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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민준의 마술같은 세계

2021.02.26GQ

박민준은 마술을 부리듯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다. 감탄이 나올 만큼 환상적으로.

LV 스테이플스 DNA 셔츠, 데님, LV 올리 스니커즈, 모두 루이 비통

화가에게 이렇게 첫 인사를 건네면 실례일까요? 소설 잘 읽었어요. 2018년과 작년에 각각 개인전 <라포르 서커스>, <두 개의 깃발>을 준비하면서 동명의 소설을 직접 집필했죠. 그 이야기를 듣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에게 말이라는 수단으로 작품을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어요. 그림에 담긴 이야기와 은유를 온전히 전달하는 게 불가능해요. 그래서 장황하더라도 글로 읽히면 좀 더 쉽게 이해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소설을 썼어요.

소설을 꼭 읽어야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걸까요? 읽어도 되고, 안 봐도 돼요. 소설의 내용을 고스란히 그림으로 옮기지는 않았어요. 소설은 그림을 보완하는 의미가 커요. 물론 작품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읽는 게 도움이 되겠죠. 그런데 생각보다 많이 안 읽더군요. 하하하.

이 땅이 우리에게 전하는 그리움의 표현, 그게 바로 중력인 거야. (중략) 그렇게 이 땅은 네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네가 죽는 날까지 언제나 똑같은 힘으로 사랑해왔고 또 사랑하고 있는 거야. 소설에는 이처럼 하도 좋아서 몇 번이나 다시 읽게 되는 구절이 여럿 나와요. 글 쓰는 데 소질이 있었던 건가요? 아내가 글을 잘 써요. 내가 소설을 쓴다고 했을 때 반대했어요. 잘 못 쓰는 걸 아니까. 처음에는 만연체의 긴 글이 됐어요. 표현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죠. 아내가 읽어보더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글 쓰는 공부를 나름 했지만 내 머릿속의 생각과 상상을 가장 합리적인 언어로 전달하는 방식은 아직도 서툴고 부담이 돼요. 그럼에도 내가 써야 내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합리화하고 있어요.

글과 그림이 결합함으로써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더욱 선명해지고 강화돼요. 예술의 언어를 구사하는 스토리텔러가 지향점에 가까울까요? 종교화에서 볼 수 있듯이 현대 미술 이전의 화가들은 스토리를 그림으로 재현하는 작업을 많이 했어요. 기본적으로 이야기가 바탕이 됐죠. 내 작업도 이것과 비슷해요. 처음에는 개인적인 경험을 주로 다뤘는데 점차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졌어요. 그렇게 해서 캐릭터를 하나씩 만들었고 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해 소설을 쓰게 됐어요.

형식에 얽매이지 않네요. 색다른 시도를 즐기는 건가요?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은 회화, 조각, 공예, 건축 분야에 걸쳐 두루 활동했어요. 그들처럼 내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 매체의 구애를 받고 싶지 않아요. 비록 소설가는 아니지만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언어로,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거죠.

소설뿐 아니라 조각 작품도 선보였어요. 그건 관객에게 보다 가깝게 다가가려는 의도로 만들었어요. 상상 속 인물이 좀 더 실제처럼 느껴질 수 있도록.

영상 작업에도 관심을 두고 있나요? 아, 무엇이든 내 손으로 다 해야 해요. 장점이자 단점이죠. 영상 작업은 기술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엄두를 못 내고 있지만 여건이 된다면 해보고 싶어요.

이토록 열정적인 창작자로 만든 동력의 정체는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편이에요. 배워서 부족함을 채울 수 있으면 배워야 해요. 미대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재료기법학과 과정을 수료한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유화 작업을 하는데 물감, 캔버스 등 재료에 대한 궁금증이 늘 있었어요.

작업실에 그림보다 책이 더 많고 신화, 설화 관련 서적이 여럿 눈에 띄어요. 신화는 상상의 한 형태인데, 과거 사람들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상상을 했어요. 문명이 고도화된 지금의 상상보다 훨씬 원초적이라는 느낌이 있죠.

어마어마한 상상력에 무엇이 일조했는지 언뜻 알 것 같아요.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화두는 뭔가요? 기본적으로 꿈과 이상에 대한 이야기를 붙잡고 있어요. 이상과 꿈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개념이에요. 내가 결코 이룰 수 없지만 논리적으로 따지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 이상이라면, 꿈은 완전히 허황된 쪽이죠. 작품으로 이야기하면, <라포르 서커스>는 되게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삶에 가까운 이야기가 깔려 있어요. 그보다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두 개의 깃발>은 오히려 꿈 같은 이야기를 썼어요.

