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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큐 에디터 9인이 지극히 사적인 기준으로 선정한 올해의 이슈

2025.12.06.최태경

지큐 에디터들의 취향이 고스란히 담긴 올해의 것들.

최태경ㅣ패션 에디터

올해의 워커홀릭 <조나단 앤더슨>
올 한 해 그의 하루하루는 어땠을까? 잘 시간은 있었을까? 조나단 앤더슨이 디올에서 진행한 첫 쇼인 남성 컬렉션을 며칠 앞둔 시점, 그가 예사로운 회사원처럼 센 강변에서 줄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SNS에서 화제가 되었다. 업계 모든 관심과 기대가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 담배 한 모금에 담긴 수많은 고민과 번뇌를 헤아릴 수나 있을까. 그는 디올의 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여성, 남성,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모두 선보여야 하고, 유니클로 협업 컬렉션도 진행하고 있다. JW 앤더슨의 런웨이 쇼는 당분간 중단한다고. 대신 지난 9월 JW 앤더슨 프리뷰를 통해 그의 첨예한 미감이 담긴 사물들을 선보였다. 역시 일을 안 한다는 건 아니었다.

올해의 눈물 버튼 <폭싹, 속았수다>
누군가는 팔불출 양관식이 비현실적이라고 하지만,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금명이 지지배가 자기 혼자 잘난 척하는 꼬라지는 은근 나 같기도하고. 밉상은 있는데, 빌런은 없었다. 착한 놈, 나쁜 놈 할 거 없이 모두 각자의 삶의 고충과 아픔이 서려 있다. 그래서 내뱉는 말들마다 마음이 아렸다. 슬픈 드라마나 영화는 질색인데, 이건 ‘시린’ 드라마다. 학씨 아저씨의 마음도 이해가 되고, 영범이도 너무 짠해. 사는 건 도대체 왜 이렇게 서글픈 걸까. 지극히 사적인 기준에서 선정한 올해의 것들.

올해의 가창력 <헌트릭스>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어떻게 전 세계 어린이들을 ‘떼창’하게 만들었는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골든’이 7주 연속 빌보드 차트 1위, 그리고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노래를 비롯 다섯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는 것엔 일말의 이견이 없다. 실제 목소리 주인공인 이재, 오드리 누나, 레이 아미의 <지미 팰런쇼> 라이브 무대를 찾아보길. 단전까지 꽉 막힌 체증이 뻥 뚫리는 탄탄한 고음에, 이래서 ‘혼문’이 안깨지는구나 싶다.

올해의 키링 <라부부>
나만 없었다. 함께 일하는 스태프, 친구들, 스치는 많은 이가 라부부를 달고 있었다. 때마침 ‘백꾸’가 트렌드였고, 블랙핑크 리사를 시작으로 리한나, 데이비드 베컴 등 셀럽들이 라부부 인증샷을 올렸다. 팝마트가 블라인드 박스 전략을 내세우자, 다들 원하는 캐릭터를 얻기위해 안달이 났다. 시크릿 버전이나 한정판 컬렉션은 수백만 원에 달하는 금액으로 리셀되기도. 2025년 온 우주의 기운이 이 작고 앙칼진 몬스터 인형에 집중됐다.

올해의 스타일링 <마이클 라이더의 셀린느 2026 봄 컬렉션>
와이드한 어깨에 잘록하게 비튼 허리, 소매는 넓게, 허리가 높은 하렘 팬츠 혹은 슈퍼 스키니 진. 그리고 스카프를 크게 두르는 방식. 청키한 뱅글을 한가득 레이어링하거나, 손바닥만한 벨트 버클, 그리고 종종 곁들인 맑고 선명한 컬러 매치까지, 마이클 라이더가 선보인 첫 번째 셀린느 쇼엔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소맷 부리를 접어 올린 조금의 높이까지. 모든 매무새가 우아하고 능숙한, ‘세련’의 정석.

