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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떠나고 싶은 영화 속 로케이션 4

2025.06.27.김은희

서머 필름을 타고!

퀴어
Queer | 2024

파멸 따위 두렵지 않을 때 이곳으로 가라는, 소설 <퀴어>는 미국 작가 윌리엄 S. 버로스가 내미는 멕시코 시티행 티켓 같다. 정작 그에게 멕시코시티는 괴멸을 피해 향했고 축축하게 좀먹는 상실감에 도망쳐 나온 도시였지만. 순수한 타락과 가난. 과거도 미래도 없는. 특별히 혼란스러운 꿈.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비판을 받으리라는 생각도 다른 사람의 행동을 비난할 생각도 하지 않는 이들. 맑고 반짝이는 공기. 무자비한 파란색 하늘. 맴도는 독수리와 피와 모래···. 소설 속에 새겨진 멕시코시티 정경은 그리하여 거칠게 살아 숨 쉰다. 첫눈에 이 파괴적인 매혹에 반한 한 소년은 자라나서 이를 영화로 만든다. 열일곱 살 때 처음 <퀴어>를 읽고 33년 동안 마음에 품어왔다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 이야기다. 짓이긴 복숭아 같은 이탈리아의 여름 조각을 건네온 그가 이번에는 멕시코의 아찔한 태양을 쥐었다. 열기가 소년의 뒷덜미에 맺힐 때 여름은 시작된다.

LOCATION 쉽 아호이 Ship Ahoy. 극 중 리(대니얼 크레이그)와 앨러턴(드류 스타키)이 처음 만나는 바. 이곳에 영감을 준 실제 장소는 1950년대 멕시코시티의 바운티 바 The Bounty Bar다. 바 위층에 살던 버로스가 곳간처럼 드나들던 술집으로 현재는 크리카 레스토랑 바 Restaurante Bar Krika’s로 변모했다.
BEVERAGE 멕시코산 브랜디. 앨러턴은 비록 나폴레옹 오줌 같다고 묘사했지만 그보다 수년 더 산리는 웃으며 삼킨다. “너희 세대는 훈련된 미각이라는 쾌락을 전혀 깨우치지 못했어.” 한 입 마시면 기침이 터져 나오는 멕시코산 브랜디로 미각적 쾌락을 단련시켜볼 것.
TRAVEL 스포일러 수준 반전 주의. 실상 영화 전반은 이탈리아 로마 영화 스튜디오 치네치타 Cinecittà에서 이뤄졌다. 멕시코시티 거리부터 에콰도르 정글까지, 진창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건져내는 루카의 집요함이 구현됐다. 치네치타는 유서 깊은 관광지이기도 하니(일부 영화 세트장을 공개한다) 로마를 여행한다면 이곳을 통로 삼아 시공간을 넘나들어보길.
SHOP 팔레르모의 작은 서점 셀레리오 Libreria Sellerio. 자칭 야망만 가득한 외로운 10대이던 루카가 <퀴어>를 비롯해 온갖 책을 뒤적여도 친절하게 자리를 내어주던 곳. 여전히 열려 있다.

도쿄방치식당
東京放置食堂 | 2021

제작진에게 일면 송구한 언사지만 한 편당 23분짜리 드라마를 초반 10분씩만 집중해 감상했다. 식당을 찾는 손님 사연이 주를 이루는 후반보다 전반에 담긴 배경지 이즈오섬의 적막이 평화로워서. 대도시에 앉아 타인을 판결하는 데 이골이 난 판사 히데코(카타기리 하이리)가 내달려 닿은 이곳은 엔딩 크레디트에서 소개하듯 실재하는 장소다. “이 드라마는 픽션입니다. 도쿄에서 1시간 45분 거리인 이즈오섬은 실존합니다.” 평생 정해진 테두리 안에서 살아온 히데코이기에 가능한 한 멀리, 실상 가까이 벗어난 목적지가 주소지상 같은 도쿄인 곳, 하나 도쿄스럽기는커녕 ‘방치’라는 묘사가 달라붙는 섬 이즈오다. 도망자이자 도전자였던 이를 좇아 이곳을 여행한다면 반드시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 섬 한복판에 자리한 미하라 산에 오르는 것. 30여 년 주기로 용암을 분출하는 활화산은 모조리 태워버린 것인지 태생이 그러한지 새까만 흙으로 덮여 있는데, 눈을 가리는 해무와 함께 산의 검은 등에 오르면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분간하기 난처해 보여서, 와중에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고 알려주는 땅 같아서 바닷바람 수증기를 뒤집어쓰고 그 대지를 기쁘게 디뎌보고 싶다.

COMPANION 혼자.
LOCATION 이즈오섬. 도쿄도 조후시의 조후공항발 비행기로 30분, 다케시바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고속 제트 페리선으로 1시간 45분 소요된다.
LEISURE 한라산 이마까지 데려다주는 버스처럼 이즈오섬 항구에서 해발 758미터 미하라산 하이킹 코스 입구까지 다니는 버스가 있다. 정류장에서 정상까지는 도보 45분 걸린다.
STAY 미하라산 7부 능선에 자리한 오시마 온천 호텔. 이 문구 하나만으로도 주저 없이 예약할 만하다. “노천탕 있습니다.”
MENU 히데코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극 중 식당 카제마치야, 바람을 기다리는 집이란 뜻인 이 공간의 실제 가게는 90여 년 된 집을 개조한 하브 카페 Hav Cafe다. 에스프레소, 피자 등을 판다. 도전해볼 만한 진정한 현지 음식은 드라마에도 등장하는 갈고등어 쿠사야(삭힌 염장 생선). 이렇게 냄새 나는 요리는 어디서 못 먹어보지 않느냐며 쿠사야를 굽는 히데코의 부채질에 객들이 콧등을 잔뜩 찡그리면서도 젓가락질을 멈추지 못하던 이유는 무엇이었으려나.

