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d&drink

21세기 당신에게 보내는 우리의 맛

2021.06.02김은희

멀리서나마 이 맛을 보냅니다.

밀감 알갱이를 담은 작은 글라스, 밀감화채를 담은 큰 글라스, 모두 글로리홀 라이트 세일즈.

밀감화채
밀감 알갱이를 한 알 한 알 떼며 말을 삼켰다. ‘쉽다고 했잖아요, 선생님.’ 여기서 알갱이란 밀감 한 조각의 얇은 속껍질 아래, 쌀알보다 작은 그 알갱이들이다. 알알이 뗀 밀감 알갱이를 설탕에 살짝 재웠다가 오미자 국물에 넣어 마시는 것. 요즘 젊은이들 입맛에도 맞고 쉽게 따라 만들 수 있는 전통 음료를 소개해달라고 하자 한국전통음식연구소 윤숙자 대표가 권한 마실 거리 밀감화채다. “우리 선조들이 특히 여름에 마시던 화채 종류예요. 밀감을 알알이 떼는 게 수고스러워도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오미자 국물은 오미자를 깨끗이 씻어 물기를 뺀 다음 한소끔 끓였다 식힌 물에 하룻밤 담가놓으면 됩니다. 바쁘면 그냥 꿀물에 타먹어도 되고요. 밀감도 설탕에 절이지 않아도 돼요. 요즘은 통조림이 얼마나 잘 나와요. 쉽게 쉽게,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지요.” 그러나 한 알 한 알 알갱이를 떼는 일에 집중할수록 “하나도 어렵지 않다”는 말이 와 닿는다. 방망이 깎는 노인의 마음이 이랬을까. 손끝에 집중되는 감각과 덕분에 말끔히 가라앉는 소음. 불현듯 알갱이가 제법 쌓인 걸 깨닫곤 성질 급한 나는 오미자 음료에 알갱이를 탈탈 털어 넣고 휘휘 저어 마셔버렸는데, 아, 알았다. 선조들이 왜 그 더위에 만들었는지. 오미자 맛과 함께 밀려 들어온 작은 밀감 알갱이가 온 입 안을 굴러다니는 생기란. 다가올 열기가 무섭지 않다.

가래떡 4개들이 4천5백원, 윤종희전통떡방. 백토 물에 사기를 담갔다 빼는 덤벙 기법으로 유약을 입혀 구운 접시, 스틸 라이프 × 정준영 at 챕터원.

가래떡
떡을 왜 먹어야 하는지, 떡이 무엇에 좋은지, 그런 멀리 있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 단단한 목소리의 그는 “쑥이 파릇한 4월에는 쑥버무리가 향긋하고, 단오가 있는 5월에는 수리취절편이 제맛이다”라는 말로 다가올 날들만 읊는다. 이름을 밝히기 쑥스럽다는 그는 윤종희전통떡방의 관계자다. 국가 무형문화재 제38조 조선왕조 궁중음식의 궁중병과 부문을 이수한 윤종희 선생이 진두지휘하는 떡방이다. 고종과 순종을 모신 마지막 수라상궁으로 유명한 한희순 선생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 음식 문화의 줄기다. 그사이 세월은 달라져서 기계로 쌀을 빻고 성형기로 떡을 뽑지만, 변하지 않는 규칙이 있다. “매일매일 떡을 찌죠.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니까. 요즘 사람들은 바쁘니까 떡을 냉동실에 얼려두었다가 에어프라이어에 구워 먹기도 한다던데 그것도 좋은 아이디어예요. 그런데 떡은 당일에 먹는 게 제일 좋습니다. 특히 절편, 가래떡 같은 메떡은 얼리면 퀄리티가 달라져요.” 그럼 어떻게 먹어야 맛있어요? “그냥 먹는 게 제일 맛있지.” 너털웃음을 짓던 그가 “이건 떡 하는 사람만 아는 건데…”라는 말과 함께 비장의 무기를 쥐여주었다. “특히 가래떡은 돌김에 싸서 먹어보세요. 밥에 김 말아 먹는 것과 비슷한데 조직감이 달라요. 아주…, 드셔보시면 알아요.”