김성지ㅣ패션 에디터

올해의 조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숀 펜>
올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뽑히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연기 꽤나 한다는 배우들 사이에서 극을 완성한 장본인을 뽑자면 숀 펜이다. 최고의 배우라는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붙는 배우지만 이번 영화에선 절정의 연기력으로 극의 긴장을 더욱 끌어올렸다.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으로 스크린을 가득 채우면서도 순애보와 찌질함을 동시에 선보이며 폭발하는 화약 같은 열연을 펼친 숀 펜의 연기에 벌써부터 평론가들은 내년 모든 영화제의 ‘남우조연상’을 그가 휩쓸 거라고 점치고 있다.

올해의 투어 <오아시스 라이브 ’25 투어>
2024년 오아시스가 데뷔 30주년을 기념해 재결합과 월드 투어 계획을 발표했다. 2025년 7월 4일 웨일스 카디프를 시작으로 한국을 거쳐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마무리되는 여정. 티켓 오픈과 동시에 전 세계 모든 공연 좌석이 매진됐고, 버버리와 스톤 아일랜드는 리암 갤러거를 캠페인 모델로 세우고, 아디다스와 리바이스를 비롯한 여러 패션 브랜드는 오아시스와 협업을 하며 시대의 아이콘의 귀환을 환영했다. 첫 공연인 카디프 무대 이후 언론과 팬들 모두의 반응은 호평이었다. 1996년 전설로 회자되는 넵웨스 공연 이후 최고의 무대라는 극찬과 함께 1990년대로의 회귀라는 메시지가 널리 퍼졌다. 2백만이 훌쩍 넘는 관객 동원 수, 약 4억 달러가 넘는 공연 수익과 패션 브랜드의 움직임까지. 데뷔 30년이 넘은 밴드의 투어는 올해 가장 큰 문화적 파급력을 지닌 현상으로 꼽을 만하다.

올해의 라이벌 <카를로스 알카라스 VS 야닉 시너>
철옹성 같던 빅 3의 시대가 저물고 현재 테니스계를 이끌고 있는 2003년생 카를로스 알카라스와 2001년생 야닉 시너. 2022년 US 오픈에서 우승한 알카라스를 기점으로 두 선수는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양분하며 올해에만 결승에서 세 번의 맞대결을 펼쳤다. 올해 5월, 두 선수의 첫 그랜드 슬램 결승인 롤랑가로스는 테니스 팬들의 시선이 집중됐고, 이에 걸맞은 명경기가 탄생했다. 알카라스가 첫 두세트를 내주며 패색이 짙었지만,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며 5시간 29분짜리 대역전극 드라마를 완성한 것. 이번 경기는 롤랑가로스 역사상 최장시간 결승전이었고, 이 두 선수가 왜 테니스계의 현재이자 미래인지를 보여준 명경기였다. 불과 5주 후 이어진 윔블던 결승에선 시너가 무난하게 승리하며 복수를 했지만, 마지막 그랜드 슬램인 US 오픈에서 알카라스가 시너를 제압하는 동시에 세계 랭킹 1위를 탈환했다.

하예진ㅣ디지털 에디터

올해의 진땀 경기 <2025 MLB 월드시리즈 7차전>
LA 다저스와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11회 연장까지가며 엎치락 뒤치락 대혈투를 펼친 역사적 경기. 무려 4시간 7분 동안 이어진 이 게임은 전 세계 약 5천1백만 명이 시청하며, 1991년 7차전 이후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양 팀의 분위기가 얼마나 치열한지 4회에 벤치 클리어링이 발생하거나, 선발투수 오타니 쇼헤이가 3점 홈런을 맞고 초장에 강판되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연출됐다. 경기 내용은 더 쫄깃하다. 게임 내내 스코어가 숨 막히게 교차하다가, 9회 말 블루제이스가 다시 앞서더니 다저스의 미겔 로하스가 동점 홈런을 날리며 극적으로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대망의 연장 11회, 윌 스미스의 결승타가 터지며 다저스가 우승을 확정 지었다. 시리즈 MVP는 투수 야마모토 요시노부. 불펜 등판해 3이닝 무실점으로 팀을 2연패로 이끈 마운드의 사무라이는 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승리의 엔딩 크레디트가 됐다.

