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쏭달쏭 이정하.
GQ 화보 촬영할 때 사진가가 문득 이런 주문을 했죠. “스스로한테 취한 것처럼 해주세요.”(아쉽지만 그 컷은 셀렉되지 않았다.) 이정하는 그 주문을 단번에 알아들은 것 같았어요.
JH 그럴 때가 있어요. 특히 샤워할 때.(미소)
GQ 맞아요. 샤워실에서 촬영할 때 “여기가 가장 편해요”라고 했죠.
JH 제 샤워실과 닮았더라고요. 샤워하는 곳은 제게 굉장히 중요한 공간이에요. 연습실이자, 생각을 정리하는 방이죠. 아침에 일어나 잠이 덜 깬 몽롱한 상태에서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고 무슨 옷을 입을지, 어떻게 마무리할지 거기서 생각을 정리해요. 대사 연습도 샤워기 물을 맞으면서 할 때 제일 잘돼요. 얼마 전 <더 시즌즈-이효리의 레드카펫>에서 부른 짙은의 ‘잘 지내자, 우리’도 샤워하면서 연습했어요. 구조도 막혀 있고, 온전히 제 공간이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코인노래방처럼. 저는 머리에 샴푸 묻힐 때가 가장 섹시한 것 같아요.
GQ 김 서린 거울이 한몫하나요?
JH 아니요. 거울 안 보고 제 모습을 상상해요.(웃음)
GQ 그동안의 인터뷰들은 주로 작품과 캐릭터 이야기로 채워져 있고, 이정하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더군요. 이정하는 어떤 아이였어요? 어째서 지금 이곳에 있는 것 같아요?
JH 어릴 때는 막연히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이 되고 싶었어요. 꿈을 미리 정하면 그 안에 갇혀버릴 것 같아서 막상 꿈만 꾸고 도전하지는 않았어요. 그럼에도 무대에 오르는 걸 너무 좋아해서 장기자랑에는 자주 나갔고요. 중학교 선배의 영향으로 고등학교 때 연극부에 들어갔는데, 처음 무대에 섰을 때 스포트라이트 조명이 너무 좋았어요. 눈이 부신, 그 빛이 제게 와닿는 게 굉장히 따뜻하게 느껴졌어요. 생각이 트이게 하는 것 같은 빛이었어요. 그리고 박수 갈채. 이야, 이 일이 내 심장을 뛰게 하는 일이구나, 하고 느꼈죠. 그 전까지는 막연하게 연예인이 꿈이었는데, 그 빛을 만난 뒤로 무대에 오르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 순간이 항상 마음속에 있었어요.
GQ 처음 한 연극이 기억나요?
JH 드라마 <사춘기 메들리>를 연극으로 만든 작품인데, 저는 정우라는 캐릭터를 연기했어요. 대사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김광석님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제이래빗이 커버한 OST가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뽀뽀 신.(웃음) 실제로 한 건 아니고 시늉에 가까웠는데, 풋풋한 그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부끄러웠지만 관객들의 반응을 유도하는 것도 재밌었어요.
GQ 연기하면서 느끼는 기쁨 중 가장 큰 기쁨은 뭐예요?
JH 캐릭터를 분석해 연기하는 것도 즐겁고, 작품을 보고 사람들이 느낀 바를 이야기해줄 때 기뻐요. 제 캐릭터를 통해 “힘을 받았어요”, “위로를 받아서 더 열심히 살아가게 돼요”란 이야기를 들을 때 성취감이 가장 큰 것 같아요.
GQ 맞아요. 누군가를 응원하고, 타인을 기쁘게 하는 데서 성취를 느낀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죠.
JH 연기에는 정답이 없으니까 관객분들, 시청자분들의 반응을 듣고 내가 잘 소화했구나, 그제야 안도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왜 그런 것 같냐고요? 글쎄···, 제 연기에 확신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항상 완벽함을 좇고 싶었어요. 완벽‘주의’자는 아닌데, 완벽하고 싶거든요. 그런데 그 완벽이란 게, 정답을 제가 찾을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연기하면서 잘해냈을 때 뿌듯함은 있지만 과연 내가 잘한 것일까, 항상 의심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보는 분의 반응으로부터 내 의심이 ‘정답이었구나’라고 바뀌는 순간을 맞이해요. <무빙> 하면서 알게 된 또 다른 성취감은 작품을 해냈다는 그 자체에서 오는 커다란 성취감이었어요. <무빙>이 제게 남긴 선물이죠.
GQ 누군가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 같아요?
