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랜드마크를 찾았을까? 63빌딩이면 될 줄 알았는데 30여 년 후엔, 동대문 디자인플라자를 만들었다. 서울은 여전히 랜드마크가 필요한 도시일까? 지금 서울에서 랜드마크를 바라보는 건축사이자 <랜드마크; 도시들 경쟁하다>의 저자 송하엽 교수를 만났다.
랜드마크가 아직도 필요한가에 대한 이야기는 좀 지겹다. 그보다 궁금한 건 랜드마크는 어떤 기능을 하는 건물이어야 하는가이다. 공공건물의 기능이라는 건 상당히 정치적인 부분이다. 과거에는 도서관, 미술관, 박물관을 많이 사용했지만, 지금은 공간의 기능이 명확하지 않은 불확정 공간까지도 공공의 역할로 보고 있다. 사실 서울에 가장 필요한 공간은 오히려 확실하지 않은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동대문 디자인플라자(이하 DDP)도 많은 부분이 비어 있기 때문에 불확정 공간인가? DDP의 운영 주체는 서울 디자인 재단으로 명확하지만, 비어 있는 공간을 다양하게 사용하려는 노력이 있으니까 공공의 불확정 공간으로 볼 수 있다. 일부러 불확정 공간을 만들지 않아도 기존의 건물을 아주 다양하게 사용하려는 노력도 중요하다. 이를테면 최근엔 서교동 자이갤러리와 같이 모델하우스를 활용한다. 주차공간이 넓고 접근성이 좋은 데 있으니까. 이런 큰 공간을 공공의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가변적인 기능을 하는 것이 중요한 시대다. 우리에게 사적인 공간, 즉 주거공간은 항상 부족하고 너무 비싸다. 그러니 공공의 목적을 띤 외부의 공간을 만들 때 확장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공공의 커다란 건물은 꼭 필요한 걸까? 건물뿐만 아니라 길이나 고수부지, 광장 등 밖에서 공공으로 쓰는 모든 공간은 크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공간이 어떤 의미를 찾도록 도와줘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에겐 ‘의미 충만한’ 공간이 필요하다. 어떤 공간이든 랜드마크든 확실한 이야기가 그곳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예를 들면 다크투어리즘(비극적인 역사 현장을 둘러보는 여행) 같은 것이 있다. 서소문 공원이 2017년 4월에 순교 유적지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만약 그 장소에 올해 방문할 교황이 들른다면 더욱 중요하고 의미 충만한 자리가 되지 않겠나? 주변의 다른 순교 유적지가 있으니 함께 이어서 걸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다. 유형문화재가 이어져서 수평적인 건축이 앞으로의 랜드마크의 미래이지 않을까?
고층 건물을 지양해야 한다는 점에는 많은 건축가가 동의하는 것 같다. 서울 신청사도 덕수궁에서 바라봤을 때 앙각을 낮게 유지해야 하는 조건이 있었고, 서울에 높은 건물이 너무 많다는 의견에 공감해 수평으로 낮게 지었다. 하지만 그 많은 고층 건물은 대부분 사유 공간이다. 공공건물 중에서 시민에게 제공된 높은 건물은 거의 없다. 사유 고층 건물이 많다고 공공건물은 낮고 수평적으로 짓자고 주장하는 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서양의 경우 아주 오래전부터 시청사나 교회와 같은 공간을 높게 지었다. 고층 건물은 대부분 공공의 목적으로 지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근대화를 거치면서 고층 건물이 처음부터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말하자면 고층 건물의 시작 자체가 사유 건물인 것이다. 그래서 공공건물을 높게 짓는 과정이 생략된 것 같다. 한편으론 높은 데서 내려다본다는 건 근대화된 사람의 지배 야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독수리가 먹이를 찾기 위해 훑어보는 방식. 그러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을 순수하게만 바라보지는 않는 정서가 자리 잡았다. 최근엔 높은 건물 대부분이 주상복합과 같이 완벽하게 사적 주거 공간이다. 그 거대한 건물은 서울 어디서나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인다. 서양의 전통적인 고급 주택들이 안 보이는 곳으로 숨는 것과 대조적이다. 욕망의 결정체인 고층 건물이 불평등의 상징이 된 것이다. 그 탓에 서울은 위협적인 모습이 되었다.
해외의 몇몇 시청사는 높은 공간을 관광객과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하기도 한다. 사실 시민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건물이 다른 정치적인 공간보다 높게 위치한다는 건 중요한 부분이다.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는 런던아이가 일반인에게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했다. 런던아이 건립이 반대에 부딪혔을 때 시민들에게 런던아이를 타고 국회의사당을 위에서 볼 수 있다고 홍보했다. 파리의 에펠탑도 아무나 쉽게 파리를 한눈에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한 가치 아닌가? 노먼 포스터도 라이스닥(베를린 국회의사당) 위를 유리 돔으로 만들어 그 위에서 회의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했다. 시민 권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인데, 그런 시도가 우리나라에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분명 필요한 논의다.
