줏대 있는 미술을 해라 | 지큐 코리아 (GQ Korea)

줏대 있는 미술을 해라

2021-11-25T17:45:32+00:00 |culture|

국내 아트 신이 이례적인 흥행을 맞이했다. 열리는 전시, 페어마다 대단한 인파가 몰려든다. 이 급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단단한 기준이 필요하다.

얼떨결에 첫 작품을 구매했다. 사건은 갤러리에 근무하는 지인을 만난 날 일어났다. 평소처럼 카페에 앉아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문득 그가 최근에 본 전시 중 추천할 만한 게 있냐 물었다. 때마침 오랫동안 좋아했던 모 작가의 개인전이 모 갤러리에서 열렸던 터라, 팬심을 조금 더해 ‘작품을 사고 싶을 만큼 근사한 전시’이니 꼭 가보라는 추천사를 쏟아냈다. “이참에 하나 사세요.” 가만히 듣고 있던 그는 자신이 마침 그 갤러리 대표를, 아니 작품 리스트 파일을 받아주겠다 슬며시 부추겼다.
감히 작품을? 내가? 취미가 전시 감상이지만, 구매는 단 한 번도 고려해본 적 없다. 왜? 가격대를 가늠하기 어려우니까. 대다수 작품가는 베일에 싸여있는 데다, 그나마 공개된 사례도 몇 억을 호가하는지라 ‘비싸다’란 인식이 막연했다. 또 호기롭게 리스트를 받았는데 너무 비싸서 못 사면 민망해질 테고. 괜히 복잡한 일 만들지 말자싶어,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다. 한데 지인은 “PDF는 공짜다”라는 명언(?)을 날리곤 곧장 해당 갤러리 디렉터에게 파일 하나를 받아냈다. 그렇게 나는 엉겁결에 첫 작품을 품에 안았다. 컬렉터가 된 걸 환영한다는 축하 인사와 함께.


컬렉터는 부유한 단어다. 역사적으로 그랬다. 15세기, 금융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메디치 가문은 평생을 명작 수집에 몰두했다. LVMH의 수장 베르나르 아르노, 케링 그룹 프랑수아 피노, 록펠러가의 3세 데이비드 록펠러 등 돈 좀 있는 사람들의 취미는 하나같이 아트 컬렉팅이다. 세계적인 예술 시장 아트 바젤의 VIP 오픈 날은 작품보다 호사스러운 컬렉터에 눈이 갈 정도다. 슈퍼 리치의 동의어와도 같은 단어인데, 고작 한 점 산(게다가 나이도 어린) 내가 컬렉터라니. 영 와닿지 않았다. 한데 지인을 비롯해 여러 현직자는 요즘 미술 시장에는 작품 몇 점으로 컬렉팅을 시작한 20~30대, 즉 밀레니얼 세대가 대거 진입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그리고 아트 신의 대중화를 목전에 두고 있다고 덧붙였다.
컬렉터의 나이대가 낮아진 건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다. 그 단서는 최근 3년 사이, 확연히 달라진 미술관 풍경에 있다. 대표적 예가 서울시립미술관의 <데이비드 호크니>전이다. 과감한 컬러와 직관적 구도가 특징인 호크니 작업은 감상이 어렵지 않고, ‘사진발’도 잘 받는다. 여기서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리면 문화생활을 즐기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 데다 비주얼도 괜찮다. SNS로 자기표현을 하는 밀레니얼에게 미술관이 인증샷 맛집으로 등극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미술의 참맛을 알게 된 이들의 행보는 거침이 없다. 국공립 미술관에 이어 국제갤러리, 갤러리바톤, 페이스갤러리 같은 갤러리 섭렵에 나섰다. 주말에 가도 한산했던 갤러리는 이제 오픈런을 해야 입장이 가능하다. 파도가 몰아치는 미디어 작업을 설치한 국제갤러리의 <Starry Beach>전은 갤러리 오픈 시간인 10시와 동시에 전 타임 입장 마감이란 기록을 세웠다. 작품도 신선했지만, SNS에 게시하기 좋은 전시로 입소문이 난 이유도 간과하기 어렵다.(RM의 방문 인증샷도 한몫했다.) 상업화랑, 취미가, 웨스 등 아는 사람만 찾는다는 소규모 공간도 예외는 아니었다. 6평 남짓한 소규모 공간에서는 작품의 숨결까지 느낄 수 있었는데, 이젠 누군가의 인증샷 배경이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해야 할 마당이다.

