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욕망 없는 얼굴

2014.03.13GQ

정성일이 본 김수현, 원빈, 송중기의 얼굴. 그 얼굴이 주인공일 때마다 공허했던 욕망.

Film판형

나는 다소 우스꽝스럽게 시작하고 싶다. 한번쯤 대중문화연구에 관한 강의를 들어본 적이 있는 학생에게 영화와 대중 사이의 사회적 관계는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영화는 대중들의 꿈을 만족시켜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해서 봉사하지요. 만일 진정한 예술이라면 그들을 깨어나게 해야 할 것 입니다. 자, 알겠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좀 더 이 주장을 밀고 나가고 싶다. 프로이드에게 왜 우리는 꿈을 꾸나요, 라고 묻자 간단하게 대답했다. 꿈의 궁극적인 기능은 꿈꾸는 사람이 계속해서 잠을 잘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것이지요. 나는 두 가지 대답을 하나로 묶고 싶다. 영화는 잠들어 있는 대중들이 계속 잠을 잘 수 있도록 꿈꾸게 도와주는 중이다. 그래서 대중영화들은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과 할 수 있는 한 비몽사몽 상태에 빠져든 채 교감을 나누려고 애를 쓴다. 그때 이 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유혹의 덫에 올려져 있는 미끼는 물론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자, 알겠다. 그런데 거기에 누가 뛰어드느냐는 기괴한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좀 더 간단(하지만 무자비)한 예. 우리는 <변호인>에서 변호사 송우석의 역할을 송강호 말고는 달리 떠올릴 수가 없다. 그러나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 천재적인 바보 위장 남파간첩 방동구 역할을 누가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은 갑자기 자유로워진다. 물론 김수현이 잘해냈다. 좋다. 그런데 그걸 원빈이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송중기라면 어땠을까. 물론 장근석도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유아인이 생각났다. 그런데 왜 여기에서 하정우는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 일까. 아무래도 조승우도 안 되겠다. 당신은 내가 지금 연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말하자면 주인공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 종종 영화에 대해서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비평 담론들의 모든 가설을 엉망 진창으로 만드는 대중적인 열광 중에서도 가장 신비로운 현상의 시간은 바로 그 자리에 스타가 결합하는 순간이다.

누군가 21세기 한국영화에 관한 취향의 역사를 쓴다면 가장 이상한 현상은 ‘완소남’ 주연의 연대기일 것이다. 물론 영화는 미남미녀들의 별들로 이루어진 은하수의 대중문화사를 이루어왔다. 이는 일제 강점기의 영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신기한 것은 21세기 한국영화에 나타난 참으로 곱디고운 꽃 같은 미소년들이 주인공으로만 이루어진 영화들의 출현이다. 처음에는 그저 무심코 넘어갔다. 혹은 그저 일회적인 이상한 성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틀렸다. 이 영화들은 점점 많아지면서 일종의 도미노처럼 거의 모든 장르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이 현상이 영화와 텔레비전, 그리고 댄스 그룹으로 산만하(면서도 서로 긴밀하)게 거미줄처럼 뒤엉켜 있어 어디서 처음 시작돼는지 누구라도 종잡지 못할 것이다. 그저 영화에 한정지어서 그 새로운 출몰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왕의 남자>에서 공길이라는 남사당 광대패로 등장한 이준기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여기엔 좀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다. <왕의 남자>는 시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얻었지만 모두가 흥행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게다가 명백한 동성애에 가까운 우정은 대중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킬 것이라고 선수들은 즉흥적으로 분석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퀴어 시네마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사랑에 장록수는 질투에 몸부림치기 시작한다. 물론 그때 이준기가 누군지 알고 있는 관객은 거의 없었다. ‘빵꾸 때우기’처럼 크리스마스도 지난 연말에 갑자기 개봉한 <왕의 남자>는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에 이어 세 번째 1천만 관객 영화가 되었다. 모두 달려들었지만 무언가 이 영화의 기기묘묘한 성공은 잘 설명되지 않았다. 산업 안에서, 아무도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이준기라는 존재를 불길하게 바라 보았다. 불길하다고? 그렇다. 갑자기 게임의 규칙이 바뀌고 있음을 누구라도 직감했다. 연기가 훌륭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남사당패 장생과 연산군이라는 미친 왕, 두 남자 사이에서 사랑의 감정 내기를 벌이는 미소년의 드라마가 심금을 뒤흔들 만큼 섬세한 것도 아니었다. 아니, 만일 그랬다면 그렇게 커다란 성공을 거두지 못 했을지도 모른다. 가장 신비로운 것은 그냥 이준기라는 존재 자체가 거기 있음으로써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가벼운 미소, 가끔 찡그리는 눈. 이따금 수줍은 듯 뒤튼 제스처. 매번 힘겹게 해내는 대사에 묻어나는 가쁜 숨결. 거기서 문득 영화에서 얼굴이 지니고 있는 마법에 가까운 힘을 생각해냈다. 물론 모두 잘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새로운 사실은 그 힘이 갑자기 여자에서 ‘예쁜’ 남자로 옮겨갔다는 것이었다. 그 힘의 이동은 어쩌면 21세기 한국의 은밀하고 위대한 (어쩌면 위험한?) 변화에 관한 하나의 징후일지도 모른다. 힘의 이동은 계속해서 사회를 실험하는 새로운 경기장의 발명이며, 우리들은 그 경기장 안에서 하여튼 견디고 살아남기 위하여 새로운 경기를 즐기는 법을 익혀야만 한다. 그때 우리는 꿈과 경기 사이에서 항상 실패한다는 정신분석의 다소 냉정한 충고를 떠올려야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실패로부터 위로받기 위해 마침내 도착적 버전을 만들어낸다. 경기에서 가져본 적이 없는 성공을 마치 꿈에서 상실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처럼 능동적인 착각에 빠져드는 것이다. 질문은 간단하다. 왜 가져본 적이 없는 상실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서 ‘예쁜’ 남자를 만나고 싶어졌느냐는 것이다.

