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여인의 초상

2015.03.02장우철

흔들리는 촛불 같기도, 풀린 매듭 같기도 하다. 누구보다 화려하지만 마른 풀보다 지쳐 보인다. 흠뻑 적신 목소리, 무슨 대수냐는 듯한 몸짓, 나이트 가운, 수천 번의 밤과 낮, 갑자기 꺼버리는 음악, 어디선가 온 여인, 한고은.

레이스 달린 투피스는 도나 카란, 검정색 브라는 포에버 21. 진주 목걸이는 타사키.

레이스 달린 투피스는 도나 카란, 검정색 브라는 포에버 21. 진주 목걸이는 타사키.

 

 

 

 

 

 

 

눈이 왔어요. 지금도 와요. 저도 봤어요.

메이크업 때 술을 권했는데 거절했죠. 네.

 

저는 마셨어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왜요?

이 여자가 한고은이라서. 하하. 저는 일할 땐 술을 마시지 않아요. 예전에 <사랑과 야망> 할 때도 술을 정말 마시면서 하지 않았냐고들 하는데, 아니에요. 선배님들 보면, 추운 날 촬영할 땐 소주 한잔씩 하시기도 하던데, 저는 그렇게 하면 일이 안 돼요. 

 

공연히 빼는 건 아닐 테고요. 눈이 풀려요. 혀가 돌아요. 정말 눈이 풀려요.

<사랑과 야망>은 2006년이었죠. 혹시 미자(극중 이름)가 남아 있나요? 아, 미자요. 없어요. 이젠 오래 됐으니까요. 씻어내기 참 힘들긴 했어요.

역할이 배우였죠. 배우가 배우를 연기했으니 어떻게든 흔적을 남겼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저를 쏟아 부은 작품은 없었어요. 그건 요만큼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어요.

실은, 요즘 내내 <사랑과 야망>을 봤어요. 질문을 만들기보다 그냥 당신의 연기를 봤어요. 아, 감사합니다. 아쉬움이 있어요. 더 잘했어야 한다는.

글쎄요, 아예 다 타버렸잖아요. 그토록 불완전한 여자를 연기하는 동안 매 순간 절벽에 선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혹시 <사랑과 야망> 이후, 한고은은 더 나가지 못했다는 말은 어떤가요? 그 말이 맞죠. 정확한 지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큼, 뭔가를 해소하면서, 감정이 널뛰면서, 미치게 동화할 만큼 나를 사로잡는 역할은 없었어요.

그럼 배우는 그 갈증을 어떻게 견디죠? 기다림이죠. 사랑을 기다리는 것처럼. 언젠가 오겠지.

막연히 기다리는 게 아니잖아요. 지독하게 겪었잖아요. 넘어서는 뭔가를 원하잖아요. 그건 너무 힘들지 않을까요. 약속도 없고, 기약도 없어요.
간이 큰가요? 모르겠어요. 대범해 보인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면, 제게 그러 면이 있는 거겠죠. 당신의 질문이 재미있네요. <사랑과 야망> 후에 한고은이 한 게 뭐가 있냐는 질문을 준비하셨을 땐, 제가 그걸 수긍할 거라고 생각하신 거겠죠. 맞아요. 고민이고 딜레마죠. 그렇다고 머리를 쥐어뜯고 약을 먹을 순 없잖아요? 내가 아직 그릇이 안 되었으니 뭔가 안 들어 오는 게 아닐까, 시간을 견뎌보는 거죠. 여기가 끝은 아니잖아요. 자기 자신을 더 다져야죠.

아주 이기적인 이유입니다. 내겐 더 멋진 한고은이 필요해요. 연극은 어때요? 달려들고 싶진 않아요.

역시 기다리는 건가요? 글쎄요. 하고 싶은 건 많아요. 라디오 디제이도 하고 싶고, 이름을 건 토크쇼도 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런 걸 다 하고 있지도, 하려 들지도 않아요. 제가 수동적이기 때문일까요? 아니에요. 나를 원하고, 내가 원하는 게 맞는 어떤 시점이 분명히 있어요. 뭔가를 내 입맛에, 내 욕심에 맞추려 들면 더 힘들어져요.

기다릴까요? 그래보죠. 인생은 긴 호흡이에요.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뭔가요? 음, 사람들이 나를 보면 대부분 비슷하게 얘기해요. “한고은 씨 예뻐요. 언니 잘해요. 멋있어요.” 인사치레, 배려, 그런 얘기. 근데 당신은 지금 다른 각도에서 나를 평가하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어요. 물론 감미로운 칭찬도 있었고요. 그 칭찬이 만날 듣던 소리가 아니라서 기분이 좋고요. 근데 제 대답은 너무 진부한데, 저한텐 지금 일밖에 없어요. 제게 가장 중요한 건 일이에요. 그래요, <사랑과 야망> 이후에 한고은이 한 게 뭐가 있느냐? 배우로서의 허기짐, 굉장히 커요. 도태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요. 가슴을 뜨겁게 갖고 싶고 욕망, 욕심. 크죠. 중요하고요. 근데, < GQ >하고 저하고 생일이 같은 달이네요.

