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중음악을 향한 문제적 질문들.
샤이니의 끝은 어디일까?
남성 아이돌이 남자들에게 사랑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국내 남성 아이돌이 이성에게 어필하는 방식이 주로 달콤하고 예쁜 남자의 형태라서다. 웬만큼 준비된 청자라도 그 ‘오글미’의 벽 앞에 무너지는 것이다. 실력이나 다른 매력으로 이 벽을 돌파하는 경우도 있지만, 성공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니 차라리 여성 팬이나 확실하게 잡자는 전략도 이해가 간다. 한국에서 가수가 댄스음악으로 인정받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남이 만들어준 댄스곡을 부르며 춤추는 가수는 대체로 평가가 박하다.(물론 나름의 일리는 있다.) 발라드 절창이나 해외 시장 정복으로 자신을 입증한 경우를 빼면, 우리에겐 그리 남는 게 없다. 그런 점에서 샤이니의 행보는 심상치 않다. <The Misconception of You> 음반의 수록곡들은 ‘오글미’의 수위를 절제하면서 진보적인 사운드를 펼쳐낸다. 참신하면서도 힘 있고 탄탄한 이 음반의 음악적 설득력은 웬만한 남자들마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샤이니를 만들어낸 프로덕션의 승리다. 이렇게 마음의 벽이 한번 무너지고 나면, 프로덕션의 후광을 받고 있는 샤이니 멤버들의 춤과 노래가 눈에 들어온다. 적어도 기량 측면에서는 흠잡을 곳이 없다. 심지어 감탄이 나오기 시작한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여전히 그들은 여의도의 망원렌즈를 모조리 동나게 만드는 미소년들이다. 아무리 뜯어봐도 아이돌이다. 그럼에도 샤이니의 입지는 점점 넓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댄스 음악을 하는 아이돌로서, 어쩌면 가장 폭넓게 인정받는 그룹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들의 행보는 바로 그 방향을 향하고 있다. 남성 아이돌의 근본적 한계를 무너뜨리는 게 이들의 목표일까? 그것도 가장 아이돌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이런 정면 돌파, 꽤 근사한 야망 아닌가? 미묘(음악가, <krrr.kr> 운영자)
2AM에겐 이젠 방시혁과 박진영이 필요하지 않나?
2AM은 소속사 관계가 복잡하다. 처음 데뷔를 준비하던 곳은 JYP 엔터테인먼트였지만, 실제 데뷔는 매니지먼트 위탁 형태로 큐브 엔터테인먼트에서 했다. 그 뒤 다시 JYP로 돌아와 활동하다가 2010년 방시혁의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로 매니지먼트 권한이 넘어갔다. 간단히 말하면 현재 2AM은 방시혁과 함께 일하고 있다. 그룹의 공식 홈페이지에도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의 이름만 있다. 조권의 솔로 음반도 빅히트의 기획에서 나왔다. 산업적 측면에선 박진영은 몰라도 방시혁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음악적 측면이 있다. 2AM의 초기 히트곡인 ‘이 노래’는 박진영이 썼다.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죽어도 못 보내’는 방시혁이 작곡했다. 그룹 멤버인 창민과 에이트의 이현이 결성했던 듀오 옴므의 히트곡 ‘밥만 잘 먹더라’도 방시혁의 곡이다. 하지만 신보 <어느 봄날>에선 박진영이 보이지 않는다. 방시혁도 한발 뒤로 물러서 있다. 대신 노리플라이, 에피톤 프로젝트, 디즈, 이루마 등의 이름이 앞에 나섰다. 이승기와의 작업을 통해 본격적으로 메이저 신에 진입한 에피톤 프로젝트를 비롯해, 새로운 인물을 통해 신선함을 불어넣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결과는 절반의 성공이랄까? 신선함과 진부함이 비슷한 비율로 섞여 있지만, 결정적이라 할 만한 순간은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좋은 시작이라 평할 만하다. 박진영과 방시혁이 꾸준히 자기복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니 더 그렇다. 즉, 음악적 측면이라면 박진영, 방시혁 모두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 최민우(대중음악 웹진 <weiv> 편집장)
씨스타는 어떻게 섹시한가?
