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멈춘 그 시간 앞에 가방을 열고

2023.03.14김은희

그 시절도, 지금도 없어선 안될 추억의 흔적들.

진규문구사 → 복사, 팩스, 코팅

우리 아들 이름이 진규예요. 아들이 태어난 1980년부터 여기서 문구사 했으니 아들 나이랑 똑같지. 그 아들의 아들이 이제 이 앞 중학교에 다녀요. 아이들이 들락날락, 한창때는 밤 11시까지 문 열어뒀어. 이제 동네 문구사는 다 사라지고 나만 남았어요. 학교에서 준비물 다 준 지도 오래됐고, 다이소 같은 데서 싸게 팔기도 하고. 요즘 애들은 한 2~3년은 슬라임 많이 사가고, 포켓몬 카드도 유행했는데 물량이 없어 못 팔다가 요새 좀 풀려서 내놔도 이제는 인기가 시들해졌어요. 올해는 유행하는 게 아무것도 없네. 다 큰 대학생들이 옛날 물건 사러 올 때도 있어요. 라디오 만들기 교재처럼. 예전에는 이거 조립하는 인두도 팔고, 납도 팔고, 많이 팔았지. 이런 거 사러 온 사람, 스티커 사러 온 사람, 샤프만 사 모으는 사람, 하여튼 뭐가 됐든 옛날 것들 사러 와요. 궁금해서 물어봤어. 여기서 사다가 또 내다 팔기도 한다네? 다 추억이라고 하더라고. 아줌마, 아줌마 했던 애들이 결혼하고 와서는 이모, 이모 그래요. 같이 늙어가는 거야. 요즘은 복사하거나 팩스 보내러 오는 손님만 간간히 있어요. 젊은 사람들은 카톡 보내고 이메일 보내고 해도, 이 동네에는 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라 여기 와서 복사하고 팩스 보내는 게 편한 거예요. 이런 아날로그가 여전히 필요할 때가 있지.
김영순 ㅣ서울 은평구 불광로179ㅣ 02-352-0723ㅣ라디오 조립 키트 1만1천원

아림사문구 → 전산용품, 사무용품

예전에는 학교에서 과학의 날 대회를 열었어요. 고무동력 비행기 만들고, 물로켓 만들고. 과학 상자라고 이것저것 조립하고, 전구에 불 들어오게 만드는 재료 박스도 많이 나갔지. 초등학생은 1호나 2호짜리, 중학생은 좀 더 가짓수가 많은 3호 이상. 안에 든 재료로 풍차도 만들고, 탱크도 만들고, 그게 참 재밌었는데 요즘은 과학 대회를 안 해요. 나도 몰라, 왜 안 하는지. 그런데 신입생 수만 해도 요 앞 혜화초등학교가 1백 명이 안 된대. 예전에는 콩나물 교실이라고 한 반에 못해도 60명씩 있었는데 이제는 많아 봐야 20명이라잖아. 아이들이 없어요. 내가 여기 인수받아서 운영한 지는 39년 됐고, 아림사라는 역사로 보면 60년이 넘었대요. 동네 사람들 말이 그래. 이 앞 도로가 개천일 때부터 있었다고. 주변에 만화방이다 뭐다 많았는데 이제는 다 없어요. 나도 언제 문 닫을지 모르겠어.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 주고 싶은 물건 추천해 달라고요? 없어, 여기. 맨 장난감인데. 이건 물에 담가놓으면 새우가 꼬물꼬물 크는 새우 알인데 물을 수돗물로 하면 안 되고 생수를 받아서 조금 놔뒀다가 써야 해요. 이건 개미 키우는 건데 개미가 굴 파는 모습이 다 보여요. 요즘 젊은이들한테 뭘 추천해. 그냥 잘들 자라면 되지. 글쎄…, 이런 비행기 만들어 날리면 재미는 있을 거야.
손화준ㅣ 서울 종로구 혜화로ㅣ 27 02-763-0342 ㅣ초급용 글라이더 6천원.

