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 상승 중인 손흥민의 궤적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우승 경쟁권 클럽들은 과연 손흥민을 데려갈 수 있을까?
2005년 박지성을 시작으로 우리는 10년 넘게 한국인 프리미어리그 선수들을 지켜보면서 몇 가지 공통된 경험을 했다. 경기 당일 선발 출전 여부를 초조히 기다린다. 벤치에서 출발하면 1분이라도 빨리 나오길 고대한다. 18인 엔트리에서 제외되면 선수 부모라도 된 것처럼 걱정한다. 무엇보다 일단 유럽 리그에만 진출해주면, 뛰기만 해주면 열광하고 응원하고 지지했다. 손흥민의 출현 이후 대한민국 축구 팬들의 눈높이는 수직 상승했다. 몸만 멀쩡하면 언제나 손흥민은 선발 출전하기 때문이다. 팬들의 관심사는 ‘5경기 연속 득점에 성공할지’,’이번 경기에선 몇 골을 넣을지’등이지, ‘이번 경기에 출전할까’가 아니다. 손흥민이 만든 변화다. 박지성 시절부터 프리미어리그 한국인 선수를 팔로잉하는 경험자라면 이게 꽤 사치스러운 변화라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2021-22시즌은 손흥민의 프로 열두 번째 시즌이다. 2010년 10월 독일 함부르크 소속으로 프로 데뷔전을 치른 이래 손흥민의 그래프는 줄곧 상승했다. 두 번의 이적 모두 더 큰 클럽과 높은 리그를 향했고, 그때마다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 그리고 토트넘 홋스퍼에서 보낸 첫 두 시즌이 손흥민의 능력을 상징한다. 2015-16시즌, 손흥민은 팀 내에 안착하지 못했다. 시즌 종료 후, 토트넘을 떠나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대니얼 레비 회장의 회유에 잡혀 잔류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시작한 2016-17시즌. 손흥민은 리그 14골로 응답했다.
방대한 데이터를 자랑하는 <트랜스퍼마르크트>는 손흥민의 이적료를 8천만유로(약 1천85억원)로 매긴다. 프리미어리그 전체에서 10위, 전 세계로 넓혀도 15위에 해당하는 ‘월드클래스’ 몸값이다. 2018-19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8강전에서 잉글랜드 최강자 맨체스터시티를 상대로 두 경기에서 3골을 몰아쳐 팀의 결승 진출 토대를 닦았다. 2019-20시즌 번리전 득점은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골’을 넘어 FIFA 푸스카스상까지 차지했다. 2022년 1월 10일 기준 손흥민은 토트넘 역대 득점 13위(116골), 역대 리그 득점 10위(78골)에 올라 있다. 레비 회장이 이런 선수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토트넘은 처음 영입한 2015년 이후 두 번에 걸친 재계약으로 손흥민의 선수등록권을 탄탄히 확보해뒀다.
그런데 2021년 여름 재계약 소식에 대한민국 축구 팬들은 흥미로운 반응을 보였다. 인기 클럽에서 가치를 인정받았으니 축하해야 할 일인 것 같은데, 여기저기서 아쉽다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토트넘에서 전성기를 보내기엔 손흥민의 능력이 아깝다는 원망이었다. 이제 팬들은 손흥민이 훨씬 큰 클럽에서 우승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팬들의 일반적인 욕심일까? 아니다. 팬들은 5년에 걸쳐 손흥민의 맹폭을 직접 목격했다. 손흥민이 직접 올린 세상의 눈높이가 해당 고도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할 뿐이다.
다만 지금 당장 손흥민이 우승 경쟁권 클럽으로 이적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토트넘은 손흥민의 선수등록 권리를 2025년 여름까지 확보했다. 계약 만료까지 3년이나 남은 선수의 이적 협상에서 칼자루를 쥐는 쪽은 현 소속팀이다. 손흥민이 올해 여름 30세가 된다고 해도 여전히 최전성기 구간에 있다. 이렇다 할 이적료 하락 변수가 없으니 손흥민의 몸값은 당분간 현재 수준을 유지할 것이다. 그러니까 2025년 전까지 손흥민을 영입하려는 클럽은 현금이든 선수를 끼우든 최소 1억 유로 이상을 준비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1억 유로짜리 협상은 중동 슈퍼리치가 소유한 클럽(맨시티, 파리생제르맹, 뉴캐슬)이라도 선뜻 나서기 쉽지 않은, 소위 ‘초대형 딜’이다.