데뷔곡 ‘Push Push’부터 씨스타19의 ‘있다 없으니까’까지, 씨스타는 실제 무대뿐만 아니라 모든 안무 연습 동영상에서 어김없이 하이힐을 신고 있다. 퍼포먼스에 대한 성실성이 보이는 한편, 그들이 늘 섹시한 이미지를 고수해왔음을 알 수 있다. 노출이 심한 의상으로 선정성 논란을 일으키거나 방송 심의 때문에 더 과감한 안무를 포기한 적도 있지만, 씨스타의 콘셉트는 역시나 섹시를 주무기로 하는 다른 걸그룹들과는 좀 멀어 보인다. 일단 의상이나 안무와 달리 씨스타가 선보인 거의 모든 노래의 가사엔 섹슈얼한 인상이 일체 배제돼 있다. 실연을 마주한 경우는 물론이고, 사랑을 말하고 그 마음에 겨워하는 노래도 어디까지나 지순한 정도에서 그칠 따름이다. Sister와 Star를 더한 그룹명 역시 이런 일관성이 우연이 아닌 친근함이라는 엄연하고 미묘한 콘셉트에 달려 있음을 내다보게 한다. 또한 무대 바깥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순박한 말투와 털털한 웃음, 아이돌 육상대회에서 2연패를 기록하는 씩씩함은 활동 초기의 몇몇 루머를 불식시킬 만큼 유쾌하고 친근하게 다가왔다. 아마도 뭇 남성 팬들은 주변을 돌아보면 닿을 수 있을 법한 모습(지나치게 마르지 않은 몸매 역시 이에 포함될 것이다)에 오히려 더 큰 매력을 느꼈을 터다. 아이돌 산업이 결국 고도의 전략으로 판타지를 생성하며 성공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라면, 씨스타는 그 판타지를 지움으로써 제일 잘나가는 걸그룹 아이돌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문동명(<GQ> 피처팀 어시스턴트)
용감한 형제는 다시 전성기를 맞았나?
브라운 아이드 걸즈의 ‘어쩌다’에서 손담비의 ‘토요일 밤에’까지는 용감한 형제의 첫 번째 전성기였다. 80년대 후기 디스코에 가까운 소리가 주무기였다. 그러다 애프터스쿨의 ‘Diva’와 유키스의 ‘만만하니’를 기점으로 소리의 질감, 각종 효과, 곡의 전개 방식 등에서 현대의 전자음악 작법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복고적인 인상이 너무 강했기 때문인지, 현대의 전자음악을 차용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신사동 호랭이가 치고 나왔기 때문인지, 주춤하는 모습이었다. 그 시기 오히려 주목할 만한 전환점은 브레이브 걸스의 ‘아나요’다. 브레이브 걸스는 용감한 형제가 세운 브레이브 사운드 소속으로, 그가 직접 제작했다. 주문받은 노래가 아니란 말이다. ‘아나요’는 주류 알앤비에 가깝다. 크게 히트하진 못했지만, 용감한 형제는 씨스타의 ‘Ma Boy’로 비슷한 콘셉트에 재도전했고, 손담비 이후 가장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역시나 브레이브 사운드의 일원인 일렉트로 보이즈가 힙합 콘셉트를 고수하는데다, ‘Ma Boy2’를 다시 불렀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알앤비/힙합이라는 YG 시절부터 이어온 자신의 본래 장기를 다시금 꺼내든 것이다. 특히 이후 씨스타와 용감한 형제의 협업은 묘한 화학작용을 일으켰다. 아무리 전자음악적 요소를 차용할지언정 알앤비/힙합의 색이 완전히 지워지진 않았다.(씨스타 역시 처음엔 2NE1을 겨냥한 그룹으로 출발했다는 점에서 용감한 형제와 일정 부분 공통점이 있다.) 혹자는 ‘나혼자’를 두고 닥터 드레의 ‘Still Dre’와 로린 힐의 ‘Doo Wop’을 거론하기도 한다. 이런 논의 자체가 그가 어떤 음악을 즐겨 듣는 이들에게 주목받고 있는지를 대변한다. 그리고 지난해 하반기부터 전자음악 기반의 아이돌 음악 대신 ‘일렉트로 뉴잭스윙’이나 지드래곤처럼 과감하게 힙합을 내세우는 판이 다시 돌아오면서 용감한 형제는 확실한 동력을 얻고 있다. 현아의 ‘Ice Cream’을 비롯해 씨스타의 ‘나도 여자인데’,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나온 ‘어이없네’는 명백한 알앤비/힙합이다. 그의 라이벌들이 주춤하는 인상이고 당장 초대형 히트곡은 없지만, “용감한 형제 작곡, 가요 100위권 내 7곡 랭크”류의 기사가 쏟아질 정도로 그는 다시 확실한 히트메이커로 돌아왔다. “박진영 가고 방시혁 가고 조영수 가고 호랭아 엄마 젖 더 먹고 와”라는 그의 노래 가사가 비로소 현실이 된 것이다. 에디터/ 유지성
버벌진트의 음악을 한국형 힙합이라 말할 수 있나?