옥인문구 → 코팅, 복사

여전히 잘나가는 물건요? 금전출납부. 잘나가진 않아도 찾는 사람들이 꼭 있어요. 돈 오고 가는 거 손으로 적는 재미가 있잖아요. 요즘 온라인으로 물건을 사고 팔아도 그 금전 관계는 아직 수기로 쓰는 사무실이 근처에 많아요. 그 장부를 가끔씩 복사하러 와요. 그래서 내가 알지. 그건 사실 재미 라기보다도 제 손으로 기록하는 어떤 습관 같은 거겠죠. 가계부 잘 쓰는 법? 나는 몰라. 나는 안 써요, 하하하. 사고 싶은 거 사고, 아끼고 싶은 건 아끼고, 그러면 되겠지. 이 시계는 옛날에 시간 읽는 법 가르치던 물건이에요. 초등학교 1학년생들용. 요즘도 이런 걸로 가르치려나 모르겠네. 이제는 디지털 시계라서 이렇게 시침, 분침, 시간 읽는 걸 모르기도 한다네? 세상이 변했죠. 애들도 없고 운영하기 점점 더 힘들어져도 주민들이 동네에 이런 가게 하나 있으면 편하다고 하는 게 버팀목이에요. 이런 볼펜 하나에 3백원, 색연필 하나에 3백원…, 이런 거 한 자루 사려고 해도 이제는 큰 마트, 번화가에 가야 하잖아요. 필요할 때 가까이에서 살 수 있는 게 문방구인데 이용해야지 안 그럼 없어져. 서로 상생하는 입장에서 애용해주면 좋겠어요. 방금도 전지도 한 장 사가시고, 선물도 포장해가시고, 포켓몬 카드는 다 떨어지고 없었지만. 이제는 문방구라기보다 만물상이에요.
조해순ㅣ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ㅣ 55 02-737-3360 ㅣ모형 시계 5백원. 금전출납부 5천원. 모나미 볼펜과 색연필 각 3백원.

뽀빠이문구 → 완구, 실내화, 문구/펜시

이 가게가 지금 이 자리에 1970년대부터 있었어요. 원주인이던 아주머니가 여기 한 칸에 살림 살면서 장사했어요. 나는 1980년대부터 부산에서 문구사 하다가 여기 올라와서 이어받은 지 10년 넘었고요. 간판을 옛날 것 그대로 두고 운영했는데, 그래서 젊으신 분들도 와서 사진도 많이 찍어 가고 그랬는데, 재작년 가을엔가 구청에서 지역 상권 활성화한다고 예술인들한테 맡겨서 간판을 새로 만들어줬어요. 나는 아쉽지 않았는데 손님들은 아쉽다고 하더라고요. 요즘 말로 복고풍, 옛날 추억이 있는 간판이었으니까. 앞으로는 문구사가 점차 없어진다는 변화밖에 없어요. 문구사가 새로워질 만한 게 뭐 있겠어요. 세월이 너무 잘 가니까 어쩔 땐 서글프다니까. 이런 (보드)게임도 요즘 애들은 잘 알라나 모르겠네요. 요새는 다 스마트폰으로 게임 하잖아요. 우리 애들 어릴 때는 이런 거 펴놓고 모여서 같이 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예전에는 조립하는 이런 미니카도 엄청 잘 나갔거든요. 이건 다 옛날에 사둔 물건이고, 이제 이런 물건 파는 도매상도 없어요. 소매상이 잘돼야 도매상도 잘되니까요. 젊은 친구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서 이런 옛날 물건들 사갈 때도 있어요. 어릴 땐 비싸서 못 샀는데 이제는 살 수 있대. 잘 작동했으면 좋겠는데.
김희자ㅣ서울 관악구 남현길ㅣ76 02-525-8806ㅣ레이싱 카 3천원. ‘출동 메가 트레인’ 보드게임 2천원.

    피처 에디터
    김은희
    포토그래퍼
    김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