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 아이는 고집 세고, 비합리적이며, 끝없이 사람을 좌절시킨다. 하지만 최적화와 질서를 중시하는 이 시대에, 그 아이들이야말로 일상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통로다.

대학 시절, 나는 잠시 동안 룸메이트들과 함께 미니 배불뚝이 돼지를 키운 적이 있다. 내가 직접 산 건 아니었지만, 나는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돼지는 개보다 똑똑하다는 말을 늘 들어왔기 때문이다. 시골 출신 외동이자 개를 사랑하는 입장에서 그건 아주 매력적인 정보였다. 나는 여러 마리의 개를 훈련시켜 본 적이 있었다. 돼지 훈련은 식은 죽 먹기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내가 미처 계산에 넣지 않았던 점이 있다. 돼지는 더 똑똑할지 몰라도, 훨씬 더 고집이 세다는 것이다. 개는 다소 멍청하긴 해도,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 한다. 반면 돼지는, 적어도 우리가 키운 ‘비프케이크’라는 이름의 돼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개의 목줄을 당기면, 개는 자연스럽게 ‘아, 이쪽으로 가라는 뜻이구나’ 하고 따라간다. 돼지는 그렇지 않다. 비프케이크의 줄을 살짝만 당겨도 그는 무슨 부하 조직을 마비시키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정반대 방향으로 세게 몸을 당겼다. 나는 빨리 교훈을 얻었고, 그냥 그가 원하는 대로 가도록 내버려 뒀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돼지는 정말 똑똑하다. 심지어, 훈련시키려다 보면 도리어 내가 훈련당하는 지경에 이른다. 아버지가 된 지금, 나는 아이들, 특히 유아는 개보다 돼지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배워가고 있다.

나는 세 살짜리 아들을 키우고 있다. 그는 몇 가지는 아주 잘한다. 예컨대 새로운 욕설을 만드는 재능이 있다. 두 살 무렵에 내가 그를 “방귀쟁이”라 부르자, 그는 “나는 방귀쟁이가 아니라 똥쟁이야!”라고 받아쳤다. 혹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데도 능숙하다. 예컨대 신발을 스스로 벗어서 달리는 차창 밖으로 던졌던 적이 있다. 그 사실을 나는 그가 갑자기 울며 그 신발을 찾아달라고 했을 때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잘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예상하겠지만, 정해진 일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겨우 양치질이 고문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적응해가는 중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사실은 나의) 하루는 대부분 꾸물대고, 질질 끌며, 이리저리 새는 일로 가득하다. 나는 그를 위협과 보상의 복잡한 시스템을 통해 사회 활동에 참여시키려 애쓰고 있다.
이런 상황의 일부는 내 탓이기도 하다. 아마도 아들은 내가 물려준 ADHD 덕분에,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여기는 일을 해내지 못하는 것 같다. 예컨대 찬장을 닫는 일, 차를 어디에 주차했는지 기억하는 일 등. 그리고 이건 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이 지면에 다 적기엔 너무도 많은 기묘함을 가진 사람이다. 아들이 T볼 연습 중에 공을 코치에게 던져주기보다 꽃을 꺾거나 벌레를 으깨며 노는 걸 택할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이건 내 독성 유전자의 결과일까?”
답은 아마도 그렇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유아이고, 유아란 본래 이런 존재다. 나는 아빠로서 아직 짧은 시간을 보냈지만, 한 가지 배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법’이다. 아이가 나를 고집 센 돼지처럼 다시 훈련시키려고 할 때, 나는 내면에서 이렇게 되뇐다. “그냥, 좀 따라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물론 나는 아버지로서 내 아이를 다정하고, 사회에 잘 적응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짜증을 유발하지 않는 사람으로 키워야 할 책임이 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버지라는 역할의 가장 멋진 점은, 자연스럽게 내 인생의 우선순위를 다시 배열하게 된다는 것이다. 매일 나는 내가 이미 익숙해져 버린 수백 가지의 일들을 아이를 통해 새롭게 경험한다. 육아는 일종의 ‘마이크로도징’과도 비슷하다. 저녁 식사 예약 시간에 맞춰 도착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달팽이가 인도 위를 기어가는 걸 보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들의 눈이 점액질 촉수 끝에 달려 있다고! 이게 얼마나 신기한가?
어른의 우선순위는 아이의 우선순위와 다르다. 이 점이 유아를 키우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어려움이다. 우리는 아이가 신발을 신거나 밥을 먹거나 잠을 자기를 바라지만, 아이는 장난감을 찾거나 바닥에 떨어진 시리얼을 먹거나 그 어떤 일이라도 잠자는 것 외엔 뭐든 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일, 식사, 수면, 배변, 죽음까지 최적화된 스케줄을 짜놓고 살지만, 아이는 그런 세계에 살지 않는다. 아이는 모든 것이 새롭고 멋지게 느껴지는 세계에 산다. 그래서 좋아하는 색깔의 요구르트만 먹고 싶어 하며, 그 요구르트가 어디서 왔는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가격은 얼마인지도 모른다. 맛이 예전 것이랑 똑같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한입만 먹어보면 안 돼?”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내 아들의 기이한 본능을 오늘의 타임테이블에 꿰맞추려 애쓰는 동시에, 그가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가르쳐주도록 내버려두려 하고 있다. 이 말이 내가 아이를 아무렇게나 키우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가 벌거벗고 바닥에서 음식을 주워 먹거나 도마뱀을 망치로 두들기려 해도 그냥 놔둔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다만, 내가 육아를 하며 스스로 되뇌는 내면의 만트라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의 한계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도록 아이를 훈련시키는 중이고, 그 과정에서 그는 내가 통제할 수도, 허용할 수도 없는 행동을 자주 한다. 그게 이 여정의 일부임을 나 자신에게 계속 상기시켜야 한다. 그래서 T볼 연습 중 코치가 땅볼을 쳐주려 하는데도 아들이 그보다 필드에서 주운 거위 깃털에 더 관심을 보일 때, 나는 먼저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그래, 멋진 깃털이야. 사실 깃털은 다 멋져.”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며 짜증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은 영원히 기다려주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경우 조금은 기다려준다.
사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만들어놓은 스케줄은 생각만큼 그렇게 견고하지 않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많은 시간을 특정한 활동에 할당하며 산다. “이건 이 정도 시간, 저건 저 정도 시간.” 그래야 먹고, 자고, 일하고, 싸고, 죽는 데 최적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우리는 깨달음이나 실험의 기회를 모두 닫아버리곤 한다. 반면 유아는 그런 세계에 살지 않는다. 그리고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만큼이나, 우리가 인생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우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이야말로 아이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