VVIP 프리뷰인 개막 첫날, 3백50억 매출을 올린 ‘키아프 서울 2021’ 흥행 배경에도 밀레니얼 세대가 있다. 미술을 향한 관심뿐만 아니라 코로나19로 인해 높아진 투자 열기가 주식, 비트코인에 이어 작품으로 이동했기 때문. 아트 페어 매출의 절반 이상이 VIP 프리뷰 날 발생하는 일은 일반적이지만, 절대적인 물량 자체가 부족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기록적인 매출뿐만 아니라 작품 판매 비중이 단색화를 벗어나 균등했다는 결과도 밀레니얼 컬렉터가 낳았다. 키아프는 이렇게 말한다. “2019년부터 젊은 세대의 아트 페어 방문이 부쩍 늘었다. 주식이나 비트코인 등 투자도 다방면으로 하는 이들에게 미술품은 매력적인 품목으로 떠올라 더 주목도가 높다. 이제 막 컬렉팅을 시작한 젊은 세대는 기존 세대와 달리 정보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빠르다. 그리고 자신만의 테이스트가 드러나는 작품을 선호하기에 작가군을 다양하게 운영하려는 니즈가 있다.”
대중화는 아트 신의 오랜 염원이었다. 그들을 공간으로 이끌고자 교육, 행사, 심지어 DJ 파티까지 열며 부단히 노력해왔다. 그렇기에 관람객, 그것도 젊은 세대가 전시장과 아트 페어를 가득 채운 지금 모습은 미술계가 오랫동안 그리던 ‘대중화’의 실현이다. 부쩍 늘어난 관람객 덕에 팬데믹에서도 굵직한 비엔날레를 성공리에 개최하고, 역대급 시장 호황까지 찾아왔으니 꽃길 걸을 일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명과 암이 공존한다. 요즘 인증샷 전시가 부쩍 늘었다. 대가의 명작을 미디어로 재해석한 뒤, 그럴싸한 포토존을 만들어놓은 전시들. 원작은 없다. 본래 전시란 실물 작품의 감동을 주는 장소지 사진을 위한 곳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전시는 SNS 바이럴을 위해 주객을 쉽게 전도해버린다. 미술의 본질인 ‘감동’은 가볍게 지워지고, 전시는 결국 인생샷 스폿으로 전락하고 만다. 오로지 투자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도 잘못된 대중화가 늘어뜨린 그림자다. 미술 작품은 취득세와 소유세가 없다. 여기에 값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더해져 무분별한 투자를 종용하는 듯하지만, 경제 불황에서 미술도 예외는 아니다. 일례로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그해 열린 경매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게다가 작품 구매는 투자와 동시에 작가 후원의 창구이자 다양한 예술 탄생의 원천이기도 하다. 오로지 돈을 좇는 매입은 작가와 컬렉터가 그리는 선순환 생태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

미술 대중화의 주축인 밀레니얼의 니즈에 따라, 앞으로의 방향성을 인증샷 맛집이나 단순 투자처로 틀면 다양성이란 매력을 잃을지 모른다. 한철 유행을 따르면 색깔을 잃는다. 바로 지금이 줏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좋은 전시, 좋은 작품을 판가름할 수 있는 각자의 기준을 세워야 한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많이 보면 된다. 자주 보면 안목은 저절로 생긴다.(공부를 하면 더 좋다!) 전문가의 의견을 더하고자, 갤러리바톤에 조언을 구했다. “최근 미술품 공동구매 플랫폼 증가와 작품 재판매 기간이 짧아지고 있는 시장 상황은, 투자 측면에서 작품을 구입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증명한다. 물론 작가, 작품의 이력, 미래 가치 등은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처음 컬렉팅을 시작한다면 무조건적인 투자보다는 본인이 소장하고 싶은 작품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이 더 중요하다. 영화 <킹스맨>의 ‘Manners Maketh Man’이라는 명대사처럼 컬렉팅은 개인의 취향, 관심사 그리고 시대를 주도하는 미술사조 및 작가에 따라 축적되고 성장한다. 따라서 자신의 취향을 알고 열린 마음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안목을 가다듬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안목이 좋은 컬렉터를 만든다.”
아르노 회장은 명품처럼 화려하고 비즈니스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명작을 고집했고, 미우치아 프라다는 실험적인 작품을 수집함으로써 작가들을 후원했다. 두 컬렉터의 줏대 있는 수집은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과 폰다지오네 프라다 설립이란 결실을 맺어, 미술 대중화에도 기여했다. 높은 수치가 곧 대중화는 아니다. 진정한 대중화란 명확한 기준이 있을 때 온다. 글 / 이효정(프리랜스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