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에서 펼치기 좋고 가방에 쏙 들고 나가기에도 부담 없는 작고 가벼운 소설책. 한 시간 반이면 충분하다.
정세랑 [재인, 재욱, 재훈], 172쪽

“게다가 어쩌면 구해지는 쪽은 구조자 쪽인지도 몰라.” [보건교사 안은영], [시선으로부터] 등 수 많은 작품을 통해 믿고 읽는 작가로 자리매김한 정세랑의 짧은 소설. 너무 작아 초능력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지만, 각자 나름 유용한 초능력을 가진 재인, 재욱, 재훈 삼남매가 각자 능력을 통해 누군가를 돕는 이야기다. 대체 어디에 쓸 수 있지 싶은 능력은 이렇게 쓰인다. 정세랑 작가는 실제 지인들의 이름을 빌려와 ‘아무것도 아닌 우연, 아주 조그만 초능력, 평범하고 작은 친절, 자주 마주치는 다정함’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유쾌하고 시원한 정세랑의 문체와 세계는 잠시 당신을 현실에서 먼 곳으로 데려가며 일상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줄 것. 키치한 책의 표지에서 소설 속 요소들을 찾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구병모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152쪽

“그렇다면 사람을 지켜준다는 행위가 반드시 누군가를 해함으로써 완성되는 게 아니라, 다만 그 사람을 지지하는 버팀목 같은 것도 포함하는 것이 아닐까.” [파과], [아가미]로 유명한 구병모 작가의 짧은 소설. 몸에 새긴 타투가 우리를 지켜줄 가능성에 대해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기이한 살인사건이 연어이 발생하고, 그 범인과 단서를 찾아가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세계가 펼쳐진다. 미스터리, 범죄 소설의 요소도 있어 혹시 수사물을 좋아한다면 더욱 추천. 모르는 사이 누군가에게 지켜졌기에 살아남은 이들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내가 사는 세계가 새롭게 보일지도. 책이 아주 작고 가벼워 가방에 넣어 다니기에 좋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책장을 넘기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에 다다랐을 것이다.
천선란 [랑과 나의 사막], 160쪽

“이것이 이 로봇이 만지는 법이로구나. 두 팔이 없는 로봇은 이렇게 사물을 만지는구나. 멈추기 위해 몸을 던진 것처럼, 버진에게 당신의 말을 이제 이해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세계를 알려준 ‘랑’이 떠나고 혼자 남은 로봇 ‘고고’가 사막을 횡단하는 이야기. 단 하나였던 삶의 목적을 잃은 후에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 고고는 삶의 목적을 잃고 떠나지만 메마른 사막에서도 새로운 것을 배우고 무언가를 나누고 희망을 본다. 삶에 예정된 수많은 이별 앞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천선란의 [천 개의 파랑]이 그렇듯, 이 책도 짧은 이야기 안에서 인간과 비인간, 정상과 비정상을 자유롭게 허물며 뭉클함을 보여준다. SF 소설에 장벽을 느낀다면, 이 책이 그 장벽을 허물 키가 될 것.
델핀 드 비강 [충실한 마음], 224쪽

“충실함은 우리를 만들고, 우리를 구성하며, 우리가 지키려 노력하는 가치가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충실함은 우리를 가두고, 우리를 가로막기도 합니다.” 델핀 드 비강은 ‘충실함’이 삶에서 구현될 때의 모습에 대해 짧은 소설로 담아냈다. 등장인물은 아주 간결하다. 열두 살 중학생인 테오와 마티스, 그들의 선생님인 엘렌, 그리고 마티스의 엄마 세실. 소설은 한 시점, 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세 사람의 시선에서 서술함으로써 각자의 ‘무언가에 충실한’ 삶을 보여준다. 그는 평가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줌으로써 고민하게 한다. 우린 무엇에, 어떻게 충실하고 있을까? 책은 짧지만, 그 깊이는 결코 두꺼운 책 못지 않다.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104쪽

“사랑과 다정함조차 아플 때가 있다, 태어나 그것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이에게는.” 21세기의 체호프로 불리는 클레어키건의 소설. 24년 5월 영화 [말없는 소녀]로도 개봉했다. 보호와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소녀가 여름 먼 친척의 집에서 지내며 따뜻한 어른의 온기를 느끼는 이야기로, 뉴욕 타임즈는 “당신이 올해 읽을 그 어떤 두꺼운 책만큼이나 큰 감동을 줄 것”이라고 평했다. 어린 소녀의 어두컴컴하던 세상이 점차 색을 입고 온기가 돌기까지. 짧은 여정이지만 엄청난 여운을 남길 것. 따스하고 일렁이는 봄 여름날에 어울리는 이야기다.
조예은 [만조를 기다리며], 132쪽

“내가 저 바위에 도착하더라도, 그땐 물이 더 차 있을 테고 헤엄쳐서는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어. 그래도 나아갈 수밖에 없었어. 그건 분명 내 선택이야. 그러니까 내가 죽어도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넌 죽지 마.” [칵테일, 러브, 좀비]로 단숨에 섬뜩하고 경쾌한 호러 스릴러를 써내리며 ‘조예은 월드’를 만든 조예은 작가의 짧은 소설. 이번엔 사이비 종교다. 산에 묻히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우영이 만조의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것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던 정해가 사건의 진실을 찾아 뛰어들며 시작하는 이야기. 조예은 특유의 산뜻한 문체로 풀어낸 세계는 어쩐지 낯익고, 그래서 더 섬뜩하다. 만조의 검은 바다가 감추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위즈덤하우스에서 출판하는 단편 소설 ‘위픽’ 시리즈 중 한 권으로, 아주 짧은 시간동안 엄청난 흡입력을 경험할 수 있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