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좋아도 다시 못해

2015.10.02GQ

한국영화의 중흥기인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는 많은 사람에게 영화 현장을 꿈꾸게 했다. 하지만 어디서나 그렇듯이 그만둔 사람이 많다. 다시 영화 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다섯 명의 이야기. 이 글을 쓴 기자도 조감독 출신이다.

Movie판형

영화 전문 기자가 되기 전 충무로 밥을 좀 먹었다. 몇 편의 영화에 연출부와 제작부 그리고 조감독으로 일했다. 연출부 시절, 매일 아침 담당 배우 숙소 방 앞에 가서 깨우고, 감독님 방에 따뜻한 차를 갖다 드렸으며, 감독님을 모시고 현장에 가는 게 하루 일과였다. 프로듀서와 함께 전체 촬영 일정을 짰고, 매일 찍어야 할 분량을 소화하기 위해 언제나 좌불안석이었다. 조감독을 그만둔 뒤 기자가 되자 만나는 사람들마다 물어왔다. 왜 영화 현장 일을 그만뒀냐고.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답하기가 난감했다.

내가 일했던 2000년대 초반은 ‘한국영화 산업 제2의 르네상스’였다. 금융 자본과 대기업 자본들이 물밀듯이 몰려들어 제작되는 영화가 해마다 증가했고, 경력이 많지 않더라도 누구나 쉽게 영화 일을 할 수 있었다. 조감독도 좋은 시나리오가 있고 경력만 충분하면 감독으로 데뷔하기 수월했다. 운이 좋게도 네 편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할 수 있었지만 나는 감독이 되기엔 부족한 게 많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당장 누구에게 보여줄 만한 시나리오도 써놓지 않았고, 일을 하면 할수록 감독이 되고 싶은 욕심도 없어졌다. 나이도 무척 어렸다.(당신이 투자자라면 이십대 조감독에게 수십억 원을 댈 수 있겠는가?) 어릴 때 다른 일을 경험하고 싶어 영화를 그만뒀다. 그만둔지 얼마 되지 않아 충무로는 마이너스 43.5퍼센트라는 역대 최악의 수익률을 기록했고, 자본이 대거 철수하면서 보릿고개 시대가 열렸다. 다음 소개하는 다섯 명의 사례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A는 한때 잘나가는 조감독이었다. 1백억 원이 넘는 제작비가 투입된 블록버스터를 진두지 휘했다. 훌륭한 감독이 될 수 있겠다고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일정이 빡빡한 해외 로케이션 촬영 때 몸을 혹사한 탓에 촬영이 끝난 뒤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의사는 그에게 최소한 1, 2년 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영화인들에게 1, 2년은 귀한 시간이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쉬면 잊히는 게 충무로의 생리다. 휴식을 취한 뒤 충무로에 다시 왔지만 그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좋은 시나리오가 있다면 언제든지 감독이 될 수 있는 게 충무로가 아닌가? 하지만 오래 쉰 까닭인지 그가 쓴 시나리오는 늘 한발 뒤처졌다. 투자사들에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이럴 때 필요한 게 현실적인 조언을 해줄 수 있을 만한 좋은 프로듀서다. 하지만 이제 프로듀서의 권한이 많이 줄어들었다. 현재 그는 빵집을 한다.

