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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를 맞는 팬덤

2023.11.16전희란

잊히지 않는 통증에 대한 사랑, 때로 사랑보다 강렬한 감정, 그리움. K팝의 코어인 이 감정은 인생의 소나기를 함께 맞은 대상에게만 가질 수 있다.

글 / 최이삭 (K팝 칼럼니스트)

일명 ‘홈마 의자’. 대포 여신이라 불리는 아이돌 사진 ‘홈’페이지 ‘마’스터들이 디디고 촬영하는 휴대용 의자를 말한다. 홈마가 아니라도 아이돌 팬에겐 친숙한 아이템이다. 나의 2023년 잘한 소비 어워드에서 일찌감치 대상을 수상한 이것의 이름은 다용도 콤팩트 스툴 접이식 의자. 덕분에 올해 방탄소년단 멤버들을 몇 번 봤다. 판매사가 예상한 ‘다용도’에 아이돌과 팬의 오작교가 되는 그림은 없었겠지만. 반차를 쓰고 허겁지겁 방송국 앞에 도착해 대열의 맨 뒷줄에 자리 잡아도 놓친 시간을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다. 운 좋은 날은 10초쯤 봤고, 공치는 때도 있었다. 얼굴을 내놓고 글을 쓰니 눈썰미 좋은 분들이 알아보시어 숨 막히는 어색함 속에서 인사도 몇 번 했다. 떠나는 밴의 뒤꽁무니에 대고 사랑한다고 외친 목소리가 다소 경박했던 것 같아 내 이름을 검색해본 적도 있다. 검색 결과는? 자의식 과잉. 사람들은 이런 나에게 인생 참 재밌게 산다고 하지만 그건 멀리서 봤기 때문이다.

홈마 의자를 결제하고 친구에게 “나 방탄소년단 보려고 간이 의자 삼ㅋ”이라고 카톡을 보냈지만, 사실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방탄소년단 멤버들이 팬데믹이 끝나자마자 차례로 입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이던 옛날 옛적 어느 여름날, 여의도 KBS 공개홀 앞에서 아침 7시부터 10시간 넘게 기다리고도 <뮤직뱅크> 입장 인원에 들지 못한 그날부터 내 아이돌을 기약 없이 기다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땡볕에 하루 종일 서 있다가 노점에서 사먹은 김밥의 쉰 맛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먹고 죽지는 않을 것 같은 얼떨떨한 신맛. 현타를 증류해 술로 만들면 분명 그런 맛일 거다. 요즘은 사전 추첨으로 입장 인원을 미리 정하지만 당시엔 대부분이 선착순이라 벌칙처럼 하루 종일 죽쳐야 했다. 그러나 현타보다 그리움이 강했다.

올해 이 의자를 가장 요긴하게 쓴 날은 지민의 첫 솔로 앨범 <FACE>가 발매된 3월의 어느 날이다. 참고로, <FACE> 는 팬데믹 동안 그가 겪은 혼란과 공허를 풀어낸 자전적인 앨범이다. 지민의 애틋한 미성과 본능적인 신스팝 리듬이 아찔하게 얽힌 타이틀곡 ‘Like Crazy’는 K팝 솔로이스트 최초 빌보드 핫100 차트 1위에 올랐다. 아무튼, 그날 연차를 내고 지민의 음악방송 사전 녹화장에 갔다. 20여 년 전 현타의 맛을 알려준 바로 그곳, KBS 공개홀 앞으로. 방청권 추첨은 모두 광탈이라 무작정 가야 했다. 출근길을 보려면 왠지 출근 시간에 가야 할 것 같아 아침 일찍 방송국에 도착했다. 하지만 월드와이드 슈퍼스타 지민이 적어도 5시간 이내에 올 듯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가 한숨 자고 일어나 음원 발매 시간에 맞춰 팬이 해야 하는 모든 미션을 완벽히 수행하고 여의도로 다시 향했다. 이번에는 너무 늦었다. 퇴근 시간의 여의도역보다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러나 나에겐 홈마 의자와 부모님의 은혜로 새삼 가슴이 웅장해지는 170센티미터의 키가 있었다. 그리고 지민을 봤다. 재작년에 라식 수술을 해서 빛 번짐이 조금 있긴 하지만 그에게선 분명 후광이 비쳤다. 지민이 사랑스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 때, 미세먼지가 거둬지고 만물을 영생하게 하는 태초의 빛이 하늘에서 천사의 음성처럼 쏟아졌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라는 정확한 감정. 그가 일으킨 먹먹한 파문은 나라는 작은 지구의 맨틀을 쪼갤 만큼 근본적이었다. 비록 10시간 들여 10초 봤지만 완전했다.

그리움은 귀한 감정이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 우아한 침묵을 알려준다. 목이 멜 듯 열 받는 날도 기억에서 불어온 풍성한 바람 한 자락이 모든 걸 반전시키는 마법을 실현해준다. 그리움은 오직 인생의 소나기를 함께 맞은 대상에게만 가질 수 있다. 방탄소년단이 2016년 MAMA 시상식에서 ‘피 땀 눈물’로 첫 대상을 받은 날의 빗줄기, 2017년 처음 빌보드어워즈 레드 카펫을 밟은 날의 빗줄기, 2022년 봄 팬데믹의 한복판에서 열린 무함성 콘서트에서 종이 클래퍼로 허벅지만 힘껏 내려쳤던 날의 핏줄기, 아니 빗줄기가 여전히 내 가슴에 맺혀 있다. 그리스어로 노스탤지어는 오래된 상처의 통증을 뜻한다. 그리움은 잊히지 않는 통증에 대한 사랑이며, 때로 사랑보다 강렬하다. 나는 이 감정이 K팝의 코어라고 생각한다. 아이돌이 팬의 인생에 핏줄과 근육으로 섞이며 만드는 파동. 이 힘이 K팝의 미래를 만든다.

