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GQ KOREA HEROES – LEE SUNG JIN
<성난 사람들> 그리고 이성진이라는 항구를 지나.

GQ <GQ HEROES>의 얼굴이 됐어요. 당신만의 작은 영웅이 있나요?
SJ 반려견이 세 마리 있는데 그중 제일 나이 많은 애가 열다섯 살이에요. 작년에 뇌졸중이 와서 거의 죽을 뻔했는데 그 후로 1년 동안 재활 치료하면서 다시 걷는 법을 배웠어요. 근데 또 몇 달 전에 아나필락시스 쇼크가 와서 또 한 번 죽을 뻔했다가 또 살아남았어요. 항상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으려고 애쓰죠.
GQ 이름이 뭐예요?
SJ 벅지예요. Bugsy. 아! 저 한 달 전에 아빠가 됐는데 제 딸도 강한 영혼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제 퍼스널 히어로가 될 거예요.
GQ <성난 사람들>은 복수극이라기엔 인간적이고, 힐링물이라기엔 너무 독해요.
SJ 그쵸.(웃음) 한 장르로 정의하긴 어려워요. 저는 이 작품의 장르가 ‘인간의 고통 Human Suffering’이라 생각해요. 고통이라는 게 어떤 때는 웃기고 슬프고, 또 어떤 때는 굉장히 짜릿하잖아요. 부처님 말씀처럼 삶은 고통이고 그 안에 온갖 감정이 섞여 있죠. <성난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고통을 겪는지를 보여주려는 시도였어요. 시청자들이 일상에서 그 감정을 마주했을 때, 조금은 덜 괴로울 수 있도록요.
GQ ‘Human Suffering’이라는 장르가 원래 존재하는 건가요?
SJ 방금 지어낸 말이에요.(웃음)
GQ 꽤 괜찮은 표현인데요? 저는 <성난 사람들>이 현대인의 ‘화’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공허함’ 혹은 ‘결핍’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각본을 쓸 때 우리의 어떤 감정을 들여다보려 했어요?
SJ 맞아요. 시즌 1은 공허함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우리는 왜 살아 있는가, 이 모든 게 다 무슨 의미지?’ 같은 질문이죠. 그 공허함을 무언가로 채우려 하지만 절대 만족스럽지가 않잖아요. 두 주인공은 아주 다른 환경과 계급에서 자랐지만 그들이 지닌 ‘공허함’이라는 감정은 굉장히 닮아 있어요. 이 테마는 저의 다른 작품들에도 반복해서 나타나요.
GQ 마블 영화 <썬더볼트>요?
SJ 감독 제이크가 그 테마를 더 넣어달라고 하더라고요. 실제로 많은 리뷰가 ‘이건 마블의 <성난 사람들> 같다’고 하기도 했고요.

GQ 감독님도 가끔은 어떤 결핍을 느껴요?
SJ 누구에게나 있는 공허함 같긴 한데. 예전엔 그걸 이겨내려 했다면 지금은 그냥 사라지지 않는 삶의 일부라 받아들여요. 그럼 무게가 좀 덜하더라고요.
GQ 어떤 유형의 공허함일까요?
SJ 하나의 이유에서 비롯됐다기보단 그냥 모든 기저에 깔려 있는 감정 같아요. 쇼가 잘되고, 상도 받고, 친구들과 완벽한 파티도 열고, 모두가 즐겁고···. 평생 바라던 걸 이뤘는데도 막상 그 순간이 지나면, 이상하게 공허함이 여전히 그대로예요. ‘어린 시절 때문인가? 특정 사건 때문인가?’ 싶어서 파고들어 본 적도 있는데 왜 그런지, 어디서 오는 건지 정확히 모르겠어요. 대신 그 감정을 품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게 된 거죠. 글을 쓰는 것처럼요.
GQ 당신은 결핍을 채우려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들키지 않으려는 사람인가요?
SJ 예전엔 확실히 감추려고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오히려 자주 얘기해요. 인터뷰에서도 말하고 글로도 쓰고요. 그렇게 공유하다 보니 점점 덜 심각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감정은 억누를수록 훨씬 더 해로운 방식으로 나와요.