상징적인 건물을 지을 때마다 생김새는 항상 가장 문제가 된다. 비판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우리의 전통과 맞닿아 있지도 않은 모습으로 왜 디자인했냐는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당신은 상하이의 고층 건물들을 좋은 사례로 꼽았다. 진마오 타워는 중국의 파고다를 형상화했고, 상하이 타워는 용이 승천하는 모습과 닮았다. 동방명주의 경우엔 11개의 크고 작은 구형 덩어리가 “크고 작은 진주 구슬이 옥쟁반에 떨어진다”는 백낙천의 시를 연상시킨다. 우리에겐 어떤 식으로든 지켜야 할 전통을 찾고, 확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제 우리도 유형문화제를 재해석한 건물을 가져야 할 때다.
하지만 우리가 참고해야 할 전통문화가 어떤 것인지 모호하다. 합의되지 못한 걸까? 토론도 부족했지만 우리는 침략을 통한 근대화를 거치며 갑작스럽게 기층(서민)문화를 잃었다. 이를테면 새마을 운동을 하면서 전국에 있는 사당을 다 없애버리지 않았나? 우리나라의 상층문화는 유교였지만, 하층문화는 불교와 무속 신앙인데, 이 문화를 너무 천대시하며 보존하지 못했다. 우리에게 갑작스럽게 기독교 문화가 들어오고, 종교적으로 급변하면서 조선시대의 서민문화를 천대했다. 일본만 해도 고급 주택을 지을 때 동산과 사당을 어떻게 자리 잡게 하느냐가 중요한 요소다. 몇몇 아시아 국가에선 샤머니즘이 중요하지 않나? 그런 문화에선 수직과 수평의 조화가 멋지다. 하늘의 뜻을 사람들이 수평적으로 받아야 하니까. 우리는 아주 소중한 무형문화를 20세기 초에 잃었다.
그럼에도 우리만의 문화를 꼽을 수 있다면? 백남준 선생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다. 그는 이스탄불의 바자르에 가서 시장 문화를 보고 우리와 닮은 것이 많다고 느꼈다. 우리의 시장, 즉 ‘난장’ 문화가 그곳까지 연결된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 백남준의 작품에도 난장의 정서가 있지 않나? DDP와 같은 공간에도 난장판이 펼쳐질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DDP의 문제는 오히려 경비원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젊은이들이 게릴라식 퍼포먼스를 펼칠 수 있도록 경계를 풀어야 한다. 지금 DDP에 키오스크(무인 단말기) 같은 장치를 많이 설치해서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는 바탕을 만들려고 준비 중인 걸로 안다. 그러니까 의미 충만한 현상이 뭔지 공간마다 정의할 수 없으면 교류라도 빈번하게 일어나게 해야 한다.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 명동에 가면 뭔지 모를 기분이지만 좋지 않았나? 그곳에서 좋은 교류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현재는 가로수길, 경리단길로 이어진 걸까? 그 공간들은 교류보다는 소비의 공간이 아닐까? 소비 이상 얻는 게 없으니 계속해서 옮겨 다니는 것일 테고. 물론 자본주의의 속성이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지만, 향유보단 창조를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적 유전자가 중요하다. 단지 소비를 통해 향유하는 것으론 교류가 되지 않는다. 그건 헤메는 거다. 여백의 공간에서 서로의 창작을 돕는 공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여전히 서울에서 문화를 소비하는 공간이 턱없이 부족한 것 같다. 소비하는 공간에서 창작으로 이어지는 노력들이 필요하다. 요즘 미술관들은 체험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미술관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아티스트, 테크니션, 관람객. 테크니션은 디지털 미술이나 인터랙티브 미술을 유도한다. 그런데 여기에 재료가 되는 기술들이 공대와 연결해서 진행된다. 우리도 여러 공대들과 미술관을 연결해서 충분히 대학생들의 창조 공간으로 이끌고, 보는 관객도 체험을 통해 재창조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아니면 코렐이 공장을 공개하듯이 만드는 공간 자체를 전시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뭘 만들 수 있는 문화가 자리 잡지 못한 건 공간, 이를테면 개러지Garage(차고)와 같은 사적이면서 넓은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 라는 의견도 있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안타까운 현상들이 생겼다. 대학생들이 돈을 주고 빌리는 스터디룸이 정말 많다. 그래서 랜드마크가 빈 공간, 즉 불확정 공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니면 꼭 건물이 아니라 설치 건축도 좋은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그 모습이 건물의 형태일 필요는 없다. 하나의 기계와 같은 설치 미술이어도 좋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선 넓은 토지가 필요하다. 빈 공간은 찾아보면 사실 많다. 노들섬 공터도 그런 공간이다. 이번 여름부터 대학생들과 노들 섬을 변화시키는 프로젝트인 ‘담박소쇄노들’를 진행하려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랜드마크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이를테면 노들섬에 은밀하게 작동하는 커다란 기계가 있다면 어떨까? 드러내지 않는 설치 건축을 시도하는 것도 새로운 랜드마크의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꼭 고정 건축이 랜드마크의 역할을 할 필요는 없다. 가변 건축도 관심 있게 봐야 한다. 지금 여수 엑스포 공간에 가보면 그때 사용한 텐트마저 그대로 있다. 한 번 짓고 설치하면 재활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런던 올림픽 농구장은 분해해서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또 사용한다. 가변 건축 기술을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우리에게 기술력이 부족한 건 아닐까? 여수 엑스포 공모 때도 유일하게 가변식 건축을 설계한 건축가가 있었다. 하지만 공모에서 떨어졌다. 꼭 기술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지자체에서 예산을 사용하는 방식이 더 문제다. 책정된 예산을 전부 쓰는 게 목표이니까. 예산이 가변적이지 못하니 건축도 가변적일 수 있을까? 무조건 예산을 사용해야 하는 지자체 입장에선 가변식 건물이 내키지 않을 수도 있다.