인연이 있죠. 음, 좋아해요. 남성들의 잡지니까, 범접할 수 없는, 터부시하는 면도 좀 있는 것 같고요.

 

 

까슬까슬한 트렌치 코트는 랑방, 금색 스틸레토는 생 로랑.

까슬까슬한 트렌치 코트는 랑방, 금색 스틸레토는 생 로랑.

 

 

 

 

 

 

실크 드레스는 래비티, 흑진주 목걸이는 타사키.

실크 드레스는 래비티, 흑진주 목걸이는 타사키.

 

 

 

 

 

 

 

 

한고은 싫다는 남자는 못 봤지만, 그렇다고 자신있게 떠벌이듯 얘기하는 것도 못 봤어요. 어떤 식으로든 겁을 낸다고 느껴요. 왜 그럴까요. 제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죠. 하지만 아무리 평범해 보이는 사람도 어떤 면에서는 전혀 평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영화 <노팅힐>에서 배우를 연기하는 줄리아 로버츠가 그러잖아요. “난 그저 평범한 여자예요. 한 남자에게 사랑해달라고 얘기하는.” 저 또한 그래요. 남자들이 제 그런 부분을 못 보나 봐요.

연예인이라서. 연예인이 외계인인가요? 당신의 직업이 기자듯이, 누군가는 미화원이고, 누군가는 선생님이고, 저는 직업이 배우일 뿐이잖아요. 여느 다른 삶처럼 저 역시 치열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사람들을 만날 때 그냥 평범하게 대해요. 물론 타인이 저를 평범하게 대하지 못한다는 걸 느끼지만요. 하지만 스스로 특별하다 생각하진 않아요. 저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생각보다 털털하네요.” “한고은 씨 쿨하네요.” 근데 저 쿨하지 않아요. 엄청 소심해요. 하지만 뭐 털털해요. 은수저 물고 태어나지 않았고, 비단길 걸으며 살지 않았기 때문에, 털털하고 편한 게 좋아요. 아무리 그래도 치열하게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인지, 모든 걸 편안하게 대하질 못하는 면도 있나 봐요. 차가워 보인다고들 해요. 그건 제 단점이자 약점일 거예요.

눈앞에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사람들’이라는 알 수 없는 집합을 대해야 하잖아요. 사람들이라는 게 과연 어떤가요? 나는 지긋지긋하다고도 느껴요. 저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직업을 가졌어요. 사람들은 제게 굉장히 크죠. 하지만 이걸 알아요. 사람들을 사랑할수록 내가 더 상처를 받는다는걸요. 다행히도, 적당히 애착을 갖는 법을 배웠어요. 사람들을 지긋지긋해하지 말아요. 이 사람 저 사람 많이 대하는 직업이라 그런가 봐요. 저는 사람들을 대할 기회가 적어서 그런지, 집에서 <생생정보통> 같은 거 잘 봐요. 재미있어요.

아까 스스로 치열하다는 표현을 썼죠. 아주 어렸을 때부터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웬만한 아이들처럼 부모가 주는 혜택을 받지 못했고요. 그때그때마다 열심히 열심히, 내게 주어진 고민과 고비를 넘기면서, 최선을 다하면서, 내 능력에 넘치는 재주를 부리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하면서,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아요. 해이해지진 않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저의 치열함이 다른 사람의 치열함과 같을 수는 없겠죠. 누군가는 저에게 웃기시네, 할 수도 있겠죠.

웃기시네, 같은 말도 써요? 음, 가끔은요.

75년생이죠? 동갑이에요. 그래요? 반가워라.

과거는 뭘까요? 오늘을 있게 한 원동력이죠.

저는 연연해요. 너무 중요해서. 저는 그렇진 않아요. 지나간 시간들로부터 배우길 바라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다행히 저는 기억력이 그렇게 좋지 않아요. 하느님이 주신 선물 같아요. 94년? 95년? 그때까진 기억이 많아요. 하지만 그 이후로는 시간이 온통 한 덩어리 같아요.

덩어리 같은 시간을 배우로 살고 있죠. 처음엔 힘들었죠. 근데 지금은 너무 적성에 잘 맞아요. 일을 시작하면 미친 듯이 달리지만, 쉴 때는 발가락도 꼼지락거리기 싫을 만큼 가만히 있어요. 그러니 제게 배우가 얼마나 잘 맞는 직업이겠어요. 굉장히 정열적이다가 갑자기 쉬고 싶어 하고.

아까 이태원에서 촬영용 의자를 고르다가 문득 한고은에겐 어떤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시에 모든 게 상관없다고도요. 의자든, 보석이든, 이념이든, 남자든, 한고은에겐 어쩐지 시원찮아 보인달까요? 흥미로워요. 그 말이 기분이 좋네요. 그런데, 저 지금 좀 지쳤어요.

 

 

드레스는 랑방, 귀고리는 제이미 앤 벨.

드레스는 랑방, 귀고리는 제이미 앤 벨.

 

 

 

 

 

    에디터
    장우철
    포토그래퍼
    김형식
    스타일리스트
    오선희
    헤어
    이소영(제니하우스)
    메이크업
    박태윤
    어시스턴트
    최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