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누구는 올라가고 누구는 내려가고

2010.12.02GQ

어떤 감독은 진보했고 어떤 감독은 후퇴했다. 운동선수가 아니니까 공식 기록은 없다. 단지 영화관계자 5인의 기록일뿐.

UP 이창동 DOWN 김지운
<박하사탕> 이후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실현하기 힘든 미학적 미션에 매달린 것처럼 보였다. 그는 멜로드라마의 극적 휘발성이 강한 소재로 돌진한 다음, 가능한 한 그 멜로드라마의 극성劇性을 해체하는 식으로 스토리를 전개한다. 스타일은 점점 수식이 없어졌고 극적인 사건보다는 그 사건의 일상적 요소를 끄집어내며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행위만큼이나 반응에 주목한다. 당연히 그의 이런 전략은 관객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줬다. 이를테면 <밀양>에서 중요한 것은 여주인공의 비극적 사건만큼이나 그 사건에 대한 여주인공과 주변 사람의 반응이다. 여기서 감독은 어떤 극적 클라이맥스도 이끌어내지 않는다. 대신 끔찍하리만큼 공허한 소도시 중산층 시민들의 내용 없는 삶의 내용이 전시된다. <시>는 그것보다 더 나간다. 사건을 일찌감치 던져준 다음, 그 사건의 해결 방식보다는 그 사건을 대하는 여주인공의 반응을 축으로, 본다는 것의 행위를 물어본다. 근본적으로 영화 매체와 영화 관람의 본질까지 끌어안는 이 질문을 통해, 아름다움을 보려 했으나 고통까지 보게 된 ‘미자’는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가, 나아가 관객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지 묻는다. 전혀 극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수미일관 힘있게 밀고 나간 이 스타일은 지금까지 이창동 감독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미학적 고지라고 생각한다.

그와 반대로 김지운의 <악마를 보았다>는 제목이 표방하는 흥미로운 전제에도 불구하고 끝내 너와 나의 악마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이 영화에는 그들의 악마성을 최대한 양식화해서 전달하려는 공든 노력이 허무하게도 권선징악의 틀로 수렴되는 퇴행이 보인다. 적당히 찌르다가 안전하게 퇴각하는 이 형태라면 굳이 왜 이런 선정적인 소재를 택했는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스타일이 전경화되는 것이 형식주의자의 드센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내용의 센세이셔널리즘을 중화하려는 쩨쩨한 전략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의심이 든다. 한국에서 보기 드문 스타일리스트라고 흔히 말하는 김지운의 신작으로선 뭔가 미진한 일보후퇴작이다. 글/ 김영진(영화평론가)

UP 류승완 DOWN 장진
아직 해가 저물진 않았지만 류승완의 <부당거래>는 단연 올해의 영화라 추켜세우고 싶다. 올해의 베스트란 의미보다는 영화와 현실이 만나고 얽히는 지점, 마치 뉴스와 장르가 하나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은 오락적 쾌감, 그러니까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종류의 흥분을 안겨준 한국영화였기 때문이다. 류승완의 이전 영화들과 가장 다름에도 그가 아니면 못 만들 영화라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그는 언제나 한국영화계에서‘ 에너지’나‘ 패기’라는 단어와 동의어처럼 연상되는 감독이었다. <부당거래>는 그의 거침없는 돌파력을 보여주는 한편 절대 공을 놓치지 않는 노련한 드리블 실력까지 보여준다. 그도 어느덧 마흔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자신의 세련된 진화와 변함없는 저돌성을 모두 보듬은 <부당거래>는 류승완의 깔끔한 성인 신고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 그만큼이나 아끼고 좋아했던 장진의 이번 영화는 아쉬웠다. 이른바‘ 장진식 코미디’를 즐김과 동시에 길들여져 있다고 생각했음에도 장진의 <퀴즈왕>은 그로부터 갈수록 멀어지게 만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굿모닝 프레지던트> 등 지난 몇 년간 만든 그의 영화들이 더 많은 인물과 사건을 품고 있어서일까, 상황의 기괴한 연쇄와 충돌이 빚어내는 그 특유의 유머는 종종 그 길을 잃어버리는 기분이다. 동시에 그가 영화 속으로 어떤 상황에서건 기어이 끌고 들어오는 훈훈한 낭만주의는 그의 영화를 어딘가 자족적인 세계 안에 갇혀 있게 만드는 것 같다. 마냥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소년 같다고나 할까. 그의 빛나는 아이디어는 여전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풋풋함‘ 미담’ 그 안에 머문다. 반면 그는 오히려 이전과는 훨씬 더 민첩한 움직임으로 자신의 영화를 만들고 제작에 나서고 있다. <퀴즈왕>이 불과 지난 추석 프로였는데 벌써 신작 <로맨틱 헤븐>을 완성했다. 말하자면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그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감독 중 하나다. 글/ 주성철(<씨네21> 기자

