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사람이 많을 때 방의 어디에 머무릅니까?

2022.05.04김은희

해당 조직 문화에 부합하는 인재인지 판가름하는 ‘컬처 핏’ 인사 전형이 그간의 기업 인적성 검사나 현재의 MBTI 놀이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얼마 전 20년 지기 친구들과 식사 자리에서 MBTI를 물어본 적이 있다. 모두 한국에 갈 때마다 꾸준히 만나는 친구로 다들 워낙 잘 맞기도 하고 만나면 언제나 편안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동안 미처 각자 어떤 타입인지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친구 5명 중 4명이 ENTP였고 1명이 ENFP였다. MBTI에 16가지 유형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이건 확률적으로 너무나 뚜렷한 경향성이었다.
평소 ENTP와 ENFP가 잘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 내향적인 나와는 전혀 다르면서도 비슷한 이 타입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ENTP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다. 그들의 비판적인 시각과 논쟁을 좋아하는 성격 덕분에 항상 흥미로운 화제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ENFP들은 기본적으로 파티 피플들이라 흥이 많다. 평소 아주 낮은 상태로 유지되는 나의 에너지 레벨이 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급격히 상승한다. ENFP 친구들은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나를 세상 밖으로 꺼내주는 구원자들이었다. 물론 MBTI를 보고 친구를 만나는 건 아니지만 이미 친한 사람들이 다 비슷한 MBTI라는 점은 역시 흥미롭다.

우선 내가 INTP이며 MBTI 과몰입 상태라는 것을 미리 밝히는 것이 좋겠다. MBTI가 과학적 방법론에 기반한 객관적인 도구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이 성격론이 가진 문제점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MBTI의 그 선명한 이분법에 끌린다. 외향형과 내향형, 감각형과 직관형, 사고형과 감정형, 판단형과 인식형의 4가지 기준 모두 꽤 그럴 법하다. 돌이켜보면 나의 MBTI 과몰입은 오래된 일이다. 그때만 해도 유사 과학 성격론의 대세는 혈액형이었다.(당시 나는 혈액형에 과몰입해 있었다.) 친구와 둘이 연구회를 만들어 혈액형과 성격의 상관관계를 탐구했는데 우리들의 연구 질문은 이런 것들이었다. “사진을 찍을 때 V자를 하는 사람의 혈액형은 무엇인가?”, “혈액형 성격론을 믿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의 혈액형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가 혈액형을 알고 있는 지인들의 사진을 분석해 사진 속 특징적인 포즈와 혈액형을 엑셀에 입력해나갔다. 당시 우리가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A형들이 사진 찍을 때 V자를 하는 경향이 있었고, O형 중에 혈액형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았지만 통계적 검정을 할 정도의 표본을 모으는 데는 실패했다. 그리고 이렇게 쓸데없는 일을 하는 우리는 둘 다 B형이었다.
혈액형 성격론이든 MBTI 열풍이든 기저에는 나와 상대를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이 존재한다. 서로 비슷한 사람과 동질감을 느끼고, 서로 다르지만 궁합이 잘 맞는 사람과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내가 20년 넘게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친구를 만난 것은 많은 부분 행운이었으나, 하지만 만약에 이 결정을 행운에 맡기지 않을 수 있다면 인간관계는 얼마나 편리해질까? 그래서 종종 혈액형이나 MBTI를 어떤 사람에 대한 판단의 도구로 쓰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실제로 얼마전 “INFP, INTP, INTJ는 지원 불가”라고 명시한 모집 공고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특정 혈액형을 채용 과정에서 제한하는 것은 누구나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MBTI도 비슷하다. 특히 자기 보고 형태의 검사라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 원하는 모습을 상정하고 대답을 지어내어 거기에 맞출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MBTI만의 단점은 아니다. 이미 이런 자기 보고 형태의 테스트로 평가를 받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대기업 인적성 검사다.
참고로 나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 인적성 검사에서 모두 떨어졌다. 내 나름대로는 대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에 맞춰서 대답했다고 생각했다. “상사의 부정을 목격하면 신고하겠느냐?” 같은 상식적인 질문에는 “그렇다”고 상식적으로 대답했다. 대답이 너무 상식적이어서였을까? 어떤 이유에선지 국내 대기업들은 내가 자신들과 맞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 것 같다. 이 인적성 검사가 MBTI보다 얼마나 더 객관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설사 검사 방법의 한계가 있다고 해도 그걸 근거로 왜 나를 떨어뜨렸냐고 회사에 항의할 수도 없는 일이다.
채용은 지원자에 대한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최적의 판단을 내려야 하는 과정이다. 구직자 입장에서도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이 이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회사는 직무 전문성을 갖추고 해당 업무를 잘해낼 사람을 찾고 있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컬처 핏Culture Fit을 본다. 기업의 문화에 지원자가 어울리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컬처 핏은 얼마나 객관적인가? 또는 객관과 주관이 정확하게 나누어지는 지점을 찾을 수 있을까?