올해의 소년 <CORTIS>
빅히트 뮤직이 6년 만에 보이그룹을 선보였다. 아이돌로서는 드물게 힙합을 택한 대찬 기세, 여러 의미로 충격적인 비주얼, 신선한 음악까지. 마틴과 제임스, 주훈, 성현, 건호의 베일을 벗기는 여정은 ‘뭐여’ 했다가 ‘오메’ 해버리는 기분 좋은 당혹감의 연속이었다.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냉소하지도 젠 체하지도 않는 소년들은 10대에만, 10대이기에 쓸 수 있는 가사를 쓴다. “후르츠 찜해 놓은 상품에 있었던 벨트는 now on my 허리”라는 소소한 갈망은 소년들의 20대, 30대엔 어떤 욕망으로 발현될까? 그룹명 ‘CORTIS’는 ‘COLOR OUTSIDE THE LINES’를 불규칙하게 조합했다. 이름 그대로 틀을 깨고 선 밖에서 칠해갈 코르티스의 오답이 계속해서 궁금해진다.

올해의 명불허전 <‘F1 더 무비’의 브래드 피트>
빵형이 F1 드라이버로 돌아왔다. 서킷을 질주하는 섹시한 자태를 감상하는 것만큼 즐거운 건 그의 새로운 스타일을 보는 재미였다. 티모시 샬라메, 켄드릭 라마의 전담 스타일리스트로 유명한 테일러 맥닐과 손잡더니, 시사회마다 영화만큼 흥미진진한 불멸의 핫가이 스타일링을 보여주며 팝콘 각을 세우게 했다. 루스하게 흐르는 실크 블루 셔츠, 딱 적당히 빈티지한 그린 맨투맨까지. 얼굴도 치트키인 그가 스타일마저 치트키를 썼다.

김은희ㅣ피처 에디터

올해의 유혹 <칸쵸>
40주년을 맞아 신생아 상위 등록 5백여 개를 비롯한 이름을 새긴 칸쵸 한정판이 출시 2주 만에 1백만 개 판매 기록을 세웠다. 평소보다 세 배 빠른 속도다. 내 이름도 있을까 은근히 가는 손에 떠오르는 그 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고, 그 무엇은 이름을 불러줄 때 잊히지 않는 손짓과 눈짓이 되는 것임을. 올해의 김춘수, 올해의 호명, 올해의 판매왕, 부름의 칸쵸.

올해의 감독 <신인감독 김연경>
잘하는 선수가 반드시 잘하는 감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은퇴했거나 구단의 부름을 받지 못한 언더독 선수들의 부활을 꿈꾸며 김연경이 잡은 지휘봉을 보면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음을 깨닫게 된다. 김연경은 정해진 공식 대신 경기를 풀어나가는
시선을 알려준다. 자신의 서브 속도도 모른 채 공만 때리던 선수에게는 실제 속도와 타격 위치를, 반사적으로 “넵!” 외치는 선수에게는 흐름을 이해하는 법을 전한다. 때때로 ‘이게 왜 안 되지?’ 무언의 눈빛이 스칠 때도 있으나 그는 이내 가다듬는다. 안 되면 되게 하는 길을 향해서. 김연경의 배구가 다시 시작됐다.

올해의 인생극장 <걸그룹은 어떻게 살까요>
상을 수여하고 싶은 대상은 걸그룹, 아니 아이돌 전체, 그리고 그 산업에 얽히고설킨 수많은 스태프와 팬이라는 점을 짚고 가겠다. 기안84가 걸그룹의 하루를 담은 25분 26초짜리 영상에 달린 2천9백11개의 댓글 중 몇 개로 이 상을 수여하는 이유를 대신한다. 그동안 스쳐 지나간 아이돌, 진행 중인 무명의 아이돌에 대한 시선이 바뀌었음. 보는 내가 힘들다. 운동할 시간이 없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말. 겉은 화려해 보이지만 속은 치열한 노력의 장이었네요. 최고의 홍보 영상이다. 모두의 꿈이 녹아 있는. 다들 성공하기를.