JH 제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응원을 받아와서 그런 것 같아요. 신인 시절에는 누구나 ‘수많은 경쟁자 중 내가 과연 될까’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텐데, 선택받지 못하는 힘든 시기에 엄마, 아빠, 친구들로부터 많은 응원을 받으면서 진짜 열심히 해야겠다, 마음먹었어요. 서서히 증명해가고 있는 지금은 그 응원을 다른 분들에게 돌려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GQ 어떤 말이 가장 힘이 돼요?
JH 엄마, 아빠의 눈물요. 아들이 나와서가 아니라 작품에 빠져 보면서 눈물을 흘리실 때가 있어요. 그러면 잘했다고 인정받는 것 같아서 힘이 되고, 되게 뿌듯해요. 그리고 친구들의 “잘 봤다”는 세 글자. 그 한마디가 되게 커요.
GQ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데서 성취를 느끼는 사람은 힘든 내색을 하는 데 서툴기도 하죠.
JH 맞아요. 어릴 때는 힘들다고 찡찡거리기도 했는데, 연기하고 나서 몰랐던 제 자신을 깨닫는 순간을 자주 맞이했어요. 각자 힘들다고 느끼는 부분은 모두 다르겠지만, 힘든 사람이 세상에 참 많잖아요. 연기하면서 그런 사실도 알게 되었고, 점점 제 힘든 면을 내색하지 않게 되었어요. 연기 선생님이 “관민(이정하의 본명)아, 마음에 있는 것을 숨기지 말고 꺼내라”라고 많이 독려하고 애를 쓰셨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 용기 내어 선생님께 속안의 이야기를 꺼냈는데, 가벼운 한편 마음이 더 무거워졌어요. 내 자신을 위로하려고 상대를 더 힘들게 한 건 아닐까 걱정이 되어서요. 내 기쁨을 누군가 같이 기뻐해주는 건 너무 좋은데, 내 슬픔을 함께 슬퍼해줄 때는 너무 미안해요.
GQ 그렇다면 캐릭터로서의 분출은 어때요? 연기로서 토해낼 때의 해방감을 느끼기도 해요? 이를테면 <무빙>에서 처음 엄마에게 화를 분출하던 장면이나, <런온>에서의 우식이를 연기했을 때요.
JH 음···,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해소가 아니라 여운이 계속 남아요. 잘 빠져나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성격이에요. 힘든 이유를 분석하려면 제 안으로 깊이 들어가잖아요. 그렇게 들어갔다 오면 여운이 오래가서 힘들어요. 금방 훌훌 털어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네요.
GQ 인터뷰 울렁증도 있고 화보를 찍거나 예능을 할 때도 무척 긴장한다고 했는데, 연기할 때는 어때요?
JH 긴장을 많이 해요. 너무 많이 긴장하니까 사전에 연습을 미친 듯이 하고 가요. 분석을 많이 한 다음 ‘이게 맞다’고 판단한 대로 계속 말해보고 연습해서 가는데, 많이 하면 할수록 연습한 대로만 나오는 것 같아서 아쉬워요. 너무 익숙해져서 감정이 무뎌진다고 해야 하나. 그 무뎌진 감정이 어색해서 스스로 인지되는 순간이 있어요. 그런데 또 연습을 안 하면 불안하니까, 그 기준점을 찾는 게 너무 어려워요. 열심히 준비하고 현장에서 무언가 터뜨려서 누구나 ‘그거 명장면이지!’ 하는 신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무빙>에서 류승룡 선배님이 장례식장 갈 때 바지 갈아입으면서 우는 장면 있잖아요. 와, 저는 그 장면이 왜 그렇게 좋죠? 선배님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제가 꽂힐 수 있는 한 장면을 꼭 만들고 싶어요. 지금 제가 제일 고민하고 있는 숙제예요.
GQ 이런 고민은 누구에게 털어놓나요?
JH 아무와도 나누지 않아요. 제 자신과 싸우고 있는 숙제입니다.
GQ 누군가와 고민을 나누면 답을 더 빨리 찾을 수도 있잖아요.
JH 이것만큼은 누군가의 답을 들어서 좇는 것보다는 혼자 찾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스스로 찾고 나면 제가 온전히 찾은 답일 테니까. 사실은 그래서 답답함이 있죠.
GQ 연기든 삶의 어떤 고민이든 스스로 답을 찾으려는 편이에요?
JH 맞아요. 제가 찾은 답은 제 안에 차곡차곡 쌓여가니까요. 학원에 다니면서 배우면 잘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계시지만, 제 스스로 재미가 없어요. 정해진 대로만 하는 느낌이어서. 우쿨렐레도 혼자서 치고 있고, 예전에 연기 수업 받다가 답답해져서 회사에 선언했어요. “안 배우고 혼자 해보겠습니다!”
GQ 가르쳐주는 대로 잘 따라가는 착한 아이인 줄 알았는데, 완전히 틀렸네요.
JH 저요? 에이, 저 자유로운 영혼이에요.