UP 강우석, 류승완 DOWN 김상진
냉기를 뿜는 스릴러 <이끼>는 강우석 감독 연출인생의 이정표가 될 만한 영화다. 과거 정치 스릴러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를 만든 적이 있긴 하지만 스릴러는 그에게 여전히 낯선 장르다. 동명 원작 만화 마니아들을 중심으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긴 했지만 <이끼>는 강우석의 저력을 드러낸 영화다. 상대방이 있어야만 존재하는 선과 악의 본질을 다루면서 지금 이곳 한국 사회의 모습을 압축해 보여주는 연출력에 새삼 놀랐다. 그의 차기작은 농아 장애인으로 구성된 야구부를 지도하게 된 프로야구 스타와 여교사의 사랑에 대한 영화다. “이제야 연출의 맛을 알겠다”는 그의 다음 영화가 더 기대된다. 류승완 감독의 비약도 갈채를 받을 만하다. <부당거래>는 그가 묵직한 사회 비판 상업영화도 너끈히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설명이 필요 없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그의 말대로 <부당거래>는 별다른 설명이 뒤따르지 않아도 될 만한 명쾌한 영화다. <부당거래>는 류승완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눈부신 데뷔를 한 지 10년 만에 비로소 한국영화계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성장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퇴보한 감독으로는 김상진 감독을 꼽겠다. <주유소 습격사건 2>는 2000년대 충무로 코미디를 이끌던 간판 감독의 영화가 맞나 싶을 정도의 태작이다. 그는 <주유소 습격사건>의 속편을 10년 만에 다시 만든 이유조차 설명하지 못한다. 이야기의 아귀는 잘 들어맞지 않고, 현실 풍자도 매콤하지 않다. <신라의 달밤>과 <귀신이 산다> 등 헐거운 이야기에서도 촌철살인의 재미를 종종 던져줬던 김 감독의 재능은 더 이상 찾기가 힘들다. 글/ 라제기(<한국일보> 기자)

UP 장훈 DOWN 이창동
장훈의 <영화는 영화다>를 본 건 2년 전 부산행 KTX 영화 객실 안에서였다. 솔직히 여행 시간 동안의 무료함이나 덜어보자는 생각과 기차 안 영화관이라는 새로운 ‘문화’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보게 된 이 영화 자체에 대해 그리 큰 기대는 갖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수면실처럼 활용하고 있던 영화 객실에서의 첫 영화 경험은 내게 성찰력과 에너지가 위태롭지만 흥미롭게 공존하는 영화를 선사해줬다. 그리고 올해 장훈의 두 번째 영화, 그것도 대단한 흥행작 <의형제>가 공개되었을 때도 나의 기대 수준은 별로 높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영화관을 나오면서는 모종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부족하다. 개인적인 평가로는 <의형제>는 올해 나온 최고의 한국영화들 가운데 하나다. 전작에서의 다소 투박한 손길을 벗어 던지고 세련되고 매끈한 영화적 세공술을 선보인 장훈은 제대로 매만진 대중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서 자기 존재를 <의형제>를 통해 입증했다. <의형제>는 우선 많은 이들이 짚은 대로, 역사의 격랑 속에 빠진 인간의 이야기를 능숙하게 풀어놓았다가 당길 줄 아는 서사적 호흡으로 관객을 사로잡을 줄 아는 영화다. 동시에 영화적 쾌감 또한 안길 줄 아는 영화다. 서울 시내를 누비며 펼치는 초반부의 자동차 추격 장면은 바로 그 흥분감을 안다는 증명이고, 핸드 헬드 카메라로 찍은 액션 장면들은 움직임을 지워버리지 않을 정도로 적절한 것이었다. 물론 주연 배우, 시나리오 작가, 촬영감독 등이 기여한 바를 잊으면 안 되겠지만, 대중영화 감독은 그들의 작업을 최종적으로 조화롭게 ‘조직’하는 이라는 점 또한 상기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의형제>의 장훈은 탁월한 조직자였다고 평가하고 싶다.