GQ 지나가는 대사인데 ‘반도 기질 Peninsula Mentality’이라는 표현이 기억에 남아요. 줄곧 한국인과 이탈리아인의 기질이 비슷하다고 생각했거든요.
SJ 그건 스티븐 연이 직접 한 말을 대사로 쓴 거예요. 스티븐이 생각이 엄청 독특해서 갑자기 뜬금없는 얘기를 툭툭 던지거든요. 둘이 몇 시간씩 통화하기도 하는데, 한번은 <소프라노스> 같은 TV 쇼 얘기하다 “이탈리아 사람들, 한국인이랑 비슷하지 않아?” 하면서 막 얘기를 쏟아내더라고요. 스피커폰 켜고 받아 적었어요. 대사에 꼭 넣어야겠다 싶어서요.
GQ 감독님도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그런 반도 기질이 있다고 느낀 적 있어요?
SJ 완전 있죠. 모든 게 대륙으로 가기 전에 반도를 거쳐야 하잖아요. 한국계 미국인들도 뭔가를 통과시켜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느껴요. 한국은 작은 반도지만 음악, 영화, 드라마 등에서 진짜 많은 걸 세계에 전하고 영향을 주고 있잖아요. 우리는 모든 게 지나가는 항구 같은 존재인 거죠.
GQ 마치 살아 있는 출항지처럼요?
SJ 맞아요. 인간 항구처럼요. <성난 사람들>의 정서가 한국이라는 항구를 거쳐 중국, 러시아,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느낌이에요.
GQ 그렇지만 감독님은 굉장히 미국적으로 자라기도 했잖아요. DNA 같은 건가?
SJ 진짜로요. 유전자 안에 늘 존재해요. 특히 다른 한국계 미국인들과 같이 있을 때 확실히 드러나서, 저랑 스티븐이 같이 있으면 완전 한반도 사람이 돼요.

GQ 에밀리는 어때요? 가슴속에 늘 답답한 뭔가가 있지만 억지로 밝은 척하는 모습이 짠했어요. 늘 긍정을 기대하는 미국 문화 특유의 분위기에서 우울에 솔직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초상 같았죠. 많은 비평이 이를 ‘해로운 긍정 Toxic Positivity’의 관점에서 보더라고요.
SJ 에이미는 가족 앞에서 자기 자신일 수 없어요. 남편 조지도 늘 명상하며 그냥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만 하니까요. 앞서 얘기했듯이, 감정을 억누르면 결국 어디론가는 흘러가야 하거든요. 그래서 에이미도 폴이랑 딴짓하는 것처럼 몰래 비밀스러운 출구들을 찾게 되는 거죠.
GQ 긍정이 독이 되는 거네요.
SJ 긍정적인 태도는 대부분 좋지만 긍정이 기준이 되어 상대를 판단하게 만들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을 줄 때는 독이 돼요.
GQ 감독님도 긍정 피로를 느껴본 적 있어요?
SJ 저는 대니처럼 교회에서 자랐어요. 좋은 기억도 많지만, 교회 문화에서 오는 부정적인 면 중 하나가 바로 이 해로운 긍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GQ 그래서인지 에이미가 휴대 전화에 총 들이밀면서 미친 듯이 화낼 때 더 인간적이더라고요. 이성진에게도 발작 버튼이 있어요?
SJ 화나게 하는 트리거 같은 거요? 웨이터나 고객 응대하는 분들한테 무례하게 구는 사람 보면 정말 화가 나서 못 참아요.

GQ <성난 사람들>의 인물들은 상처를 ‘남 탓’으로 돌리면서도 결국엔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 같았어요. 감독님은 분노가 오히려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세요?
SJ 분노는 근원적인 감정이 아니래요. 항상 다른 감정 위에 올라타 있는 감정이죠. 슬프거나 상실감을 느끼거나 너무 들떠 있거나, 상처받았을 때 그게 분노라는 다른 형태로 나오는 거예요.
GQ 이 작품은 화를 내는 게 나쁘기만 한 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던걸요.
SJ 분노가 꼭 나쁜 건 아니에요. 화내는 건 당연한 거예요. 다만 그냥 화만 내지 말고 그 분노 밑에 뭐가 있는지, 분노의 뿌리를 들여다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내가 왜 화났는지 스스로 물어야죠. 그래야 분노가 긍정적인 힘이 될 수 있어요. 어떤 때는 분노가 좋은 방향으로 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GQ 마침 최근에 그 주제로 대화할 기회가 있었거든요. 일부는 타인에게서 받은 무시나 멸시가 동기부여의 원천이 된다는데, 일부는 오직 기쁨과 긍정으로부터 힘을 얻는다는 실랑이였어요. 분노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까요?
SJ 엄청나죠. 전 하루 종일 분노가 동기예요. 예를 들면 <성난 사람들> 이전에 진짜 많은 파일럿을 팔고 죽어라 일했어요. 시즌 1 찍을 때는 잠도 못 자고 일했죠. 근데 그 모든 에너지의 원천이 뭔지 아세요? 예전에 제게 “넌 못 해, 넌 좋은 작가가 아니야”라며 저를 낮게 평가했던 여러 사람을 떠올리는 거였어요.
GQ 복수라면 굉장히 건강한 복수네요.
SJ 영어에 ‘Spite’라는 말이 있어요. 누군가에게 화가 나거나 상처받았을 때, 그 사람에게 복수하듯 뭔가를 해내는 마음이에요. ‘내가 보여줄게’ 하는 앙심이랄까. 분노가 어떻게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지 설명하는 좋은 표현 같아요.
GQ 앙심 품고 이를 갈고 <성난 사람들>을 만들어낸 거네요.
SJ 덕분이죠. 가끔 ‘아 너무 피곤해서 더는 못 쓰겠다’ 싶을 때, “쟤는 글 못 써” 했던 사람을 떠올려요. 그러면 끝까지 써내게 돼요.