박지윤ㅣ디지털 에디터

올해의 비서 <챗GPT>
현대인의 필수 앱. 전 세계 누적 다운로드 약 7억 건, 언제 어디서나 불러낼 수 있는 시크릿 비서로서 제 역할을 묵묵히 해낸다. 지브리풍 이미지 생성, 내 맘대로 사주 보기, 성격 분석하기 등 챗GPT 프롬프터 트렌드까지 생길 정도로 인간들은 챗 GPT를 괴롭혔다. 물론 종종 틀린 정보를 주거나, 내가 누군지 다시 설명해야 할 때가 있어 구박도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앱을 켜고, 여전히 무언가를 묻고, 여전히 답을 듣는다. 그래도 아직 챗GPT 사랑하시죠?

올해의 알고리즘 <F1>
레이싱 불모지 한국에서 ‘F1’ 붐이 일어났다. 흥행의 8할은 가 주역이 아닐까. ‘브래드 피트’라는 무기와 ‘한스 짐머’라는 치트키를 등에 업고 누적 관객 5백만 명을 넘어섰다. 거기에다 영어 중계로만 접했던 F1을 쿠팡 플레이의 중계권 확보가 더해지며 접근성이 크게 개선된 점이 올해 흥행의 포인트. ‘F1’ 검색량은 한국에서 전년 대비 뚜렷하게 상승했다. 특히 레이스 주간과 영화 공개 이후 검색이 급증하는 패턴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신이 보우하신 알고리즘으로 입문한 이들은 드라이버 개개인의 캐릭터와 팀 서사를 공부하며 돌잡이하듯 응원하는 팀을 골랐고, 시차가 반대인 레이스를 보기 위해 새벽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은 지금 F1 도파민에 중독되어 있다.

올해의 덕통사고 <쿄카>
에피소드 하나로 SNS를 장악한 인물이 있다. 고양이 같은 얼굴에 답지 않은 오사카 사투리를 쓰며, 춤의 장르는 힙합 스트리트 댄스. 이런 캐릭터를 소설로 썼다면 ‘설정 과다’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켄드릭 라마의 ‘Not Like Us’ 비트에 맞춰 춤을 추는 순간, 한국 SNS 타임라인을 그대로 뒤집어놓았다. 방송 다음 날의 아침 인사는 “너 쿄카 봤어?”일 정도. 마음의 준비도, 여유도 없었는데 영상 하나로 덕통사고, 제대로 한 방 맞았다. 아직 보지 못했다면 ‘KYOKA’ 검색해보시라. 아마 안 본 사람은 없겠지.

신기호ㅣ피처 디렉터

올해의 비극 <산불>
지난 3월, 경북 의성에서 피어오른 불씨는 이내 화마로 변해 경북 북부를 삼켰고, 결국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발생한 산불 중 ‘최대 피해’라는 비극적 기록을 남겼다. 최악의 산불 피해로 기억되는 지난 2000년 ‘동해안 산불’의 피해 면적이 2만3천여 헥타르였던 것을 떠올려보면, 이번 산불 피해 면적인 9만9천여 헥타르라는 숫자가 얼마나 아득한 피해였는지 알 수 있다. 발생한 이재민만 4만여 명, 전소된 건물만 2천여 채, 그리고 고운사, 봉정사를 비롯한 문화재의 피해도 상당했다. 올해의 비극은 여전히 복구 중에 있다.

올해의 역전 <세대 인구의 역전화>
올해 20대 인구가 70대 인구에 ‘추월’당했다는 국가데이터처의 발표가 있었다. ‘추월’이라는 표현을 쓴 데는 20대 인구가 70대 인구를 밑돈 것이 1925년 이후 1백년 만이라서, 그리고 한때 성인 인구 중 가장 많은 수를 기록했던 세대가 20대라서 그렇다. 더 큰 문제는 올해 20대 인구가 6백30만 명으로, 전 연령대에서 감소 속도가 가장 가파르다는 것. 내년에는 4백30만 명 수준으로 전망된다.