한편으로, 올해 다소 실망감을 준 한국 감독은 이창동이었다. 물론 그의 이번 작품 <시>가 형편없는 졸작이라는 식의 평가는 아니다. 다만 그의 위상을 알기에, 전작들과 비교해 의문스런 부분이 많았다. <시>는 뭔가 혼란스럽게 엉켜 있는 영화였다. 나중에 여러 평자가 쓴 리뷰를 보니, 균열이니 고투니 하는 단어를 키워드로 동원해 영화를 설명했는데, 내가 보기에 그것은 시, 아름다움, 윤리, 고통 등등에 대해 조리 있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영화를 옹호하는 방식일 뿐이었다. 또한 나는 이 영화에 대해 여러 의문을 갖는다. 예컨대, 윤정희가 연기한 ‘미자’ 캐릭터가 생경해 보이는 것은, 영화 속 그녀의 존재가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과거 영화 속 ‘전설’ 로 부터 기이하게 회귀한 존재이기 때문은 아닌지, 미자와 죽은 소녀가 겹치는 마지막 장면은 정말로 설득력이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한편으로 나는 <시>에 대해 왜 사람들이 어떤 ‘의구심’을 갖지 않는지 다소 의문이다(그리고 의심스럽다). 그렇다고 제작지원 평가에서 이 시나리오에 영점을 준‘ 만행’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글/ 홍성남(영화평론가)

UP 류승완 DOWN 김종관
황정민, 류승범의 조합은 <사생결단>에서 이미 봤다. 나오는 족족 기대에 못 미친 최근 한국의 스릴러에 대한 불신도 있었다. 무엇보다 류승완이 감독으로서 보여줄 만한 건 다 보여주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부당거래>는 이 모든 회의, 불신, 우려를 순식간에 날려버렸다. 위기-위기-절정-절정-결말의 구조를 가진 이 영화는 2시간 내내 쉬어갈 곳 없이 관객을 몰아 부친다. 게다가 류승완은 그간 약점으로 지적됐던 ‘스토리텔링’까지 능숙하게 해낸다. 배우들의 차진 연기야 류승완의 전작에서도 봐왔지만, <부당거래>에선 작품 전체의 완성도에 힘입어 배우 보는 재미가 배가됐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 비수기 개봉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이 류승완의 극적인 컴백을 반기고 있다. 전적으로 ‘올해의 발전’은 류승완이다.

김종관은 신인이되 신인이 아니다. <조금만 더 가까이>는 그의 첫 장편이지만, 그는 이미 단편영화계의 스타 감독이었다. 단편 <폴라로이드 작동법>은 원석 같은 정유미를 세상에 드러냈다. 수줍고 내성적이지만 절실한 그의 단편 멜로는 탄탄한 팬 층을 형성했다. 미국의 비평가 클리프턴 패디먼은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장편보다 단편이 뛰어나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런 이유를 들었다. “단편소설 속에는 그의 단점들이 드러날 시간과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가 <조금만 더 가까이>에도 적용된다. ‘홍대 멜로’라 지칭될 만한 이 영화는 홍보사의 표현대로 ‘감성 돋는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감성은 아쉽게도 15분만 지속된다. 장편을 지탱하는 감성은 내러티브의 등을 타고 달려야 한다. 옴니버스란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감성과 상황만으로 장편을 만들겠다는 시도는 지나치게 실험적이다. 글/ 백승찬(<경향신문> 기자)

    에디터
    글/ 김영진(영화평론가), 주성철( 기자)/, 라제기( 기자)/ , 홍성남(영화평론가)/ , 백승찬( 기자)
    아트 디자이너
    Illustration/ Park Chang Y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