얼마 전 인피니트 콘서트에 갔다. 리더 성규가 ‘인피니트컴퍼니’를 설립하고 우여곡절 끝에 새 앨범을 발표하며 7년 만에 연 콘서트였다. 오프닝은 데뷔곡인 ‘다시 돌아와’였다. 인생을 드라마에 비유하는 이유는 복선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복선은 절정으로 이어진다. 절대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은 고조감 속에서 “다시 돌아와. 돌아와. 돌아와” 이 노래의 후렴구가 울려 퍼질 때, 객석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북받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오프닝 메들리가 끝나고 다시 돌아온 인피니트가 인사를 위해 무대에 일렬로 섰다.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만감으로 어떤 멤버도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팬들도 같은 표정으로 인피니트를 마주했다. 서로를 향하는 시선에는 함께 인생의 소나기를 맞은 사람들만의 뜨거운 그리움이 녹아 있었다. 방탄소년단이 아니면 K팝이 직업인 나도 그리움의 기시감 속에서 눈물을 찍었다. 식상한 음악방송 수상 소감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인피니트가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팬이 있기 때문이다. 팬이 있는 곳에 미래도 있다.

사실 이 ‘그리움’은 발명된 지 오래되지 않았다. 2세대 아이돌 그룹까지 이런 저런 사유로 재계약의 산을 넘지 못하고 5~7년 활동으로 끝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당시 아이돌 음악은 음악 취급도 못 받거나, 댄스 가요의 하위 장르로 분류됐다. 사소하게 여겨졌기에 사소하게 끝났다. 팬의 입장에서는 덕질 좀 할 만하다 싶으면 팀이 사라지는 황망한 일이 반복됐다. 그러나 K팝의 무대가 전 세계로 넓어지고 더 많은 기회가 생기며 자연스레 아이돌의 수명이 길어졌다. 활동 기간이 20대 초반 한 철에서 인생으로 확장되며 아프면 쉬고, 격려 속에 입대하고, 개인 사정으로 팀을 탈퇴하는 인간적인 분위기도 자리 잡았다. 해체한 줄 알았던 그룹들이 최근 속속 컴백해 성과를 내고 있다. 3세대 이후 아이돌은 재계약이 국룰이 됐다. 데뷔 10년 차 방탄소년단이 얼마 전 전원 소속사와 두 번째 재계약을 했고, K팝 기수 아이돌인 트와이스·세븐틴도 일찌감치 재계약을 마쳤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현재 K팝 산업의 가장 큰 모멘텀은 덕질의 장기화다. 팬들의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는 빌보드 차트 랭크인, 사상 최대 음반 판매 기록 등 K팝을 넘어 국가 경제를 견인하는 성과 지표를 창출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덕질을 해맑은 꿈과 환상의 나라로, 팬덤을 쓰레기를 잘 줍고 기부를 잘하는 착한 아이로 취급하는 시선에 불편함을 느낀다. 비대한 K팝 산업을 아틀라스처럼 짊어지고 있는 팬덤의 주체성과 영향력을 삭제하기 때문이다. 이는 어느덧 대한민국의 신성장 동력 산업 같은 게 된 K팝의 지형을 오독해 미래를 망치는 일이 될 수 있다. K팝의 내일은 기획사의 재무설명회가 아니라 팬덤에서 찾아야 한다.

나는 지금 여행 중이다. 승선을 테마로 구명조끼와 범선 모형이 놓인 부다페스트의 유쾌한 에어비앤비에서 조난당한 기분으로 초조하게 마감을 하고 있다. 이번 여행은 대체로 망했다. 팬데믹 동안 여행하는 방법을 까먹었는지 모든 게 어정쩡했다. 그럼에도 결코 잊지 못할 두 장면은 건졌다. 첫 번째는 입장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베를린의 클럽 베억하인에서 “You Can’t” 단 한마디로 입밴당했을 때다. 10년 만에 꺼내 입은 가죽 바지의 위용이 너무 대단했던 걸까.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연유를 고민하고 있다. 또 다른 장면은 바르샤바 국제 버스 터미널에서 우연히 우크라이나인 ‘K팝퍼’를 만났을 때다. 서로 최종 목적지가 다른 장거리 버스에 나란히 앉아 여행과 전쟁, 그리고 방탄소년단에 대해 얘기했다. 서로의 덕질을 응원하며 헤어질 때 우크라이나 국기를 본뜬 비즈 반지를 선물 받았다. 이 반지를 토템처럼 끼고 낯선 도시를 걸으며 사랑이 있는 곳에 삶이 있다는 오래된 믿음으로 새삼 가슴이 충만해졌다. 아마 나는 계속 이렇게 살 것이다. 가슴에 홈마 의자를 품고, 그리운 것을 언제나 그리워하며. 가끔 글도 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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