B는 촬영감독이었다. 빛을 잘 이해해 조명 설치에 능했다. 지금이야 DP(Director of Photography) 시스템이라고 해서 촬영감독이 조명까지 관장하고 있지만, 그가 조수로 활동하던 10년 전에는 촬영감독과 조명감독이 엄격하게 분리됐다. 빛을 잘 이해하는 촬영감독이 드물 때였다. 사수인 촬영감독이 조명에 능통한 그에게 많이 의지했다. 촬영감독 데뷔에 큰 어려움이 없을 거라 생각한 것도 그래서다. 하지 만 촬영감독 데뷔작이 될 영화가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투자를 받지 못해 엎어졌다. 항상 스타 감독의 영화에 참여했던 까닭에 B는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기회가 또 왔지만 그 영화도 촬영에 들어가보지도 못했다. 그 사이 같은 팀에서 조수 생활을 하던 동료들이 데뷔했다. 성급함이 커질수록 기회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필모그래피의 공란이 길어질수록 제작자는 그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줄 알고 카메라를 맡기지 않았다. 그를 안타깝게 본 제작사 대표의 제안으로 자연 다큐멘터리를 찍게 됐다. 어쩔 수 없이 당장은 자연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고 있지만, 영화에서 경험할 수 없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C는 앞에서 언급한 DP 시스템 도입으로 인해 피해를 본 조명감독이다. 도제 시스템에서 조수 생활을 시작했고, 그 역시 도제 시스템으로 자신의 조명팀을 운영했다. 촬영감독과 조명 감독의 위치가 철저하게 분리된 필름 시대에는 그게 가능했다. 하지만 1990년대 말 황기석, 홍경표 같은 젊은 유학파 촬영감독들이 충무로에 와서 DP 시스템을 시도하면서 촬영감독이 조명까지 관장하는 방식이 충무로에 자리 잡았다. 처음에는 조명감독들이 콧방귀를 꼈다. DP시스템은 할리우드에서나 가능하지, 한국에서는 택도 없다고. 그래서 황기석, 홍경표 등 젊은 촬영 감독들이 촬영 조수 생활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데뷔하는 걸 보고 조명감독협회에서는 조명 감독들에게 그들과 일을 하지 못하게 텃세를 부리기도 했다. 그때 활동하던 조명감독들의 장담은 틀렸다. 지금은 한국형 DP 시스템(어떤 촬영감독은 DP 시스템, 또 어떤 촬영감독은 여전히 조명감독과 호흡을 맞추는 과도기형 시스템)이 현장에 뿌리를 내린지 오래다. 촬영감독과 조명감독이 각기 따로 제작자와 계약을 맺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촬영감독이 자신과 잘 맞는 조명감독을 지정해 계약을 맺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C는 성격이 불같아서 촬영감독과 종종 충돌했다. 그와 함께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촬영감독이 없었다. 또 젊은 촬영감독들은 자신들보다 나이 많은 그와 함께 일을 하기보다 또래의 조명 스태프와 호흡 맞추는 걸 더 선호했다. 조명감독이 촬영감독에게 간택되어야 하는 지금, 그가 설 자리는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현재 그는 드라마와 CF 조명감독 일을 하고 있다. 필름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오면서 생긴 변화 중 하나다. 그 많던 필름 현상소에서 일을 하던 영사 기사들이 직종을 바꾸거나 대기업 멀티플렉스 영사팀에 들어가 일을 하는 것도 이젠 오래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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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씨는 얼마 전까지 대기업 투자배급사에서 마케팅 일을 했다. 홍보 대행사에서 마케팅 경력을 시작해 대기업 투자배급사에 경력 사원으로 입사한 뒤 많은 상업영화의 마케팅을 책임졌다. 하지만 경력이 계속될수록 마케팅이 아닌 기획, 투자, 배급 같은 다른 분야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영화가 잘되면 감독과 배우의 공이지만, 흥행에 실패하면 마케팅의 책임’이라는 업무의 성격 때문에 마케팅은 기껏 남이 만들어놓은 영화를 보기 좋게 포장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반대로 기획이나 제작을 하면 영화의 전 공정을 책임질 수 있으니 영화가 진짜 ‘내 새끼’라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기획이나 제작을 무척 부러워한 것도 그래서다. 결국 그녀는 인사팀에 가서 보직 변경을 신청했지만, 대기업 투자배급사에서 기획, 투자 파트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정원이 언제 날지도 모를 일. 마케팅 일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도전을 할 것 인가. 갈림길에 선 그녀는 마케팅 일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영화를 한다면 어디서 어떻게 다시 시작할지를 고민 중이다.

E씨는 자신의 술집에서 술을 마신 정두홍 무술감독에게 술값을 받지 않았다. 한때 액션 배우였던 그가 가장 존경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두홍 무술감독처럼 그도 왕년에 몸 좀 썼다. 다치기도 많이 다쳤다. 말을 타고 질주하는 장면을 찍다가 낙마해 죽을 뻔한 사고도 있었고, 차 충돌 신을 찍다가 화재가 나 화상을 입을 뻔한 적도 있었다. 다칠 때마다 제작사가 병원비를 지원해줬지만 4대 보험을 포함한 액션 배우를 위한 제도적 안전장치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액션 배우들의 수명이 대체로 짧다. 중년 액션 배우들이 많은 할리우드와 비교하면 어마한 차이다. 30대 중반이 되면 은퇴하는 운동선수가 그렇듯이 그 역시 나이를 먹으면서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그를 찾는 영화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는 스스로 “무술감독이 될만큼 액션 연출에 재능이 있지는 않다”고 인정하면서도 “액션 연기를 할 때 무술감독 준비를 차근차근 할 걸 그랬다”고 후회한다. 하지만 무술감독이 되기 위해 필요한 노하우를 가르쳐주는 교육기관이 전무한 것도 사실이다. 연극영화과가 우후죽순처럼 생긴 것과는 대비되는 풍경이다.

환경은 변한다. 그 탓에 어떤 역할은 새로 생기고 없어진다. 한국영화도 갑작스럽게 변하며 여러 변화가 있었다. 작은 제작사가 사라지고, 프로듀서의 권한이 줄어들며, 촬영감독이 조명감독을 선택하고, 대기업이 주도해 영화를 만들게 되니, 그 속의 사람들은 영화를 더욱 욕망하게 된다는, 어찌 보면 이젠 빤한 이야기. 하지만 그 빤한 이야기 속에 패자가 있다. 패자가 다시 이기는 걸 우리는 영화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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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글 / 김성훈('씨네21' 기자)
    일러스트
    문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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