나는 과도하게 이 대답을 도식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그 대신 오류를 무릅쓰고 질문을 던져볼 생각이다. (모두가 애칭으로 부르는)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남파간첩이 왜 달동네에서 바보 행세를 하는 임무를 수행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북한 특수부대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왜 단 한 명의 여자 주인공도 없느냐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에 로맨스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말을 바꾸어도 방동구를 따르는 고등학생 위장간첩 리해진(이현우)은 방동구를 만나 한눈에 사랑에 빠져 그 힘든 훈련을 이겨내고,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여기 남한 달동네까지 남파한 것이다. “내래 남조선 아새끼들에게 진정한 인민의 락을 보여주”겠노라고 다짐하고 남파한 리해랑(박기웅)도 방동구에게 순정의 감정을 느껴보기 시작한다. 그냥 간단하게 (일본 만화에서 영향을 받고 퍼져나간) BL(Boys love)의 대중적 승리라고 설명하고 싶겠지만, 그러나 방동구에 대해 갖는 ‘모에(萌え)’가 그렇게 단순하게 작동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은,위>는 BL이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상대방에 대한 성적인 터치가 없다. 아니, 차라리 이야기는 BL이면서 정작 인물의 제스처는 호모포비아로 느껴질 정도로 상대방을 건드리는 것에 대해서 어떤 두려움을 느낀다.