GQ 어떻게 해야 분노라는 감정에 파괴당하지 않으면서 성숙해질 수 있을까요?
SJ 일단 내가 지금 화가 나 있다고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는 거 같아요. 그러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좀 더 잘 다룰 수 있잖아요. 중요한 건 감정을 느끼는 건 괜찮지만, 그 감정이 나를 지배하게 해선 안 된다는 거예요.
GQ <성난 사람들> 댓글 중 하나가 떠오르는데요? “분노는 나를 좀 사랑해 달라고, 날 좀 봐 달라고 외치는 거다”.
SJ 진짜요. 저도 좀 공감해요.
GQ 그럼 이성진에게 분노란 무엇인지, 자신만의 정의가 있다면요?
SJ 저한테 분노는 수면 부족 신호예요. 피곤하면 뇌 필터가 제 기능을 못 하잖아요. 화가 날 땐 ‘아, 이건 자야 돼 ’ 해요.
GQ 에이미가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는데요. 상담사에게 그런게 정말 존재하느냐고 묻는 장면은, 글쓴이 스스로의 질문 같기도 했어요.
SJ 저 최근에 아이가 생겼잖아요. 지금은 그 사랑이 사라질 만한 어떤 조건도 상상할 수 없거든요. 무조건적인 사랑은 존재한다고 믿어요. 있길 바라고요.
GQ 이건 어때요? 사랑은 늘 조건을 수반하는데, 그 조건부를 모르는 척해주는 게 사랑이라 말한다면요?
SJ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사랑이라는 단어는 정의가 참 짧잖아요. 저는 반려견도 사랑하고, 엄마 아빠도 사랑하고, 지금은 제 아기도 사랑하고, 각기 다른 사랑을 해요. 어떤 사랑은 조건적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사랑이 아닌 건 아니고 그냥 다른 종류일 뿐이죠. 그런데 인간이 진짜로 갈망하는 건 아마 무조건적인 사랑일 거예요. 우리는 모두 거기서부터 시작했으니까요.
GQ 엄마 뱃속에서부터요.
SJ 엄마 뱃속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어떤 조건도 없이 그냥 존재만으로 사랑받고 돌봄 받은 그 기억이 있잖아요. 우리는 결국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사랑에 조건이 붙는다고 해서 그 사랑이 덜한 건 아닐 거예요.