반대로 지금 건축들을 제대로 보존하지 못하는건 어떻게 생각하나? 상하이에선 스쿠먼(상하이 시민의 전통적인 주거양식)을 제대로 보존해서 고층 건물과 대비를 이룬다. 우리에게 보존할 수 있는 주거공간이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보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DDP의 경우 동대문운동장의 많은 부분을 보존하는 설계를 제시한 조성룡 건축가가 2등으로 밀렸다. 일단 심사위원이 새로운 기술을 보고 싶어 해서 아닐까? 자하 하디드는 곡면을 잘 만드는 건축가다. 그의 새로운 도전과 결과가 건축주가 원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도전으로 인해 새로운 기술도 개발할 수 있었다. 각각 다른 4만5천여 장의 비정형 곡면판을 만드는 기술을 직접 개발해낸 건 그런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건물을 지으려는 도전이 중요하다. 항상 실패하면 시도를 비난한다. 물론 비판 혹은 비난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아직 제대로 실패하지도 못했다. 경험이 축적되지 않았는데 무조건 짓지 않겠다고 하는 건 문제가 있다. 서울시장에게도 바라는 점이 있다면 바로 그 지점이다. 박원순 시장은 서울의 랜드마크가 자연, 역사, 사람이라고 했지만, 내 생각엔 서울엔 여전히 제대로 된 공공의 건물이 부족하다.
박원순 시장은 기존의 것을 없애지 않고 활용하자는 공략을 제안했다. 지금의 서울역 고가를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처럼 만드는 계획이다. 계획 자체는 좋다. 하지만 만약 하이라인 파크처럼 되려면 주변 건물과의 연결이 중요하다. 하이라인 파크는 많은 건물을 스쳐 지나간다. 덕분에 건물 안으로도 들어갈 수 있다. 그 때문에 건물의 로비를 위로 끌어 올리기도 했다. 단지 지키려는 노력뿐만 아니라, 본래 길의 역할을 했다면, 보행자가 새로운 서울역 고가도로를 통해 어디로든 연결할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
서울에 확실한 랜드마크가 없다고 생각하나? 63빌딩, 남대문 등 많다. 하지만 건물을 계속 지으려는 노력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만약 또다시 건물들을 짓는다면 기존의 건물들과 최대한 어울리는 쪽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신청사나 DDP의 경우엔 주변의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궁이나 전통 건축과 얼마나 어울리게 모습을 만드느냐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사람들이 어디서든 궁이 보이게 시선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통경축이라고 하는데, 만약 건물을 필로티 방식(2층 이상의 건물의 1층에 기둥만을 세운 공간)으로 만들어도 보행자는 어디서든 궁을 볼 수 있다. 그러면 건물 형태와 상관없이 어울린다고 느낄 수 있다. 게다가 위압감도 줄어든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보다 보행자의 시선이 중요하다는 말인가? 그렇다. 만약 제도가 생길 수 있다면 보행자의 ‘볼 권리’에 대해 신경 썼으면 좋겠다. 그것이 뒷 받침이되어야 수평적인 랜드마크도 가능하다. 경복궁 근처를 걸어 다니는데 경복궁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우리의 궁을 랜드마크로 꼽을 수 있을까? 앞으로 어떤 건물을 대표로 짓는다면 주변의 중요한 문화재가 그 건물로 인해 가려지지 않도록신경 써야 한다.
그럼에도 어떤 모양으로 지어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는 필요하지 않을까? 합의도 중요하지만 일단 도전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다양하게 지어보는 건 어떨까? 실용적으로 박스를 이용해서 아까 말한 가변식 건축물을 만들 수도 있고, ‘미니멀리즘’과는 정반대의 도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겐 오히 려 휘어 있는 모양이 더욱 자연스러운 것 같다. 해학이라는 전통을 선으로 표현한다면 반듯하지는 않을 테니까.
- 에디터
- 양승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