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3.

2018.05.23GQ

이 글을 읽을 때 함께하면 좋을 것.

Lager Beer – Cass
Garrett Glass – Ralph Lauren

핑계는 만들 요량이면 얼마든지 있다. 날씨 탓만 하자고 들어도, 부적절한 온도, 바람의 수상한 방향, 공기 중의 미심쩍은 습도 같은 온갖 대기의 조건이 다 이유가 된다. 그러니 이보다 훨씬 세련되고 효율적이며 유용한 변명쯤이야 당장 천 가지는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또 운동 계획을 미루고, 다음을 노리다가 계절이 달라지고 해가 바뀐다. 어릴 땐 어린 것만으로 저절로 운동 효과가 있었다. 우선 감정의 파동만으로도 장거리 달리기만큼의 에너지가 소비됐다. 격렬하게 사랑하고 열렬하게 미워했는데, 대체로 같은 사람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했다. 작은 일에 크게 분노하고 사소한 일에도 목숨을 거는 통에 해만 지면 기진맥진하고 늘 배가 고팠다. 가만히 앉아 있기엔 여기저기 근질거려서 밤낮으로 잘도 다녔다. 더러 어른들에게 “넌 엉덩이가 가벼워 마음에 든다”는 말도 들었다. 분주한 하루 중 뭘 먹든 그 즉시 화르륵 연소되는 기분이 들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여분의 지방이 없으니 근육은 걸핏하면 온몸에 척척 붙었다. 꽃을 들어도 전완근이 생기고 재채기 몇 번에 복근이 생기는 식. 그러나 메타볼리즘 과잉의 날들은 쏜살같이 지났고 더 이상 그런 일은 없다. 이제는 매일, 운동을 더 미룰 수 없다는 걸 몸의 신호로 깨닫는다. 미용과 멋이 아닌 건강과 생존의 차원에서. 어느 날 밤 꿈, 초인종이 발악하듯 울리는데 의자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문을 열어야 하는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당혹, 낭패, 좌절,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보기엔 아름답게 여위었지만, 팔다리가 가늘어지는 게 근육 손실 때문이란 걸 알고 일부러 체중을 늘리는 중이던, 어떤 선배의 충고를 들은 날 밤의 일이다. “너 나날이 삐쩍 마르는데 운동은 생각도 안 하지? 그러다간 나중에 서 있지도 못한다”는 말이 깃발처럼 마음에 꽂혔다. 부에노스 아이레스풍의 집에서 피요트 향초만 피우고 있다간 생 로랑을 입은 해골이 되어 비척비척 절룩절룩 도시를 부유할 일만 남겠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때 짐에 열심히 다녔지만 기구 위를 멍청하게 달리고 무거운 쇳덩이를 괜히 들었다 내렸다 하는 동안 ‘이게 지금 도대체…’ 한심해져서 돈만 날린 전력이 있으므로, 질리지 않고 꾸준히 할 수 있는 운동을 찾는 게 중요했다. 후보 목록을 차분하게 적어봤다. 그런데 모든 운동 종목에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싫은 점이 있었다. 여럿이 함께 하는 건 별로고, 괴이한 포즈가 포함된 건 부끄럽고, 운동복이 안 예쁜 건 안 내키고, 가르치려는 목적이어도 선생이 몸을 만지는 건 질색이고…. 이거 빼고 저거 빼고 차 떼고 포 떼는 식으로 추리고 나니 테니스, 펜싱, 검도 정도가 남았다. 셋 다 옷이 멋지고 장비가 폼 나며, 공간의 구성도 싫지 않았다. 결국은 대련 방식이지만 초기엔 혼자 기술을 연마한다는 점이 제일 마음에 들었고. 즉시 조사에 착수했다. 고려 사항은 집에서 걸어서 오갈 수 있는 거리인지, 가는 길에 맛있는 커피집과 오는 길에 조촐한 맥줏집이 있는지, 아는 사람을 마주칠 확률은 충분히 적은지, 대로가 아닌 작은 골목으로 다닐 수 있는지, 그리고 담백하고 수다스럽지 않은 사람이 가르치는지. 대부분의 조건에 부합하는 작은 검도장을 찾았다. 커다란 창밖으로 학교 운동장이 보이는 옛날식 낮은 건물의 2층. 성격이 깔끔한 사람이 관리를 하는지 체육관치곤 청결하고 아늑했다. 호구가 놓인 나무 선반은 손질이 잘되어 반질반질하고, 오후의 빛이 깊숙하게 들어와 크고 연한 나무 그림자가 바닥에서 물결처럼 흔들렸다. 때마침 창밖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애들의 함성이 들렸다. 가슴이 뛰고, 이런 도장이라면 매일 오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도복과 장비를 두루 찾아보니, 또한 흡족했다. 이제 등록을 하고 첫 수업을 받으면 시작인데, 못 갈 이유가 어쩌면 그렇게 착실하게 매일 생긴다. 그게 참, 하도 그럴듯하고 마땅하며 타당해서 이것 참, 어쩔 수가 없네.

    에디터
    강지영
    포토그래퍼
    이현석