GQ 어떤 면에서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느껴요?
JH 기타를 배우고 싶어서 수업을 들은 적이 있어요. 곧잘 따라 해서 진도가 빨리 나가는데, 왠지 모르게 어딘가 계속 불편한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께 그만 배우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혼자 치기 시작했어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하면서 제가 느끼는 게 더 많았어요. 수업에서 2시간 배우는 것과 혼자 하면서 10시간 걸리는 것 중 저는 후자에서 배우는 게 더 커요.
GQ 지름길보다는 자기만의 방식을 찾는군요.
JH 고속도로 별로 안 좋아해요. 국도 좋아합니다.
GQ 어떤 인터뷰에서 배우로서 지닌 자질에 대해 질문을 받고 “입이 무겁다”라고 답한 게 상당히 의외였어요.
JH 어릴 때부터 고민을 잘 들어주는 편이었어요. 제가 완전히 리액션파거든요? 누군가 말을 하면 “그러니까!” 하면서 공감을 잘해줬어요. 그래선지 저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친구가 많았어요. 나에게 이야기할 때 더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입을 닫자고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절로 입이 무거워졌죠. 입이 많이 무거워요. 과연 제가 뭘 알고 있게요?(장난꾸러기 표정.)
GQ 배우로서 자질 하나 더. 오늘 느낀 건데, 좋은 의미의 고집이 있어 보입니다.
JH 저 고집 있어요. ‘똥고집’이에요. 똥고집, 개구쟁이. 엄마가 항상 그랬어요.
GQ 특히 어떤 부분에서 ‘똥고집’이 튀어나오던가요?
JH 제가 좋아하는 포인트가 있어요. 제 나름대로 데이터가 축적된 분야에서 확신이 들면 상대를 설득하려고 해요. 그런데 설득에 실패하면 바로 수긍하죠. <무빙>의 와이어 액션을 앞두고 혼자 열심히 준비한 다음에 “감독님, 이렇게 타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라고 말씀드렸는데, 감독님이 “정하야, 한번 그렇게 해봐”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해봤거든요? 그러곤 아닌 걸 알았죠. “감독님, 아닌 것 같습니다”. 틀리면 바로 인정해요.
GQ <아파트404>에서 결정적 기회를 많이 만들었다고 한 것도 어쩌면···.
JH 맞아요. 거기서도 제 ‘똥고집’ 많이 나와요.(웃음) 형, 누나들이 “정하야, 그거 아니야, 아닌 것 같아”라고 해도 하나에 꽂히면 끝까지 파고들어야 해요. 제가 꽂힌 게 틀린 경우도 많은데, 그렇게 집착하다가 몇 번 얻어걸린 적도 있죠. 제가 참 이상한 게, 남들이 다 푸는 건 별로 풀고 싶지가 않아요. ‘남들은 다 이렇게 생각하겠지? 그러면 난 좀 다르게 예상해볼까?’ 하는 걸 좋아해요. 축구팀도 선수들이 잘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팀 응원하고, 다시 잘하면 또 응원 안 하고. 연기할 때도 독백보다는 즉흥 상황을 좋아해요.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요. 제 성격이 그런 것 같아요.
GQ 긴장을 많이 하는 성격인데 즉흥 상황을 즐긴다?
JH 준비를 하면 오히려 더 긴장하는 것 같아요. 준비한 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요. 그래서 어쩌면, 버라이어티 예능이 의외로 제 체질인 것 같아요. <아파트404> PD님께 시즌 2 언제 찍느냐고, 저는 언제든지 준비돼 있다고 말했어요.(웃음) <미추리 8-1000>도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뭉쳐야 찬다>도 나가고 싶어요. 저 축구 너무 좋아하거든요!
GQ 즉흥 질문 하나 나갑니다. 이정하의 길티 플레저는?
JH 길티 플레저가 뭐예요? (옆에서 설명을 돕는다.) 우쿨렐레 치면서 스트레스 푸니까 우쿨렐레인가? 노래 못하는데 좋아하니까 노래인가? 이거 맞아요?
GQ 아닌 것 같지만 그런 걸로 하죠.(웃음)
JH 다음 인터뷰 전까지 찾아보겠습니다.
GQ 삶에서 미스터리로 느껴지는 건 뭐예요?
JH UFO요. 어릴 때부터 ‘설마 있겠어’라고 의심했는데, 얼마 전에 미국 정부에서 UFO의 존재를 인정했잖아요. 진짜 궁금해요. 외계인 만나보고 싶어요. 귀신도 궁금해요. 진짜 무섭잖아요. UFO도 무섭지만, 귀신만큼은 아니에요. 그래서 꼭 만나보고 싶어요.
GQ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뭐예요?
JH 엄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