이상해서 생생히 기억한다고 제가 말하면, 웃겠지요. 사실 저는 당신 소식을 듣고 “내 시를 앞으로 못 보여주겠구나.” 그런 생각부터 떠올렸어요. 더 빨리 등단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도 했어요. 정말 그렇다고, 웃으실 것 같네요. 저는 벌써 시집을 두어 권 냈어요. 여전히 당신의 기일을 모르고, 당신의 마지막도 몰라요. 하지만 제 책을 보여주면 참 진심으로 축하해 줄 사람일 텐데-하고 속 편하게 당신을 떠올립니다. 쓰다 보니 알았습니다. 저는 웃는 모습으로만 당신을 기억하고 있네요.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잘 웃어 주셔서, 저를 사람으로, 동료로, 동생으로 대해주어 고마웠습니다. 정말 많이 배웠어요. 아직까지도 당신에게 배울 것이 있어요. 무엇보다 가끔 떠오르는 사람이 당신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기억이 희미해지는 날까지 더 쓸게요. 좋은 것을 쓸게요.
김복희, 시인
2031년 2월의 나에게
잘 지내니? 오랫동안 글을 써왔지만 “잘 지내니?”와 “안녕” 말고는 편지를 시작하는 법을 모르겠어. 다가올 10년 동안 네가 근사한 인사말을 발견해주면 좋으련만.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짐작할 엄두조차 못 내면서 10년 뒤의 나에게 편지를 쓰는 나, 참 이상하지. 그런데 한밤중이 되면 가만가만 떠올리게 되잖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옛날로 한 발 한 발 거슬러 올라가잖아. 그리고 거기에는 어김없이 온갖 종류의 남루(襤褸)가 있지. 서투름 때문에 낡고 경솔함 때문에 해져버린 기억이 있지.
사랑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갈 때면 씁쓸해져. 기다렸다는 듯 내 잘못이 떠오르거든. 가장 먼저 떠올랐는데도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거든. 그때 왜 나는 그렇게 말했을까, 왜 조금 더 기다려주지 못했을까, 거기서 왜 그렇게 차갑게 뒤돌아섰을까…… ‘왜’라는 질문이 이어지면 어쩔 수 없이 후회하는 사람이 돼. 해서 후회하는 사람, 하지 않거나 하지 못해서 후회하는 사람. 돌이켜보니 지난 10년 동안 나는 줄곧 후회하는 사람이었어. 너는 후회하지 않았으면, 후회를 덜했으면, 아니 후회를 잘했으면 해. 후회 후에는 말개진 기분이었으면 해.
올해 나는 마흔이 되었어. 마흔을 가리켜 흔히들 불혹(不惑)이라고 하잖아. 미혹되지 않는 나이, 무엇에 홀리지 않는 나이, 정신이 헷갈려 갈팡질팡하지 않는 나이. 내가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자신은 없어. 내게는 시를 쓰는 일이 헤매는 일이니까. 그나저나 불혹의 나이의 내가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맞이할 네게 편지를 쓰는 거 참 이상하다. 지천명은 하늘의 뜻을 안다는 뜻일 텐데, 내 속도 모르는 내가 감히 하늘을 뜻을 파악할 수 있을까? 달성되기 힘든 일들이 앞으로 점점 더 많아지겠지. 슬기롭게 그 일들을 헤쳐 나간다면 10년 뒤 오늘 너를 만날 수 있겠지. 비로소 네가 되어 있을 테지.
나는 네가 궁금하다. 여전히 추위를 많이 탈지, 첫눈이 내릴 때 눈송이 하나를 손바닥 위에 얹은 뒤 그것이 녹을 때까지 바라볼지, 겨울이면 손이 터서 늘 핸드크림을 가지고 다닐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얼마나 변해 있을지,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지. 그사이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일지.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셈하고 있지는 않았으면 해. 거절 못해서 쩔쩔매고 있을 가능성은 여전할 테지만, 할 수 없는 일을 꾸역꾸역 해내다가 몸과 마음을 다치지는 않았으면 해. 너를 지킬 수 있었으면 해. 아무리 바쁘더라도 스스로를 지키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면 해.
잘 지내니? 다시 묻는다. 밤이면 나는 부끄러워지거든. 오늘만 돌아봐도 미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에 너무 무뚝뚝하게 응답했던 것은 아닌지, 서랍 정리를 하다 발견한 옛 사진을 보고 그 시절 내쉰 한숨을 괜히 소환했던 것은 아닌지, 용기가 없어서 고백도 사과도 안녕을 고하는 것도 제대로 못했던 것은 아닌지…… 미안할 일을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자책하면서 오늘 밤도 깊어간다. 아침도, 낮도 깊다고는 표현 안 하잖아. 밤은 하루 중 유일하게 깊이를 가진 시간이야. 깊은 밤에서 허우적대다가 잠이 든다.
부디 너는 나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이었으면 해.
p. s. 이 편지를 읽는 날, 10년 후의 너에게 편지를 썼으면 해.
오은, 시인
故김희준 시인에게
희준 시인의 소식을 들었던 작년 여름, 믿을 수 없는 전화 한 통을 받았어요. 그날은 기나긴 장마가 끝나고 땡볕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이라서 얼굴을 찡그려도 들키지 않았지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할 말이 없었어요. 부러진 나무처럼 한참을 서 있었지요. 고꾸라진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희준 시인이 생일이 되던 날에 시집이 나왔지요.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제가 받은 편지에는 제목이 있었네요. 쉼표로 문장이 끝나는 제목. 희준 시인의 시를 읽으며 들끓는 감각을 느꼈어요. 이제 이 언어들로 계속 살아가야 할 희준 시인의 또 다른 삶이 있겠지요. 그 삶을 한 권의 시집으로 대신 만나본 소감을 편지로 써보려고 해요. 분명히 읽어줄 거라고 믿으면서.