<라포르 서커스>에 이런 글귀가 있어요. 마술은 상상을 현실처럼 만드는 일이야.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가능한 듯 보이게 만드는 거지. 그런 점에서 마술과 미술은 비슷하다고 봐도 될까요? 미술을 처음 배울 때 이차원적 그림을 입체적으로 보이게끔 하는 방법을 가르쳐줘요. 뒷부분은 흐리게, 앞부분은 좀 더 선명하게 그리는 식으로. 일종의 속임수라 할 수 있죠. 현실적이지 않은 뭔가를 사람들이 현실적이고 보다 극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것이 회화의 기능이라 생각해요.

그나저나 왜 서커스를 소재로 삼았나요? 그런 말이 있잖아요. 삶이란 성대한 축제, 한 편의 연극 같다고. 굉장히 공감해요. 이를 서커스에 빗대어 표현했어요. 서커스가 지닌 비주얼적 요소도 흥미롭지만 사람이 세상이라는 무대로 나와 일생을 살다가 천막 뒤로 퇴장한다는 의미가 크게 와 닿았어요.

<라포르 서커스>에는 맹인 곡예사, 사람과 대화하는 파란 원숭이, 복화술을 하는 꺽다리 관장, 인간 형상의 인형을 만드는 인형술사, 머리에서 나무가 자라는 동물 조련사 등 다양하고 별난 캐릭터가 생생하게 펼쳐져요. 가장 마음이 가는 인물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요? 우열을 가릴 수 없어요. 그들은 하나의 인물이기도 하거든요. 사람은 단 하나의 가치관이나 생각을 갖고 살지 않잖아요. 상황에 따라 특정 부분이 강조되어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어떤 사람으로 여겨질 뿐이죠. 마찬가지로 소설의 캐릭터들은 다 똑같은 사람이고, 각각 다른 부분이 강조됐기 때문에 다양한 인간 군상처럼 보이는 거예요.

자신을 빼닮은 자화상 같은 캐릭터도 있을까요? 아무래도 주인공 ‘라푸’라 할 수 있어요. 어릴 적 내 모습 같기도 해요.

라푸가 그린 그림이라는 설정의 작품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기존과 다른 다소 거칠고 어두운 필치에서 천재 곡예사인 쌍둥이 형을 질투하는 라푸의 구체적인 감정을 유추할 수 있었어요. 소설을 보면 알겠지만 라푸는 콤플렉스가 많아요. 저도 그랬어요. 내향적이고, 나서기 싫어하고. 라푸의 작품이라고 가정하면서 그림을 그린 것도 소극적인 태도가 반영된 게 아닌가 싶어요. 새로운 표현 방식을 시도했는데 직접 보여주기 뭣하니까, 라푸의 이름을 빌려 선보인 거죠. 서명도 아예 다르게 넣었어요.

화법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한다면 서양 고전회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들어요.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를 통해 인간이 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아름다움의 표본이 완성됐다고 봐요. 그 당시 창출된 작품의 숭고미를 존경해요. 역사처럼 문화예술도 정반합의 논리에 의해 발전을 이뤄요. 과거의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하는 건 옳지 않아요. 가치가 있고 뛰어난 업적은 받아들이면서 나름의 해석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게 중요해요.

그렇군요. 요즘 몰두하고 있는 개념이나 현상은 무엇인가요? 예술가는 과연 이 시대에 무슨 일을 해야 할까, 그런 고민을 많이 해요. 해외에서는 사회적, 정치적 사안을 다룬 작업이 대세를 구가하고 있어요. 예술은 의식주를 초월한 고차원적인 영역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반면 정치는 의식주와 깊이 연결되어 있죠. 즉, 현실에 눈을 맞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주목받지 못하는 시대예요. 그 흐름을 나도 따라야 하는지 고민이 되는데 결국 자신한테 솔직한 작업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저는 삶과 예술을 철저히 분리하고 싶어요. 내 삶이 지극히 인간적이라면, 내 작업은 고차원적인 목표와 이상향을 추구해요.

예술은 현실에서 벗어나는 도피처 같다고 느끼나요?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 스스로 예술가라고 여기지 않아요. 작품이 예술이란 평가를 받아야 비로소 예술가가 될 수 있고, 그렇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려요. 그보다는 장인이 되고 싶어요. 내가 하는 일련의 작업은 그저 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장인처럼 주어진 시간 내에 최선을 다해 가치 있는 작품을 만드는 거죠. 우리의 삶은 유효하잖아요. 영원히 기억될 만한 작품을 남기고 싶어요.