개성주악 8개들이 1만8천원, 리프레쉬먼트. 옥색 보울, 스틸 라이프 × 지승민공기 at 챕터원.

개성주악
“조약돌을 닮아 조악이나 주악으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사진으로 볼 때보다 매우 작은 크기에 당황한 사이, 리프레쉬먼트 장현정 셰프가 곁에 와 신생아를 바라보듯 주악을 살폈다. 과연, 물가의 매끈한 조약돌 같다. 도넛도 연상되는 외관으로서는 의외로 떡으로 분류되는데, 기름에 지진 떡의 개념이다. 조선의 요리책이라 불리는 <수문사설>에는 주악이 “가장 귀한 손님의 접대나 제수에 반드시 올린다. 떡 중에 으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리프레쉬먼트는 권숙수의 권우중 셰프가 오너인 한식&모던 디저트 숍이다. 감태 치즈 타르트, 간장 피낭시에 같이 새로운 도전들 속에서 주악과 매작과만은 전통적이다. “주악은 물에 불린 찹쌀을 빻고, 거기에 밀가루와 막걸리, 소금을 살짝 넣어서 만든 반죽을 튀겨요. 그리고 주청(튀긴 다음 시럽에 담그는 과정)을 해요. 이 주청이 특히 중요해요. 저는 겉은 바삭하고 안은 달콤하면서 부드러운 게 주악의 매력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설탕만 쓰면 단맛이 되게 진하고 금세 질려요. 주악 하나 먹고 질리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장현정 셰프는 과일로 낸 즙을 시럽에 곁들인다. “과일의 단맛이 설탕의 단맛을 부드럽고 깔끔하게 중화해요.” 바삭, 부드러움, 단맛, 깔끔함. 점점이 흩어져 있는 듯한 묘사들은 조약돌 같은 주악을 한입에 넣어 씹는 순간 하나로 귀결된다. 이 맛 참, 진득하니 단정하네.

홍옥정과 개당 1천5백원, 김씨부인. 타원형 유리 보울, 하우아유투데이.

홍옥정과
“홍옥은 9월 중순부터 나기 시작해서 열흘, 길어야 보름 나오고 사라져요. 그러다 보니 홍옥을 키우는 농원이 별로 없어요. 철이 돼도 구하기가 힘들어요. 많이씩 팔지도 않아요. 찾는 사람이 많으니까. 홍옥 장수한테 달달달 빌어야 해.” 한식 디저트 카페 김씨부인의 김명숙 대표가 붉게 웃는다. 정성껏 구한 홍옥을 깨끗이 씻고 심지를 제거한다.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하는 보통의 방법은 홍옥을 반달 모양으로 썬 뒤 쪄서 말리고 꿀물이나 물엿물에 담갔다 뺀다. 김명숙 대표는 설탕과 꿀로 만든 시럽물을 끓이다, 2~3밀리미터 정도의 얇은 두께로 동그랗게 썬 홍옥을 넣었다 건진다. “호흡 하나, 둘, 셋 사이에도 변해요. 잘 보고 있다가 껍질에서 과육 안쪽으로 붉은 색깔이 살짝 스며들 때, 그때 건져야 해요.” 기민하게 건져서 느긋이 말리고 설탕을 솔솔 뿌려 또 말린다. 이렇게 만든 9월의 홍옥정과는 냉동실에 보관해두고 1년 내내 손님상에 낸다. “원래는 지금 드린 것보다 색이 더 예뻐요. 저장해둔 게 끝물이라 어쩔 수 없네. 제가 영천에서 홍옥을 받아오거든요? 올여름엔 내려가서 인사라도 한번 더 해야 하나 그래요. 귀한 아이 얻으려면 그래야지.” 예쁘지만 별맛 없을 거라는 김명숙 대표의 말은 겸양이다. 살얼음처럼 내려앉은 설탕 알갱이와 함께 사각 씹히던 홍옥정과의 새큼하고 달큰한 맛에 지금도 침이 고이는데.

    피처 에디터
    김은희
    포토그래퍼
    김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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