올해의 선물 <GPU 26만장>
APEC 기간 중 들려온 낭보. 이는 엔비디아가 한국 정부와 기업에 GPU 칩 26만 장 공급을 시작으로, AI 인프라와 관련한 모든 분야에 걸쳐 전방위적 협력을 갖겠다는 깜짝 발표였다. 그럼 GPU 26만 장의 가치는 어느 정도인가. 단순 나열하면, 먼저 화폐 가치는 약 20조원에 달하고, 보유 가치는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 수준이며, 무엇보다 AI 산업으로의 전환에 포석이 깔렸다는 데 의의가 크다. ‘피지컬 AI’라는 최우선 과제 앞에 이만한 선물이 또 있겠는가.

이재위ㅣ디지털 디렉터

올해의 사서 고생 <릴레스>
프랑스 래퍼 릴레스는 랩 실력만큼이나 러너로 유명한 인플루언서다. 지난 2월, 릴레스는 20시간이 넘도록 트레드밀 위에서 달리고 있었다. 그의 등뒤에는 거대한 시계 모양의 톱니바퀴가 회전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집중력을 잃거나 속도가 떨어지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타이머가 24시간을 가리켰을 때 릴레스는 트레드밀에서 내려와 새로운 앨범 의 수록곡인 ‘Dead or Alive’의 뮤직비디오를 원테이크로 촬영했다. 그 순간 10만 명의 팬들은 릴레스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라이브로 모든 것을 시청했다. 현재 해당 뮤직비디오의 조회수는 1천7백만 회를 넘겼다.

올해의 패배 <포이리에>
UFC 318 메인 이벤트, 5라운드 종료 직전 두 명의 파이터는 서로를 껴안았다. 승자인 할로웨이가 마이크를 잡았다. “자, 자, 잠깐 들어봐. 지금은 내 순간이 아니야. 더 이상 말하지 않을게. 모두 이 남자에게 박수를 보내줘!” 그는 짧은 말을 남기고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승자의 인터뷰를 이례적으로 패자에게 양보한 것이다. 패자는 UFC에서만 무려 30전 이상 치르며 ‘다이아몬드’라고 불렸던 더스틴 포이리에였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저 격투기를 사랑했던 아이가 꿈을 꾸며 살 수 있도록 해준 모두에게 감사해요.” 경기장엔 승과 패가 아닌 우정과 사랑만이 남았다.

박나나ㅣ패션 디렉터

올해의 트랙 <Bruce Springteen ‘State Trooper’>
새로운 손님과 규모, 달라진 공기와 습도. 조나단 앤더슨의 첫 디올 쇼는 모든 게 낯설었다. 유일한 익숙함은 인트로 음악인 브루스 스트링틴의 ‘스테이트 트루퍼’. 단조롭지만 어두운 비트, 아스팔트에 긁힌 듯한 거친 목소리, 가끔씩 들리는 절박한 절규. 짐작은 했지만 확신할 순 없었던 조나단의 첫 디올은 이 노래로 모든 게 명료해졌다. 패션쇼인지 서커스인지 헷갈리는 현실에서, 단추 하나마저 자세히 보고 싶게 만드는 옷과 조용히 심장을 뛰게 만드는 음악만으로 완벽한 쇼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상기시키는 사운드였다.

임채원ㅣ디지털 에디터

올해의 밈 <Matcha Spill>
‘#matcha’의 유행은 ‘말차 스필’을 통해 한층 패션적으로 퍼졌다. 콘크리트 바닥에 엎질러진 라테 자국 옆, 오늘의 룩이나 신발을 슬쩍 끼워넣는 이 ‘스필’ 이미지는 뉴욕 노호에 있는 말차 전문 카페 12 Matcha에서 랜스라는 뉴요커가 라테 일곱 잔을 쏟아버린 순간 시작됐다. 인스타그램 매거진, 카페, 푸드 계정의 말차 관련 게시물들은 이 사진을 끊임없이 퍼다 날랐다.