GQ 대니가 열심히 살지만 뭔가 잘 풀리지 않잖아요. 입버릇처럼 “아, 꼭 뭔가 있다니까” 말하고. 혹시 감독님이 자주 쓰는 말이에요?
SJ 제가 자주 그래요. “There is always something”. 촬영할 때마다 꼭 무슨 일이 생기고 늘 뭐가 안 맞거든요.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본 말일걸요?
GQ 다른 인터뷰에서 <성난 사람들>은 “가장 나다운 이야기”라 말했던데, 대니는 이성진을 투영한 캐릭터인가요?
SJ 대니가 저의 자전적 캐릭터는 아니지만 모든 캐릭터에는 제 모습이 조금씩 들어가 있어요. 캐릭터를 사람답게 만들려면 결국 자기 자신을 비춰봐야 하거든요. 그냥 옛날 제 모습, 누가 나한테 나눠줬던 이야기, 친구나 가족, 주변을 관찰한 장면까지, 현실에서 본 것들을 모아 모아서 인물 안에 녹여 넣는 거예요. 대니는 어릴 때의 저와 닮았고 에이미는 지금의 저와 닮았어요.
GQ 어떻게 다른데요?
SJ 대니는 어린애 같달까. 미성숙하죠. 감정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터뜨리잖아요. 에이미는 왜 자기가 공허함을 느끼는지도 몰라요. 그저 더 열심히 일하고 더 크게 웃고. 근데 저는 20대 후반쯤부터 자기 감정에 대한 인식이 생기고, 치유도 시작해서 그런 감정을 다루는 법을 알게 됐어요.
GQ 처음엔 에이미와 대니가 너무나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둘이 비슷한 사람처럼 느껴진 이유를 알겠네요.
SJ 두 캐릭터 다 어느 정도는 저 같죠.
GQ 일단 둘 다 완벽한 사람이 아니에요. 대니는 건설사업 전문가라고 포장하지만 부모님에게 선물할 집의 배선을 잘못 설정해 화재를 일으켜요. 에이미는 식물 전문가라고 자신을 포장하지만 독이 든 식물도 구별하지 못해 죽을 고비를 넘기죠. 사람은 누구나 실제보다 조금 더 멋지게 자신을 소개하잖아요.
SJ 모두 자존심이라는 게 있으니 자기도 모르게 남들에게 더 잘 보이고 싶어 하잖아요. 그런 게 사람다운 면인 것 같아요. 누가 뭘 물어봤을 때 ‘해봤죠’ 하고 무심코 대답했다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닌데···’ 싶은 적, 저도 있죠.
GQ 상처받으면서 남에게도 상처를 준다는 점에서도 비슷해요. 좋은 사람을 잘 쓰는 것과 나쁜 사람을 잘 쓰는 것 중 뭐가 더 어려워요?
SJ 결함 있는 인물을 쓰는 게 훨씬 재밌어요. 그리고 사실 더 쉬워요. 결함이라는 건 무궁무진하거든요. 근데 ‘좋은 사람’을 쓰는 건 정말 어려워요. 지루할 수밖에 없거든요. ‘착하게 살다가 결국 성공했다?’ 이건 거의 동화잖아요. 진짜 어려운 건 결함투성이인 인물에게도 선함을 남겨두는 거예요.

GQ 시즌 1의 마지막 회는 이성진이 직접 연출했는데요. 대니와 에이미가 독이 든 열매를 먹고 환각 속에서, 누가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마음을 터놓는 연출이 인상 깊었어요. 둘의 화해를 왜 환각으로 표현하게 됐어요?
SJ 실은 시즌 1 촬영이 다 끝나갈 때까지도 9~10화 대본을 미처 못 썼어요. 그러던 중 코로나에 걸려 격리 5일 동안 쓸 시간이 생긴 거죠. 워낙 몸 상태가 안 좋다 보니, 그런 흐릿하고 무의식적인 느낌이 자연스럽게 반영된 것 같아요.
GQ 몽환이 아니라 몽롱인가.(웃음)
SJ 진짜 그럴걸요?(웃음)
GQ 대니와 에이미가 후회하잖아요. “좀 더 자주 이럴걸”. 감독님은 생사의 기로에 서면 어떤 후회를 할 것 같나요?
SJ 일을 너무 많이 한 것? 제가 아끼는 사람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을 테니까요. 잠도 못 자고 <성난 사람들>을 너무 열심히 만든 것도 그 순간엔 후회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내 시간을 더 잘 썼어야 했는데’ 하면서. 물론 죽음 앞에서 그 어떤 후회도 없길 바라지만요.
GQ 둘이 그렇게 해코지해대더니 마지막엔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존재가 되더라고요. 서로의 ‘해독제’라고 표현해도 될까요?
SJ 좋아요! 그들은 애초에 자기 안에 해독제를 갖고 있었어요. 하지만 서로가 있어야만 그걸 꺼내 쓸 수 있었던 거죠.
GQ 한편으로는 독을 먹은 상태에서만 서로를 용서하는 설정이 슬프기도 했어요. 현실의 사람들도 극단적인 계기가 있어야만 진심을 꺼내는 것 같아서요.
SJ 그래서 일부러 독을 먹는 설정을 썼어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편한 방식에 안주하려 하니 결국 변화는 극단에서만 일어나는 것 같아요. 정말 아프거나, 정말 놀라운 일이 생기거나. 그래야 자기 안의 벽을 허물게 되거든요.