한국 힙합도 아니고 한국형 힙합이라니. 요즘 한국형 힙합이라 불리는 음악들의 특징은 대개 비슷하다. 신파조의 랩과 발라드풍의 보컬이 사이좋게 번갈아 등장하는 형식. 랩은 화자의 처지를 설명해주고, 보컬은 청자의 감정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사실 이런 형태의 곡들은 오랫동안 가요계의 흥행 코드로 존재했다. 단지 버벌진트를 비롯해 힙합 신에서 손꼽히던 뮤지션들이 대중가요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한국형 힙합이란 말, 또는 개념이 대두된 것뿐이다. 이전까진 전형적인 가요에 랩만 올린 노래를 함부로 힙합이라 말하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달라졌다. 뮤지션들부터 인터뷰나 보도 자료를 통해 음악은 좀 달라졌어도, 여전히 자신의 음악이 힙합임을 주장한다. 버벌진트는 ‘인디 감수성’을 녹여낸 음반 <Go Easy>의 성공 이후 노골적으로 대중에게 다가갔다. 이제는 주류 작/편곡가의 틀 안에 자리 잡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힙합 프로듀서 랍티미스트가 쓴 배치기의 ‘눈물샤워’ 또한 기시감이 든다. 그나마 장르 고유의 특성이라 할 만한 점은 짜임새 있는 라임 정도뿐인데, 버벌진트의 랩은 힙합의 색을 지우자 기술만 남아 큰 감흥이 없다. 물론 버벌진트의 랩보단 특유의 예술가적 기운에 마음을 뺏긴 여성 팬이 대부분이지만…. 심지어 그가 한때 무시했던 배치기의 랩이 더 호소력 있게 들리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한국형 힙합이란 개념은 오랫동안 힙합에 투신했던 장르 음악가들이 대중가요 시장으로 뛰어들면서 생긴 착시현상에 가깝다. 남성훈(웹진 <리드머> 부편집장)
왜 방예담인가?
춤과 노래는 가르치면 된다. 얼굴은 고치면 되고, 살은 찌우고 뺄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SM, YG, JYP라도 나이를 되돌릴 수는 없다. 회사는 뮤지션이 어릴수록 재능을 최대한 끌어내고, 원하는 방향에 맞춰 성장시킬 수 있다. SM은 보아를 열다섯에 이미 춤과 노래의 전문가로 만들었고, YG는 열세 살의 지드래곤을 데려와 일주일에 하나씩 곡을 쓰게 했다. 그러니 보아와 양현석과 박진영에게 방예담이 얼마나 예뻐 보일까. 나이 탓에 아직 성량도 부족하고, 음역대도 넓지 못하니 온 대중을 열광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겨우 열두 살짜리가 스티비 원더의 ‘Sir duke’의 첫 소절을 제대로 ‘팝 필’ 나게 부르는 것은 놀라운 일이고, 박진영이 평했듯 박자를 정확하게 짚는 능력은 탁월하다. 노래에서 강조할 부분과 힘을 빼야 하는 부분을 아는 감각, 생방송 무대에서 떨지 않고 마이클 잭슨 흉내를 내는 스타성도 있다. 어린 마이클 잭슨과 비교하면 애들 장난 같아 보이겠지만, 방예담을 지구 역사상 최고의 가수와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 방예담의 가치는 지금 실력이 아닌 나이에서 나오고, SM, YG, JYP는 방예담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 이미 YG는 이하이를
씨앤블루는 TV에서도 라이브를 해야 하나?
씨엔블루를 보면 1990년대 중반 컬트적 팬덤을 누렸던 이른바 ‘일본 비주얼 록밴드’가 떠오른다. 더불어 TV에서 립싱크를 할 경우 별도의 아이콘을 화면에 표시하던 시절도. 이런 기억이 한 뭉치가 되어 케이팝/아이돌 시대까지 소환된 건, 당연한 소리지만 씨엔블루 자신이 아니라 소속사의 의지 때문이다. 이미 FT아일랜드라는 전례가 있던 바, 씨엔블루로 새롭게 내건 기치는 ‘라이브도 잘하는 아이돌 록밴드’였다. 물론 이것은 현 케이팝 문화 수용자들의 의지와는 별 상관이 없는 명제다. 누가 씨엔블루에게 진짜 라이브를 원하나? 아마 소속사뿐일 것이다. 케이팝과 아이돌의 득세는 대중음악이 갖는 문화적 가치의 폭을 늘렸다. 1960년대 미국 걸그룹 문화가 그랬듯이 기획된 음악, 잘 조작된 제스처만으로도 좋은 상품이 될 수 있고, 결과에 따라 미학적 가치로도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씨엔블루로 돌아와서, 누가 그들에게 록밴드의 정체성을 원했나? 그보다는 록밴드의 고전적인 스펙터클을 순정만화의 화보나 기예로 바꾸는 가공의 유희를 바라지 않았을까? 절충주의가 적중할 때는 애초에 취한 것을 경쾌히 비틀거나 능란히 무시하면서 의외의 효과가 발생할 때다. 최근 그들이 겪은 일련의 소동이 시사하듯, 케케묵은데다 시장이 원한 적도 없는 원리원칙 속에서 허방에 빠지는 게 아니라. 최세희(대중음악 평론가)
싸이 이후 공신력 있는 차트가 꼭 필요한가?
- 에디터
- 유지성
- 아트 디자이너
- Illustration/ Lee Jae Ju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