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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 야구’에 열광하는 이유

2023.11.10신기호

뻔한 야구팬의 짠한 자기 고백서. 어제 <최강야구> 봤어?

글 / 성영주 (칼럼니스트, <오늘만 사는 여자> 저자)

이미지=JTBC <최강야구> 포스터

“어제 <최강야구> 봤어? 야, 이대은 구속 150 나온 거 봤냐? 미쳤지?” 아니, 잠깐만. 나는 속으로 와다다다 ‘성’이 났다. 너 야구의 ‘야’ 자도 몰랐던 애잖아. 이대은이 누군지는 알았어? 어디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는지(2007년 미국 시카고 컵스에서), 어떤 과정(팔꿈치 부상과 수술, 일본 프로 시절 등등)을 거쳐 어디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2022년 KT 위즈)했는지도 모를 거잖아. 그런데 지금 1년 만에 나를 만나자마자 하는 첫 얘기가 <최강야구>라고? 이대은이라고? 그렇다. 남이 꺼낸 야구 이야기 한마디에 괜히 성난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나라 프로야구와 동갑내기인 골수 야구팬이다. 굳이 예를 들자면 “조선의 4번 타자” 혹은 “악마의 2루수”라 불렸던 그분들과도 동갑이라는 얘기. 나의 성장기는 늘 프로야구와 함께였다.

독립을 했어도 유년 시절과 다름없는 유일한 풍경은 야구 시즌의 내 일상이다. 어쩌다 술을 마시지 않고 일찍 귀가하는 날이면 늘 야구 중계와 함께. 느지막한 귀가 후에는 야구 하이라이트를 훑는 일상. 또 야구팬들이 더욱 혹독하게 앓는다는 월요병 환자 중 하나가 나다. 출근하기 싫은 월요병이 퇴근해서 더 싫은 이유, 바로 야구 경기가 없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든 야구팬을 치유해줄 이가 등장 했으니, 딱 월요일 밤에 방영하는 <최강야구>인 것이다.

이미지=JTBC <최강야구> 방송 화면

그 <최강야구>가 지금 야구의 ‘야’ 자도 모르던 친구의 입에서 나왔다, 해맑게. 조선의 대야구팬인 나는 화가 날 상황도 아닌데 무턱대고 화가 나는 것이었다. ‘니가 643병살과 463병살이 뭔지나 아냐? 야구는 말이지, 그 복잡한 룰과 공 하나에 오고 가는 치열한 수 싸움 하며, 프로팀의 역사부터 저 선수가 걸어온 길, 그 드라마 같은 서사를 알아야···.’ 하려는 찰나. 잠깐, 이거 그 유명한 야구 꼰대?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이러면 안 되지. 이 좋은 야구에 이제라도 눈을 떴으니 얼마나 반가운 동지인가.

요즘 주변에서 이런 사례가 속속 발견된다. 내 주변인들만 해도 <최강야구>를 본다는 여성이 적어도 8할이다.(야구팬은 모든 확률을 마치 타율 읊듯 ‘몇 할 몇 푼 몇 리’로 표현하는 습관이 있다.) 이제 엄마는 <최강야구> 덕에 아빠와 나를 넘어 가장 열렬한 야구팬이 됐다. “저 사람은 뭔데 그냥 1루로 걸어가요?”라고 묻던 구제불능(?)의 후배는 프로야구 직관을 밥 먹듯이 하더니, 요즘은 나조차 헷갈리는 선수들 특징을 줄줄이 왼다. 다른 친구는 글러브를 사서 캐치볼을 하더니, 급기야 여자 야구팀 입성에 이른다.

이미지=JTBC <최강야구> 방송 화면

실은 나조차 야구에 등 돌릴 때가 있었다. 코로나 시기, 선수들의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프로야구가 팬들로부터 거의 팽당하다시피 한 게 불과 몇 해 전. 긴 말 않겠지만,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당한 듯 갈기갈기 찢긴 마음으로 야구를 외면하려 애썼다. 플레이오프가 시작되면 여지없이 잠실로 향하던 촉수도, 스토브리그 때면 어떤 선수가 들고 나게 될지 살피는 그 지겨운 패턴도 서서히 사그라질 무렵. 그렇게 나의 반쯤 식은 야구 DNA를 깨운 계기가 바로 <최강야구>다. 박용택, 정성훈, 송승준, 장원삼, 이택근, 정근우 등, 기라성 같았으나 이제는 살쪄버린(?) 은퇴 선수들로 평균 연령 40세에 육박하는 팀을 만들었다? 허구한 날 그놈의 아저씨들 모아놓고, 해봤자 옛 영광을 추억하거나 그렇고 그런 웃음 유발 자폭 예능 아니겠나?

아니었다. 이들은 진짜 야구를 한다. 7할 승률이라는 목표로 매 시합마다 죽기 살기로 덤빈다. 프로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아마추어팀을 상대로 거의 한국시리즈만큼 비장하다.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면서는 독립 구단, 대학 선수들, 비선출까지 영입해 직접 다듬고 길러낸다. 덕분에 고교팀과 대학팀, 독립 구단까지 야구에 대한 시야가 확 넓어지는 경험. 이들이 ‘프로’가 되기 위해 어떤 시간들을 보내는지 비로소 알게 됐다.