일과 일상을 분리하는 편인가요? 그러려고 해요. 무리하게 작업을 하지 않아요. 억지로 짜내면 결과가 좋지 않더라고요. 컨디션이 좋은 상태에서 작업을 하고 에너지가 바닥이구나 싶으면 집으로 돌아가요.

작업실 한쪽에 은밀하게 놓인 드로잉 작.

작업실 책상에 빽빽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신화, 설화 관련 서적. 상상력의 기틀이 되어준다.

이성적인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대단히 현실적인 사람이에요. 되게 이성적이라는 얘기도 자주 듣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해요. 이를테면 큰 결정을 내리기 전에 고민을 정말 많이 해요. 최악의 상황까지 따져요. 숙고 끝에 결정을 내리면 후회를 거의 하지 않아요. 설령 안 좋은 상황이 생기면 이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거라고 받아들여요.

그런 성향은 이 일을 하기에 얼마나 적합한가요? 작가라 하면 감정적이고 격정적인 사람이 대체로 많아요. 저는 그들과 반대되는 성격이에요. 따지고 보면 이성적으로 그림을 그린 푸생, 얀 반 에이크를 무척 좋아했어요. 학자 타입이라 할 수 있죠.

대담하고 철저한 사실주의적 화풍으로 잘 알려진 카라바조의 영향도 크게 받았죠? 그가 그린 의심하는 도마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일화를 들었어요. 그 작품을 보자마자 각성의 순간을 경험했어요. 카라바조는 그야말로 자유분방하고 충동적이며 파격적인 삶을 살았어요. 그런 그에게 끌렸던 건 내게 없는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는 누구인가요? 노벨상 수상 작가인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마술적 사실주의의 창시자인데, 그가 쓴 소설 <백년의 고독>을 읽고 작업의 방향성을 찾았어요. <라포르 서커스>의 발화점이었죠. 그리고 한강의 소설을 읽으면서 글 안에서도 유려한 리듬과 율동감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어요. 분야는 다르지만 존경스러워요.

전시 제목을 먼저 짓고 나서 그림을 그린다고요. 인생을 한 권의 책으로 엮는다면 어떤 제목이 좋을까요? 음, 지금 당장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네요.

그럼 이정표처럼 지금까지의 삶을 이끈 강력한 단어는 무엇인가요? 균형이 아닐까 싶어요. 어떤 행동이든 생각이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요. 중용이라는 말도 있고요. 너무 넘치지도, 부족하지 않은 수준에서 계속 더 나아갈 수 있길 원해요.

균형을 맞추는 구체적인 방법을 터득했나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혼자 시간을 보내는 거예요. 가급적 만남을 자제하고 자기 일에 열중하다 보면 사람들에게 휘둘리는 일이 거의 없어요. 일주일 동안 말을 하는 시간보다 그렇지 않은 시간이 더 많죠. 아내는 내가 말이 많다고 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어요. 묵혀둔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다 보니, 하하.

그렇게 사는 거, 답답하지 않나요? 가끔 이런 삶이 내게 맞는 건지 의문이 들기도 해요. 하지만 누구에게나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삶은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다들 적응하고 받아들이며 사는 거죠. 누군가는 출퇴근의 스트레스 없이 원하는 시간에 작업실에 나와서 좋아하는 그림을 마구 그리는 내 삶을 부러워할지도 몰라요.

<두 개의 깃발>은 숫자에 여러 은유를 담았어요. 2는 인간의 숫자로 삶과 죽음, 음과 양, 빛과 어둠 등 대칭을 상징하고, 3은 완결성을 가지며 신의 영역에 가까운 숫자라고 했죠. 그래서 물어보고 싶어요. 신이 인간에게 베푸는 행운의 숫자 같은 것도 있나요? 글쎄요. 살면서 요행이나 기적을 바라지 않아요. 만약 행운이 내 손에 들어온다고 해도 함부로 그걸 쓰면 안 될 것 같아요. 그 대가로 왠지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아서요. 내가 노력한 만큼 성취감과 행복을 느끼는 게 좋아요.

그림은 어때요? 노력을 배신하지 않나요? 네, 대체로 그 노력만큼 결과를 얻었어요.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게.

, 2016~17, Oil on Canvas, 210x291cm.

, 2016-17, Oil on Canvas, 162×120cm.

, 2018, Oil on Canvas, 53×45cm.

, Oil on Canvas, 162×120cm.

    피처 에디터
    김영재
    패션 에디터
    김유진
    포토그래퍼
    이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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