처음을 함께 하는 것. 희준 시인이 사는 통영에 갔을 때, 함께 횟집을 찾다가 좌판에 열린 무화과를 보고 희준 시인은 맛있겠다 말했지요. 저는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다고 말했고요. 우리는 무화과 한 아름을 사 들고 더운 차 속에 잠깐 내버려 두면서, 밤이 되어서야 그것들을 꺼내 먹었지요. 거긴 요트들이 빼곡하게 정박해 있던 어느 바닷가였는데, 밤에, 아무도 오지 않는 밤에, 우리는 무화과를 먹으며 간지러운 입술을 긁어대고, 서로의 별자리를 찾아보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지요. 제가 간직하는 통영의 기억이에요. 희준 시인이 제게 준 것이나 다름없지요. 이것이 우리가 함께 쓰다 만 시라고 생각해요.
누군가를 곡진히 생각하는 눈빛을 희준 시인에게서 읽은 적 있지요. 어머니인 강재남 시인을 생각하는 마음 있잖아요. 사랑은 정말 복잡한 것이로구나. 이불을 덮어주고도 덥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구나. 꽃이 가득 핀 언덕을 베어와도 향기가 날까 걱정하는 것이구나. 그 먹먹하고도 아름다운 마음으로 시를 썼겠구나 싶었어요. 나는 언제 그런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말했었나. 희준 시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꼭 보고 싶은 사람이 생각났어요. 사랑에 반사되어 나의 사랑을 돌이키게 만드는 힘 같은 거, 희준 시인에게만 있었던 것이죠.
이번 계절에는 문예지마다 희준 시인을 생각하는 시인들의 글로 가득 찼어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계속 연결되어 있는 것이구나 싶었어요. 희준 시인이 드리웠던 사랑을 톺아, 좋아하는 별자리가 되었을까, 다른 행성에 불시착했을까, 올리브 동산에 도착했을까 생각하던 겨울이 지나고 있습니다.
아직도 당장 연락하면, 선생님! 하고 어색한 호칭을 쓰며 기나긴 안부에 마음을 기울일 것 같은 희준 시인의 답장이 올 것 같아요. 그런 선연한 장면을 떠올리면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슬픔이 그려지니까요. 저는 제 슬픔을 닦으려고 편지를 쓰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많이 미안합니다만.
저는 이제 여기에서 시들어가는 시간을 잘 솎아내고 보살피며 둘레를 지킬 것 같아요. 희준이 도착한 그곳은 누구도 시들지 않고 들판에 부는 바람에도 끄떡없는 곳이리라 생각해요. 희준 시인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 많은 마음들, 어느 하나 닿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직 여기에는 희준 시인을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밤을 보내고 있답니다.
아직도 우리는 시로 함께 맺혀 있으니까, 어쨌든 우리는 유리창의 안과 밖에 동시에 흘러내리는 투명함으로 계속 살아내야겠지요. 희준 시인에게 못다 한 말이 참 많은데, 그런 말들은 차차 또 편지로 쓸게요. 받는 주소가 없으니 더 많은 곳에서 들춰볼 수 있을 거예요. 답장 대신에 나는 희준의 시집을 읽을게요. 이 독서는 끝나지 않을 것 같군요. 편지를 다 써도 누그러지지 않는 그리움이네요.
그래서 덕분에 환한 슬픔이에요. 거기에서도 보살펴야 할 것들이 많다면 자신을 더 살피고 있기를.
흐트러진 앞머리나 풀린 운동화 끈 같은 것을.
서윤후, 시인
당신에게
비행기가 갑자기 흔들릴 때
난기류를 만났다고
안전벨트 등이 꺼질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으라고
긴장된 목소리가 들릴 때
팔걸이를 꽉 잡아 손에 땀이 나
구름을 통과하고 있다면
어김없이 당신이 떠올라
남은 것은 건조한 바람과 태양
얼음과 흙
아름다운 속삭임에도 마음이 바닥으로
가라앉아 꼼짝도 하지 않을 때
모로 누워 벽을 바라봐
시신을 남기지 않는 죽음이었다면
영혼을 상상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염없이 바다를 보고 있으면
그날 밤은 어떤 꿈을 꾸었을까
그 새벽에 어디를 헤매고 있었나
시간이 자꾸 거꾸로 가
신화 속 당신을 얼핏 보았나
불멸은 꿈꾸지 않는 자의 몫
예언가의 일생은 명멸하는 미래
그만 눈을 감고 돌아 서
매일 손을 놓고 멍하니 앉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사람들이 물어
물 위에 떠 있을 때
바닥만 보고 걸을 때
여기에서 잠깐 사라질 때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모든 순간에
내가 잊은 것은
숨도 노래도 아니야
빛도 어둠도 아니야
거북이는 물속을 헤엄치고
넓은 바위 위에 올라와 등을 말리지
거짓말에만 속고 싶어
길은 한동안 조용하다
명왕성은 멸망하지 않아
태어나면서 내가 잃은 것은 당신,
영원
윤해서, 소설가
- 에디터
- 김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