이미지=JTBC <최강야구> 방송 화면

레전드들이 하나같이 눈에 불을 켜고 주전 경쟁을 하고, 신인 때처럼 구르고 깨지며 좌절하고 또 성장한다. 방송 내내 이들의 눈짓, 몸짓에서 읽혔다. 야구는 절대로 허투루 하지 않는다는 것. 그랬다. “돈 받고 하면 다 프로”라는 그 말. 야구는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인생은 그렇게 사는 것이었다. <최강야구>를 보면서 나는 자주 자세를 고쳐 잡는다. 노력이라는 말이 어느새 ‘노오력’으로 비꼬듯 폄하될 때, 평균 40세 은퇴 선수들에게서 진짜 노력을 발견한다. 마흔에도 배울 수 있고, 바뀔 수 있다고. 더는 별 볼 일 없을 것 같은 내 인생도 왠지 조금은 나아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거기서 스포츠의 힘을 느낀다.

다른 스포츠도 그렇지만, 야구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팀 스포츠라는 점이다. 그것도 아주 다양한 신체 조건과 기량을 가진 총천연색 능력치의 집합체. 축구나 농구, 배구 등이 일정 신체 조건 이상의 선수들이 정해진 시간 안에 최대 점수를 내는 경기라면, 따라서 특출난 선수의 기량에 기댈 수도, 그럴 필요도 있는 팀 종목이라면, 야구는 실로 다종 다양한 능력치를 그러모아 공 하나에 수많은 변수와 전략, 작전이 오가는 고도의 확률 게임이다. 1루를 밟는 데는 안타 말고도 볼넷이나 데드볼, 고의사구 같은 다른 선택지가 존재한다. 보내기 번트나 희생 플라이같이 팀을 위한 ‘희생’이 룰로 존재한다. 그렇다고 잘 치는 타자만 있으면 되느냐? 발 빠른 1번부터 묵직한 중심 타선, 뒷받침해줄 하위 타선까지 각기 다른 능력치의 다양한 선수가 필요하다. 1번부터 9번까지 모두가 이대호라고 상상해보라. 그런 팀은 어디에도 없고(팀 도루 0개 가능성 매우 농후함), 그렇게는 결코 다양한 구성의 팀을 이길 수 없다.

이미지=JTBC <최강야구> 방송 화면

많은 사람이 야구를 인생에 비유한다. 오르락내리락이 있고,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모든 스포츠가 인생과 닮았겠지만, 야구는 특히 그렇다. 유년 시절이 불행했다고 끝까지 불행한 법 없듯, 8이닝까지 빵점이던 팀이 마지막 9이닝에 10점, 그 이상도 역전 가능한 게 야구다.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것도, 내가 못 한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요, 한 이닝은 3아웃을 반드시 채워야만 공수가 교체된다. 그 말인즉 매 이닝 세 번의 기회가 있다는 말이다. 투수가 안타를 맞으면 야수들이 죽어라 달려 잡아내면 되고, 야수가 실수하면 투수가 삼진으로 잡으면 된다. 수면 위 신체 능력보다 힘을 합치고 전략을 짜는 물밑이 더 치열한 시합. 2시간이면 끝나기도, 4~5시간 넘게 지속될 수도 있는 정답 없는 게임. 인생 끝까지 살아봐야 알고, 고로 야구는 9회 말 투 아웃부터라는 것. 야구팀별 서사는 오죽한가. 만년 꼴찌 한화팬은 야구팬들 사이에서 거의 부처 대우(?)를 받아 마땅하고, 1등만 하는 쟤는 엄친아 같아 얄미워죽겠다. 같이 빌빌거리던 팀이 29년 만의 우승이라니, 내 팀이 아니어도 코끝 찡해지는 드라마가 따로 없고, 그 누가 아무리 예전만 못한 전력이라고 우겨도 화수분처럼 신인을 길러내는 저력의 팀이 있다. 뭐 하나 마음대로 풀리지 않던 그날. 상사와 대판 하고 싶었으나 찍소리 못 하고 한숨만 한아름 싸 들고 돌아온 그날. 이대호가 4연타석 홈런을 치는 장면을 마주했다. 대체 세상에 그보다 더한 카타르시스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 연사 목놓아 울었고, 그날의 단톡방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나는 상사와의 ‘상상 대판’을 씻은 듯 잊었다.

야구 때문에 목놓아 울고, 야구 때문에 세상을 얻은 듯 기쁘다. 애인보다도 더 나를 쥐락펴락하는데, 애인 없인 살아도 야구 없인 못 살겠다. 거기에 <최강야구> 덕분에 나의 야구 시계는 일주일 내내 멈출 줄을 모른다. 그게 야구의 ‘야’ 자도 모르던 사람들까지 야구 앞으로 헤쳐 모이게 만들고 있다. 내 생에 이런 ‘야구 아래 대동단결’을 볼 수 있다니. 이건 그러니까 뻔한 야구팬의 짠한 자기 고백서. 잠깐, 눈물 좀 닦고 더 늦기 전에 야구 보러 가야겠다.

성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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