왜 이런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 걸까. <은, 위>는 마치 두 편의 서로 다른 영화를 하나로 붙여놓은 것처럼 중간까지 진행된 다음 갑자기 환골탈태한다. 바보 방동구는 달동네에서 가장 힘없는 존재다. 아니, 차라리 거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러다가 북한에서 남파한 ‘연어 떼’들을 몰살하기 위해서 특수부대원들이 내려오자 그들에 저항하기 위해 (항명하기 위해?) 원래의 특수공작원 원류환이 될 때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다. 말하자면 <은, 위>에는 다른 두 명의 김수현이 있다. 나는 그 둘을 이렇게 설명하고 싶다. 방동구는 남성성을 완전히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리비도조차 거세당한 소년처럼 행동한다. 원류환은 전형적인 ‘하드 보디’를 회복한 다음 그걸 노골적으로 전시하면서 매우 폭력적인 행동을 어떤 망설임도 없이 보여준다. 그 둘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서 방동구에서 원류환이 된 다음에는 회복한 자신의 리비도를 투사할 만한 대상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제까지 명랑했던 성격은 모두 어디론가 증발해버리고 마치 우울증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멜랑콜리한 목소리를 유지하면서 음울해진다. 그래서 그가 사용하는 총과 칼, 그리고 주먹이 마치 (도식적인 설명이긴 하지만) 이제까지 억눌렸던 성적인 에너지의 교환처럼 보일 정도다. 자, 이때 핵심은 여전히 여기에 단 한 명의 여자와의 터치도 없다는 것이다. (우정을 가장하고 사랑을 나누면서) 우호적이건 아니면 (전멸시키기 위해서 나타난 척하면서 폭력으로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터치하며) 적대적이건 이 교환은 오로지 남자들 사이의 네트워크로만 이루어져 있다. 약간 위협적으로 큰 젖가슴을 과시하는 이웃집 아가씨와 종종 방동구에게 호의적인 인사를 하는 출근길 아가씨가 있지만 그녀들은 일정 거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어떤 저항선에 방해라도 받는 것처럼 밀려난다. 종종 따분한 영화 정신분석에서는 관객들의 감정적인 동일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여자 관객들은 여자 주인공을 경유하여 그 자리에 가서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며, 그 시간에 남자 관객들은 반대의 경로를 따른다고 설명한다. 그때 연인들은 사실상 영화를 보면서 상대방의 손을 잡고 있긴 하지만 눈으로는 각자의 상대와 은밀한 불륜을 즐긴다. <은, 위>는 이 단순한 설명을 불편하게 만든다. 남자들만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이 이야기에서 김수현과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 여자 관객들은 누구를 경유해야 하는 것일까. 대답은 기괴해 보인다. 방동구는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보호의 대상처럼 행동한다. 그때 당신은 영화에는 비어 있는 자리인 방동구의 어머니의 자리로 갈 것이다. 이야기 안에서 방동구가 오로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북한에 있는 어머니의 소식이라는 것을 떠올려보라. 갈 수 없는 고향. 끊임없는 호명, 어머니. 바로 당신. 하지만 우리는 <은, 위>에서 북한이 가상의 나라(Nowhere)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온 존재할 수 없는 인물의 어머니 되기. 이때 나는 다소 불편한 표현을 쓰고 싶다. <은, 위>의 사랑의 감정에는 주인공과의 관계에서 어딘가 불감증의 에로티시즘이 묻어나온다. 난 네가 정말 다 좋아, 바보라도 사랑해, 단 한 가지, 그런데 왠지 섹스를 상상하는 건 아무 감흥이 없어. 여기에는 리비도와 아름다운 대상 사이의 분리가 있다. 그 분리를 둘러싸고 감도는 것은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슬픔이다. 이 영화가 명랑만화처럼 끝까지 진행되지 못하고 결국 우울한 슬픔에 빠져들기 시작했을 때 사라진 남성성이 귀환하는 것을 보는 것은 사실상 자기 아들이 괴물이 되었음을 보는 것이다. 여기엔 어떤 카타르시스도 없다.

나는 이와 똑같은 공식을 이미 <아저씨>에서 보았다. 전당포를 운영하는 이 남자는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주민등록증도 말소되었고 이름도 알 수 없다. 그림자 같은 사람. 머리카락이 얼굴을 거의 가려서 표정도 볼 수 없다. 원빈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이 남자에게 이제 막 열 살이 된 소녀(김새론)가 찾아온다. 그 다음은 당신이 잘 알고 있는 그대로다. 그들은 마치 의식을 치르듯이 그림자로부터 원래의 자기에게로 돌아갈 때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른다. 방동구에서 원류환으로, 그리고 전당포 주인에서 인간병기로 되돌아갈 때 그들은 비로소 자기 얼굴을 드러낸다. 혹은 그때 비로소 김수현이 김수현다워지고, 원빈이 원빈다워진다. 당신이 바라던 그 순간. 나는 레비나스의 말을 빌려 약간 신중하게 표현하고 싶다. 얼굴은 직설법이 아니라 명령법이다. 텅 빈 그림자를 채우라는 명령. 그때 도래하게 될 충만감. 이때 이 둘 사이의 공통점은 그것만이 아니다. 정체불명의 이 남자가 고요한 은둔생활을 포기하고 다시 세상의 폭력 안으로 돌아올 때 그가 구하려는 상대는 이제 막 열 살이 된 소녀다. <아저씨>는 제목과 달리 어디에도 롤리타 콤플렉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리비도의 냄새가 감돌지 않는다. 그의 아내는 오래전에 죽었고, 이 남자는 소녀의 젊은 엄마에게 관심이 없다. 소녀 소미는 이 남자에게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일까.