그러면? 손흥민이 토트넘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그림이 가장 이상적이긴 하다. 최소한 토트넘의 방향성은 긍정적이다. 2014년부터 2019년까지 토트넘은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감독과 함께 약진했다. 매 시즌 탄탄한 수입원인 UEFA 챔피언스리그 출전을 놓치지 않았다. 2018-19시즌에는 창단 첫 결승 진출에 성공해 위상을 드높였다. 그리고 해당 시즌 토트넘은 새로운 홈구장인 ‘토트넘홋스퍼 스타디움’을 개장했다. 홈경기 수용 인원수가 3만6천 명에서 단숨에 6만2천 명으로 80퍼센트 가까이 증가했다. 코로나19로 무관중 직격탄을 맞긴 했지만, 새 경기장은 택시 미터기처럼 시간이 갈수록 돈을 벌어들일 캐시카우다. 세상 둘째가라면 서러울 값비싼 런던 부동산 시장에서 이런 규모의 재개발 사업을 성사했다는 사실 자체가 클럽 가치를 올리는 ‘대박 호재’에 해당한다. 나아가 올 시즌 안토니오 콘테 감독을 영입하는 행운도 누렸다. ‘자중지란’만 없으면 토트넘은 앞으로 강해질 가능성이 크다.
물론 헤비급 클럽들도 쉼 없이 근육을 단련한다. 2021-22시즌 일정이 반환점을 돈 시점에서 맨시티는 프리미어리그 타이틀을 거의 손에 넣었다. 리버풀은 위르겐 클롭 감독과 현존 ‘월드넘버원’ 모하메드 살라가 건재하고, 첼시도 토마스 투헬 감독의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기세를 이어간다는 각오가 대단하다. 맨유도 랄프랑닉 체제 아래서 본격적 리빌딩에 착수했고, 런던 라이벌 아스널도 미켈 아르테타 감독이 드디어 개화하면서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토트넘의 근미래가 밝다고 해도 최정상에 도전할 만한 조도는 아니라는 진단이 현실적이다.
그렇다면 역사적 재능인 손흥민은 축구화를 벗기 전 어디까지 더 올라갈 수 있을까? 프리미어리그 몸값 톱 10 슈퍼스타는 토트넘 레전드보다 고귀한 명예를 얻을 수 있을까? 토트넘의 최근 20년사가 힌트를 줄지 모른다.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선수’ 출신인 가레스 베일은 2013년 토트넘을 떠나 레알마드리드에서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4회, FIFA 클럽 월드컵 우승 3회, 라리가 우승 2회 등 트로피 샤워에 흠뻑 젖었다. 그보다 1년 전 토트넘을 떠난 루카 모드리치도 같은 실적과 함께 2018년 발롱도르까지 안았다. 2008년 토트넘에서 맨유로 이적한 디미타르 베르바토프는 프리미어리그 우승 2회를 기록했고, 2006년 같은 길을 걸은 마이클 캐릭의 프리미어리그 우승 횟수는 5회에 달한다. 흥미롭게도 이들 모두 토트넘에서 탈출한 이후 우승의 맛을 봤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손흥민을 비롯한 선수들은 개인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도 있다. 그러나 팀 스포츠의 최고 가치는 우승이다. 개인 기록과 우승 실적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바로 기억 지속력이다. 세상은 개인의 성취보다 우승 실적을 바탕으로 선수를 추억한다. 쉬운 예가 있다. 손흥민이 세 차례 수상한 ‘프리미어리그 이달의 선수’ 어워드다. 자랑스러운 타이틀임은 분명하지만, 세상은 10년 전 우승팀을 생생히 기억할지언정 바로 지난달 ‘프리미어리그 이달의 선수’가 누구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이미 역사적 수준에 도달한 손흥민을 향해 우리는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큰 도전에 나서주길 바란다. 하지만 무엇보다 팀을 생각하는 그의 플레이를 바라보며, 한편으로는 토트넘의 유니폼을 입고 우승 트로피를 번쩍 들어올리는 장면만큼 또렷한 상상은 하기 어렵다. 그래서 2021-22시즌, 우승을 향한 손흥민의 궤적을 우리는 일단 간절한 마음으로 응원할 수밖에! 글 / 홍재민(축구 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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