예전에 면접에서 “이름으로 삼행시를 지어보라”는 말을 듣고 삼행시와 직무가 어떤 관련이 있느냐고 물어봤다가 떨어진 적이 있다. 직무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니 이 역시 컬처 핏을 묻는 질문이었을까? ‘위에서 까라면 까야 한다’는 컬처 핏에 맞지 않아서 불합격한 걸까? 회사 문화에 적합한 삼행시를 지어 면접관을 흡족하게 했다면 합격했을까? 여전히 알 수 없다. 모 컨설팅 회사의 최종 면접에서도 떨어진 적이 있다.(참 많이 떨어졌다.) 사실 면접이란 것이 딱히 별게 없었다. 그냥 대표님 사무실에 가서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었던 3명 중 나만 떨어졌다. 아직도 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직원 채용 면접 시 MBTI를 반드시 물어봅니다. 특히 INTJ, INFP는 컬처 핏이 맞지 않아 절대 뽑지 않습니다”라는 스타트업 김대표(@kstartupceo ,”반노동, 반인권, 성차별 발언이 담긴 녹취와 제보를 바탕으로 작성”하는 가상 인물의 트위터 계정. 비이성적인 스타트업의 행태를 풍자한다)의 트윗은 누군가의 실제 경험담처럼 들린다. 배달의민족이 자신들의 컬처 핏에 맞는 사람을 찾기 위해 새롭게 도입한다는 120개의 문항의 WSP Working Style Profile는 특정 MBTI를 뽑지 않는다는 스타트업 김대표에서 얼마나 더 나아갔을지 모르겠다.
취업 시장은 뽑는 쪽에서는 언제나 사람이 부족하고 구직자의 입장에서도 갈 수 있는 회사가 많지 않은 이상한 곳이다. 내가 지원할 때는 경쟁률이 엄청나게 높다는 느낌이지만 반대로 내가 뽑는 입장이 되면 막상 괜찮은 사람이 없다. 그건 아마도 서로가 서로에게 딱 맞는 대상을 찾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회사들 역시 컬처 핏에 과몰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을 회사와 맞는 사람과 맞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하는 선명한 이분법은 여전히 매력적인 것이다.
대기업 인적성 검사가 구닥다리 혈액형 성격론이라면 컬처 핏은 채용 시장의 MBTI가 되었다. 넷플릭스가 자신들의 조직 문화를 설명한 컬처 덱Culture Deck을 공개한 10여 년 전쯤부터 점점 더 많은 기업이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넷플릭스는 탁월함을, 토스는 몰입을 이야기하고 쿠팡은 고객을, 배민은 배민다움을 이야기한다. 뭘 검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인적성 검사에 비해 컬처 핏은 더 선명하고 더 세분화되고 더 재미있고 더 그럴듯해 보인다.

“배를 만들고 싶다면, 사람들이 나무를 모으고 일을 분담하게 시키는대신 넓고 끝없는 바다를 동경하게 하라.” 생텍쥐페리의 이 말은 기업 문화가 같은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끌어주는지 보여주는 잠언처럼 쓰인다. 하지만 현실 세계 속 채용 과정에서 컬처 핏이란 거대한 비전을 공유하는 일이 되기보다는 결국 닮은 꼴을 찾는 일이 되기 쉽다. 기업 문화로 라벨링된 특정 성향의 사람을 편애하는 방식으로 오용된다. 자칫하면 비슷한 스펙을 갖추고 비슷한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여 비슷한 언어로 이야기하는 회사가 될 수도 있다.
채용 과정은 커트라인이 분명히 존재하는 시험이 아니라 짝을 찾는 소개팅 쪽에 더 가까워지고 있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언제든지 거절당할 수 있다. 운이 없다면 탈락의 근거가 삼행시나 정체를 알 수 없는 테스트가 될 수도 있다. 이력서가 사실은 지원자를 떨어뜨리는 데 더 많이 쓰이는 것처럼 컬처 핏은 세련된 거절의 도구일지도 모른다. 한편 불합격 통지가 반드시 내가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건 조금 안심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나도 언젠가 MBTI를 거절의 도구로 써보고 싶다. “제가 INTP라서 귀사에 입사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글 / 신현호(다국적 기업 전략 그룹원)

    피처 에디터
    김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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