리플리: 더 시리즈
Ripley: The Series | 2024

싱그럽고 활달한 기운으로 가득한 이탈리아 나폴리 이스키아섬 해변. 열기를 온전히 누리는 여유로운 디키(주드 로), 마지(기네스 펠트로)와 달리 리플리(맷 데이먼)는 누가 봐도 바다와 거리가 먼 곳에서 온 사람의 옷차림으로 모래밭에서 우물거린다. 선명하고 신선한 빛깔들, 그에 비해 두껍고 답답한 질감에 덮인 톰 리플리. 그 은근하고도 분명한 색 대비는 스크린 너머 관망자마저 머쓱하게 만드는 파열음이어서, 이 작품을 리메이크한-정확히는 원작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 씨>(1955)를 한 뿌리로 둔-넷플릭스 시리즈 <리플리: 더 시리즈>(2024)가 흑백으로 펼쳐질 때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노랗고 푸르고 빨갛고 초록이던 여름을 죄다 검고 하얗게 칠하다니, 어째서? 하나 침잠해 돌아보면 여름은 검은색과 하얀색의 계절이기도 한 것. 태양과 구름. 광선과 그늘. 그을린 피부가 일으키는 하얀 껍질.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의 검은 속내와 부유하는 흰 거품. 특히 2화 13분 18초부터 등장하는 빛과 어둠을 마주해보시기를 기원한다. 오로지 그 명암만을 향하여 여행을 떠나도 좋을 만큼 압도하는 광경이 등장한다.

DESTINATION 이탈리아 나폴리 피오 몬테델라 미세리코르디아 성당, 카라바조가 그린 ‘일곱 가지 자비의 행위 The Seven Works Of Mercy’ 앞.
THEME 광기의 천재 화가 카라바조의 그림자를 좇는 여정. 톰 리플리(앤드루 스콧)가 멍한 얼굴로 홀린듯 바라보는 그림 ‘일곱 가지 자비의 행위’는 카라바조가 생의 구렁텅이를 헤매던 와중에 완성한 작품이다. 로마에서 사람을 죽이고 도망치던 1607년 그때. 이 그림에는 굶주리고 목마른 이를 축여주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고, 나그네와 병자와 죄수를 돌봐주며,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러주는 일곱 가지 자비를 행하는 이들이 빛과 어둠 사이에 버무려져 있다. 그들의 표정은 대개 애잔하고 때때로 슬프다.
TRAVEL 시작은 이탈리아 캄파니아주 아말피 해안의 가장 작은 마을 아트라니부터. 이곳에서 만난 디키(조니 플린)를 통해 톰은 카라바조의 존재를 알게 된다. 아름답지만 계단이 너무 많은 이곳에서 끝없이 오르내리는 톰 리플리의 뒷모습이 어쩐지 처량하다. 타산지석 배울 점: 여행 가방은 가볍게 싸서 갈 것.

애프터썬
Aftersun | 2022

“아마 이런 영화를 자주 보지는 않는 것 같은 사람이 다가와 이렇게 얘기했다. ‘내가 사는 곳에는 이런 말이 있어. 왜 젊은 남자는 죽는가? 그러고 싶으니까.’” 한 관객과의 일화를 전하며 <애프터썬>이 아트하우스 영화의 가독성을 넘어 훨씬 더 날것으로 느껴지는 방식으로 그와 연결된 것 같았다는 샬롯 웰스 감독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에야 비로소 영화가 끝난 후에도 모호하게 떠돌던 감정이 조금 오므려지는 듯했다. 고백하자면 이전에는 <애프터썬>을 본 이들이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다, 불현듯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났다고 말할 때 나는 공감능력이라고는 0.1센티미터도 쌓이지 않은 사람처럼 눈을 끔뻑였다. 내게 아버지란 맑고 유쾌하고 우직한 사람이었고, 그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은 적은 없다고 여겼기에. 그것이 오만인 줄도 모르고. 늘 푸른 안개가 아른거리는 것 같던 캘럼(폴 메스칼)의 등에 얹어진 ‘왜 젊은 남자는’이라는 물음표를 따라 붙이고 나서야 나는 ‘내 아빠’가 아닌 한 젊은 남자, 이제는 약간 덜 젊은 남자를 그려보게 됐다. 영화는 샬롯 웰스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히는 아니다. 우연히 들여다본 오래된 앨범, 아빠와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속 아빠와 자신의 나이가 비슷하다는 점에서 시작했을 뿐 그 누구의 정서와도 닿아 있길 바란다는 “자전적 정서적 픽션”이다. 아빠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빠라고 부르는 여자아이가, 커가는 혹은 그대로인 소년과 소녀가 보내는 화왕지절의 순간들. 이 여름이 지나가면 어떤 자국이 남을까.

COMPANION 아빠, 엄마, 혹은 지금의 내 나이를 먼저 통과한 누군가.
TRAVEL 튀르키예 남서부 해안 페티예 Fethiye 지역에 자리한 휴양 마을 올루데니즈 Oludeniz.
STAY 특히 1990년대에 서양인들에게 사랑 받은, 여러 리조트가 모인 이 지역에는 5성급 호텔도 많지만 감독은 소피(프랭키 코리오)와 캘럼이 그들의 재정 상태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한 선택을 보여주고 싶었다. 객실 50개의 안락한 터크 호텔 Turk Hotel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소피와 캘럼이 춤을 추던 곳. 서로가 서로를 꼭 안고.
MUSIC 데이비드 보위 ‘Under Pressure’.
ESSENTIAL ITEM 필름 카메라. 인화는 언젠가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