GQ <성난 사람들>의 각본가이면서 연출가죠. 각각의 역할에서 이성진은 어떻게 다른 사람이 돼요?
SJ 저는 감독 일이 더 좋아요. 촬영은 정해진 시간 안에 뭔가를 끝내야 하니 원인과 결과가 있거든요. 근데 글을 쓸 땐 혼자이고 리액션도 없고, 지금 하고 있는 게 괜찮은 건지도 모르겠고···. 정말 고독해요.
GQ 오늘 화보 촬영장에서는 저희가 대신 디렉션을 드리잖아요.
SJ 오히려 좋아요. 잠시 뇌를 꺼두고 누가 시키는 거 따라가면 되잖아요.

GQ <성난 사람들> 오프닝 얘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인상적인 삽화와 명언을 모티프로 한 시적인 소제목으로 시작하잖아요.
SJ 작가 회의할 때 항상 좋다 싶은 명언들을 다 모아둬요. 그러다 에피소드 주제에 맞는 걸 하나 고르는 식이죠. 시즌 2는 테마가 사랑과 결혼이라, 그와 관련된 유명한 인용문을 에피소드 제목으로 썼어요.
GQ <내 안엔 울음이 산다>도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 같았어요.
SJ 에이미도 대니도 겉보기엔 다 잘되어 가는데, 여전히 자신 안의 뭔가가 울고 있는 상태죠. 그래서 실비아 플라스의 그 문장이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시즌 2도 에피소드 제목 전부가 유명한 인용문이에요. 시즌 테마가 사랑과 결혼이라 그와 관련된 말들을 모았죠. 시즌 2는 새로운 인물들의 이야기예요. 오스카 아이삭, 캐리 멀리건이 한 커플이고, 찰스 멜튼과 케일리 스패니가 또 다른 커플이에요. 젊은 커플이 우연히 나이 든 커플의 격한 싸움을 보게 되고 이후 두 커플이 얽히는 이야기인데요. 산타바바라의 시골을 배경으로 한국 재벌가 설정을 더했죠. 윤여정 선생님이 회장님, 송강호 선생님이 남편 역으로 등장해요. 시즌 1과는 아주 다른 방향이긴 해도 그 안에 깔린 정서는 분명 비슷할 거예요. 여전히 ‘Human Suffering’이죠.(웃음)
GQ 시즌 1의 마지막인 에피소드 10에는 <빛과 형상>이라는 제목을 붙였잖아요.
SJ <Figures of Light>는 애초에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할 제목으로 정해둔 거였어요. 이 쇼 전체가 우리가 감추고 싶은 것, 부끄럽고 어두운 감정을 마주해야만 변화가 온다는 이야기거든요.
GQ 어둠을 마주하지 않으면 빛을 볼 수 없는 것처럼요?
SJ 그래야 빛도 들어올 수 있고요. 칼 융의 사상에서 큰 영향을 받아 그가 말한 ‘그림자와 빛’을 주제로 가져왔어요.

GQ 처음으로도 돌아가볼까요? 대니가 자살하려고 산 제품을 환불하러 갔다가 환불을 못 하는 장면. 감독님도 작은 일이 인생의 갈래를 바꾼 경험 있어요?
SJ 저도 대니와 같은 이유로 산 일산화탄소 감지기를 환불하러 간 경험이 있거든요. 근데 너무 창피해서 반만 환불하고 결국 제품 하나는 그냥 사서 차고에 처박아뒀어요. 쇼의 제작 디자이너가 대니 집에 어떤 감지기를 둘지 상의했을 때, 차고에서 그걸 꺼내다 사진을 찍어서 보냈죠. <성난 사람들>에 나오는 일산화탄소 감지기는 실제로 제가 환불하지 못한 그 제품이에요.
GQ 대니가 환각 속에서 했던 말을 마지막 질문으로 묻고 싶어요. “행복해지는 게 왜 이렇게 어렵지?”
SJ 아마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거울을 보면 결국 내 모습밖에 안 보이니까요. 자기 자신만 바라보면 계속 부족한 부분만 보이죠. 근데 누군가를 위해 뭔가 하려고 하면, 행복이 자연스럽게 따라와요.
GQ 스스로에게서 행복을 찾지 않고요?
SJ 간디의 말인데요. 진짜 나를 찾는 길은 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거래요. 아이러니하지만 ‘나’를 찾으려면 ‘나’를 내려놓아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