올해의 감수성 <A24>
<브루탈리스트>, <퀴어>, <머터리얼리스트>로 이어진 A24의 영화들은 올 한 해 한국 극장가에 독특한 감수성을 불어넣었다. 한편 미국 내에선 드웨인 존슨 주연 <더 스매싱 머신>, 티모시 샬라메 주연 <마티 슈프림>을 개봉하며 존재감을 확장했다. 아이코닉한 로고, 신박한 굿즈, 자체 출판 대본집과 진 ZINE, 팟캐스트로 전개되는 브랜딩은 마침내 레스토랑 ‘와일드 체리’까지 열기에 이른다. 독특한 작품과 영화 마케팅의 새로운 문법을 써나가는 행보. A24의 영향력은 더 정교해지며 문화적 현상에 가까워지고 있다.

올해의 하프타임 <Kendrick at Super Bowl>
2026년도 그래미 어워드 최다 후보에 오른 켄드릭 라마. 그가 59회 NFL 결승전 하프타임 쇼에 오르자 시청자 집계는 1억 3천3백50만 명까지 치솟는다. 무대 위 댄서들은 붉은색, 파란색, 흰색 의상으로 미국기를 상징하며 켄드릭의 존재감을 시각적으로 완성시켰다. 뷰익의 GNX, 나이키의 샥스, 하인즈의 머스터드, 플레어진 등 브랜드 광고 효과와 ‘크립워크’, ‘피지랭’ 등의 연관 검색어가 SNS를 뜨겁게 달궜다. 함께하는 첫 라이브를 선보인 SZA, 셀레나 윌리엄스, 사무엘 L. 잭슨까지 쇼를 함께 꾸린 인물들도 연일 주목을 받았다. 나는 ‘Not Like Us’의 주인공 드레이크를 심각하게 걱정했다.

정유진ㅣ패션 에디터

올해의 커플 <샤를 르클레르와 알렉산드라 생 믈루>
페라리 소속 F1 드라이버 샤를 르클레르가 ‘예술계의 엄친딸’ 알렉산드라 생 믈루와 약혼했다. 두 사람이 공개 연애를 시작한 건 2023년. 스타들의 연애가 공개될 때면 늘 ‘누가 더 아깝다’는 둥, ‘세금을 더 내야겠다’는 둥 하는 시답잖은 농담이 뒤따르지만, 이 커플에게만큼은 그런 반응이 전무했다. 누구나 인정하는 완벽한 선남선녀였기 때문. 뛰어난 외모는 기본, 각자의 본업에 충실한 모습이 참으로 ‘갓벽’한 워너비 커플이다.

올해의 회식 <깐부치킨 회식>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넥타이를 풀고 한자리에서 만났다. ‘깐부치킨’ 삼성점에서. 이 만남은 ‘깐부 회동’이라고 불리며 SNS에 빠르게 퍼졌고, 깐부치킨 삼성점에는 개점 시간 전부터 대기줄을 서는 ‘오픈런’ 현상까지 일었다. 이날은 엔비디아가 한국 정부와 삼성전자, 현대차그룹 등에 총 26만 장의 GPU를 공급하겠다고 발표한 다음 날. 말 그대로 ‘깐부’가 된 걸 축하하는 자리였던 셈이다. 한편 세 총수가 즐긴 메뉴는 ‘AI 깐부 세트’라는 이름으로 공식 출시됐다.

올해의 회복 <오존층>
지구에 관한 이야기라면 괜시리 울적해졌다. 이러나 저러나, 결론은 늘 암담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도, 책에서도 지구는 계속해서 병들어가고 있다는 말뿐이었으니까. ‘내가 뭘 더 할 수 있을까’ 싶은 무기력감에 빠진 어느 날, 미국 연구팀이 올 3월 발표한 ‘오존층 회복 가속화’ 연구 논문을 발견했다. 오존층이 상당 부분 회복됐다는 내용. 덧붙여 이런 추이라면 10년 내 오존층 파괴는 멈출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실 세상은 더 나아지고 있었다. 희망적이다. 노력하고 싶다.



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 챗GPT, Rilès ‘Dead or Alive’ 뮤직비디오, 산림청
기사 발췌
중앙일보 김경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