<아저씨>가 <은, 위>와 다른 점은 ‘아저씨’가 소미에게 없는 아버지의 역할을 하려는 상상적 자기 위로의 이야기로 슬그머니 옮겨간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자기가 왜 그 일을 하려 드는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아저씨’는 존재한 적이 없는 딸의 자리에 소미를 데려오고 소미는 경험한 적이 없는 ‘아버지’의 자리에 이 남자를 소환한다. 말하자면 부등가교환으로 이루어진 상징적 가족의 성립에 관한 이야기. 이때 여기에는 어머니의 자리가 없다. 아니,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자리를 삭제한다. 그런 다음 동일한 결론. 이 남자는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점점 괴물이 되어간다.

나는 재빨리 세 번째 예를 제시하고 싶다. 이 둘 사이에 다소 변주곡이라고 부르고 싶은 <늑대소년>이 있다. 순이(박보영)는 요양차 머문 시골집 창고에 숨어 있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사람처럼 보이지만 말을 할 줄 모르는 이 소년(송중기)은 절반은 인간이지만 절반은 늑대다. 그가 언제 늑대가 될지는 물론 당신이 기대한 그 순간이다. 여기서 구태여 이 이야기가 팀버튼의 <에드워드 가위손>의 카피 버전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싶지 않다. 내 논점은 거기에 있지 않다. 송중기는 늑대라기보다는 애완견처럼 보인다. 구태여 나는 소년이라고 쓰는 대신 그걸 연기한 배우의 이름을 썼다. 이 이야기는 늑대와 소녀가 섹스를 할 수도 있는 위험한 경계의 언저리까지 단 한순간도 다가가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 선을 지나쳐서 그냥 해버린 다음 두 아이를 낳는 일본 애니메이션 <늑대아이>와 비교해보라. 정말 송중기는 마지막까지 그저 애완견으로 머문다. 소녀가 진심으로 송중기를 돌보기는 하지만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어떤 방어선이 있다. 이 이기적인 로맨스의 셈법은 마찬가지로 부등가교환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상에 자기의 애완견이 두 명의 주인을 섬기는 것을 참을 수 있는 주인이 있을까. 응, 넌 나만을 사랑해야만 해. 하지만 나는 너와 할 생각이 없어. 이때 방해받는 것은 둘 사이의 진정한 사랑의 실패가 아니라 정반대로 둘 사이의 현실적인 사랑의 성공이다. 여전히 여기서도 소년의 남성성은 거세되어 있으며 그가 그걸 되찾으려는 순간 짐승으로 변해버린다. 그러므로 소년이 자신의 힘을 되찾았을 때 소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호의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개의 충돌을 환기시키고 싶다. 이상하게도 ‘완소남’ 장르라고까지 부르고 싶은 이 영화들에는 어딘가에서 유령처럼 가족이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분명히 이 이야기들은 부서진 가족을 복원하려는 어떤 안간힘처럼 여겨지는 순간을 포함하고 있다. 때로는 노골적이고 때로는 은밀하게 그 감정을 드러낸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꽃미남’들의 출몰 때문에 단순하게 생각한 것과는 달리 ‘완소남’과 가족을 이루려는 결혼의 환상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불가능의 조건을 제시한다. 여기서는 보상과 상실이 소망과 포기와 손수건 돌리기 놀이를 하기라도 하듯이 자리를 바꾼다. 난 당신을 간절하게 만나고 싶어요. 하지만 그저 거기 머물러주세요.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난 당신을 갖고 싶어요. 하지만 하고 싶진 않아요. 여기에는 수수께끼 같은 불연속성이 고스란히 남아서 꿈을 유지시키고 있다. 말하자면 토막 난 꿈의 이야기. 그때 정말 토막 나는 것은 세상을 견디게 도와주는 욕망이다. 나는 이 영화들을 보면서 이상하게도 욕망이 세상으로부터 철수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여기에 다소 우울한 결론을 당신께 던져보고 싶다. 나는 이들이 자기 자신을 미처 방어할 수 없는 나이에 IMF를 통과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아마도) 이들은 자기 자신이 가져본 적이 없는 대한민국의 흥청망청 버블이 넘쳐나던 경제적 호황의 효과를 재난의 형식으로 되돌려 받은 다음 그 ‘이후’를 살아가는 중이다.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의 상실. 부서져가는 가족. 그것을 시작하게 만든 결혼이라는 제도. 같은 말의 반복, 혹은 후렴구. 난 그걸 갖고 싶지만 하고 싶진 않아요

    에디터
    글 / 정성일(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